“악순환 끊어야 경제 성장 가능하다”
  • 이민우 기자 (mwlee@sisapress.com)
  • 승인 2017.02.15 15:01
  • 호수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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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은 한국 사회의 적폐…성장 과실 어디로 갔나

대선 정국이 열렸다. 대권을 꿈꾸는 예비후보들은 저마다 정책들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비정규직 대책 또한 누구나 언급하는 핵심 과제다. 역대 정권마다 해결하고 싶었지만,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다. 비정규직 문제는 당사자들의 고통에서 끝나지 않는다.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진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사회적 문제다. 시사저널은 대선 정국에서 한국 경제의 핵심 과제인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몇 회에 걸쳐 원인과 문제점을 진단하고, 대선 주자들과 전문가로부터 대안을 듣고자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 640만 명. 2017년 대한민국의 오늘을 보여주는 숫자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는 870만 명으로 추산한다. 일하는 사람 2~3명 중 한 명은 비정규직이라는 의미다. 어느새 ‘비정규직’이란 단어는 너무나 익숙하게 다가왔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돈을 빌리기 위해 노동 유연화 정책을 강요당한 결과다. 파견법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아웃소싱(외주화)이 일상화되면서 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 결과 청년실업, 고용절벽, 대기업 위주 성장구조처럼 한국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는 ‘고질병’이 돼 버렸다.

 

대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용 불안과 저임금, 사회적 차별의 3중고에 신음한다. 이들에게 근로기준법에 보장된 권리는 사치에 가깝다. 누군가에게 당연한 연차휴가 또는 유급휴가마저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자칫 법을 들먹이며 권리를 찾으려 하면 계약해지, 사실상 해고를 당한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은 그림의 떡이다. 성과급이나 명절수당은 더 이상 기대할 수조차 없다.

 

문제는 그들의 고단한 삶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정규직과 임금 격차가 커질수록 주머니를 닫게 된다. 비정규직 월 평균임금은 151만원에 불과하다. 당연히 쓸 돈이 없다. 근로자 2~3명 중 한 명이 이 같은 여건에 놓이다 보니 내수가 살아나지 않는다. 민간소비가 위축되면서 기업들이 어려워지고, 기업들은 또다시 상대적으로 값싼 노동자를 찾게 되는 악순환의 구조다.

 

ⓒ 시사저널 미술팀

53살 동갑내기를 통해 본 대한민국 자화상

 

두 명의 동갑내기 남자가 있다. 대기업 부장으로 재직 중인 김아무개씨(53)는 최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들이 서울의 유명 사립대에 입학을 앞두고 있어서다. 그는 부인과 슬하에 올해 대학에 입학 예정인 자녀 1명을 두고 있다. 3년간 과외 몇 개와 학원을 보낸 보상을 한꺼번에 받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다. 김씨의 연봉은 1억800만원. 세금 공제 후 월 730만원을 받는다. 그는 현재 서울 마포구 소재 34평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6년 전 대출 3억원을 받아 구입한 뒤 1억원을 갚았다. 김씨는 자신과 부인이 쓰는 차량 2대를 보유하고 있다.

 

대기업 하청업체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노아무개씨(53)는 한숨부터 나온다. 수도권의 4년제 대학에 합격한 아들의 등록금과 원룸 보증금을 내기 위해 저축은행을 찾아야 했다. 아버지로서 첫 등록금조차 학자금대출을 받으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동안 생활비로 쓰기 위해 마이너스 통장을 쓰고 있던 탓에 제1금융권 대출은 어려웠다.

 

노씨의 연봉은 3000만원 남짓이다. 매월 세금을 공제한 실수령액은 약 210만원이다. 마트에서 일하는 노씨 부인의 수입까지 합치면 매월 330만원가량을 번다. 17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살면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지만 매월 가계부를 보면 울상을 짓게 된다.

 

동갑내기 김씨와 노씨의 일상은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김씨는 매주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외식에 나선다. 보통 아들이 좋아하는 스테이크나 아내를 위한 회, 한우 등을 먹는다. 여름과 겨울 두 차례 해외에 나가지만, 올겨울에는 아들 혼자 유럽 여행을 보냈다. 그간 입시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김씨는 “외식과 여행 모두 가족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한다”며 “이렇게 노력한 덕분에 주변의 다른 가정에 비해 화목한 편”이라고 말했다.

 

반면 노씨는 외식이 부담스럽다. 월 1회 정도 가족들과 외식을 한다. 대부분 집 근처 삼겹살집이나 중국집에서 먹는다. 고급 레스토랑은 결혼기념일이나 가족 생일 등 특정일이 아니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노씨는 매년 여름 휴가철에도 여행 한 번 제대로 가지 못했다. 최근 친구들과 스키장을 가고 싶다는 아들을 간신히 설득했다. 그럴수록 아들과의 갈등도 빈번해졌다. 그는 “대학 등록금 때문에 빚을 얻으러 다니는 마당에 여행은 꿈도 꾸기 어렵다”며 “아들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싶었는데 남들처럼 과외도 못 시켜줘서 원하는 대학에 못 간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두 사람의 고민거리도 달랐다. 김씨는 노후 준비와 자녀의 미래를, 노씨는 눈앞의 현실을 걱정했다. 김씨는 매월 150만원을 저축하고 있지만 노후 준비를 위해서 부족하다고 느낀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할 때까지 지원하고 집을 장만해 주려면 목돈을 모아 놔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반면 노씨는 아들 등록금은커녕 이번 달 월세부터 걱정이다. 갈수록 쌓여가는 빚 때문에 이자 부담이 커졌다. 가계부를 아무리 살펴봐도 씀씀이를 줄일 곳이 거의 없다. 노씨는 “아들도 이런 상황을 아는지 2학기 때부터 학자금대출로 등록금을 내고 자신이 벌어서 생활하겠다고 한다”며 “대견하면서도 나중에 나처럼 살까봐 걱정”이라고 씁쓸해했다.

 

노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8월 기준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분석한 비정규직 숫자는 874만 명이다. 여기에 평균 근로자 가구원 수(2.82명)를 대입하면 전체 인구의 절반이 노씨와 비슷한 환경에 놓여 있다. 비정규직의 월 평균임금이 151만원에 불과한 점을 고려하면 노씨의 상황은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한다.

 

비정규직 자녀가 비정규직으로 입직할 가능성은 77.8%다. 비정규직의 사회적 차별도 대물림되는 셈이다. © 연합뉴스

대물림되는 비정규직

 

비정규직의 더 큰 고통은 대물림이다. 비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낳는 구조는 점차 고착화되고 있다. 비정규직 부모의 자녀는 정규직 부모를 둔 사람과의 경쟁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다. 사교육을 잘 받아야 소위 ‘일류대학’에 갈 수 있다. 취업도 비슷한 구조다. 일류대학을 나와야 좋은 직장에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 부모의 자녀에게 정규직 취업문은 더욱 좁게 느껴진다. 자녀만은 정규직으로 만들려고 몸부림쳐 보지만 점차 그 결과는 더욱 뻔해지는 상황이다. 사회적 차별과 고단한 삶도 덤으로 대물림되는 셈이다.

 

실제로 비정규직 자녀가 비정규직으로 입직할 가능성이 77.8%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성공회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김연아 박사의 논문 ‘비정규직의 직업이동 연구’에 따르면, 부모가 비정규직이면 정규직 입직 비율은 21.6%에 불과했다. 반면 부모가 정규직이면 자녀의 정규직 입직 비율은 27.4%, 비정규직 입직 비율은 67.8%였다.

 

김연아 박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절이 세대 안에서 그치지 않고 자녀의 직업적 지위 결정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분석됐다”며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사회 이동의 기회가 더는 균등하지 않고 빈곤의 세습 구조가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을 통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고용형태의 세습 고리를 깨려면 고용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 마련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비정규직 경험을 바탕으로 정규직 일자리로 이동할 수 있을까. 통계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 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가깝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비정규직 이동성 국가별 비교’ 자료를 보면, 한국의 비정규직 근로자 가운데 1년 뒤 정규직으로 전환된 비율은 11.1%에 불과했다. 비교 대상인 16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치다. 회원국 평균인 35.7%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오히려 비정규직으로 오래 일할수록 정규직 전환이 더 어려워진다는 게 통설이다.

 

물론 정규직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고용이 가장 불안정한 초단기근속의 나라다. 근속연수 평균은 5.8년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짧다. 일자리 문제는 노후 계획, 삶의 질에도 타격을 미친다.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졌고, 대기업조차 승진하지 못하면 퇴직을 강요받는 시대에 돌입했다.

 

경제 성장의 과실은 어디로 갔을까. 한국은 IMF 외환위기를 빠르게 탈출했다. 성장률이 조금씩 낮아져 저성장시대에 돌입했지만 여전히 플러스 성장을 거두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800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가 2002년에 직전 수준으로 회복한 뒤 꾸준히 성장했다. 2015년 1인당 국민소득은 2만7340달러다. 하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 경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소득의 양극화, 경제 성장을 가로막다

 

랜달 존스 OECD 한국담당관은 2016년 기자간담회에서 “비정규직 문제 등이 성장잠재력 확충을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 연합뉴스
거시적 수치로 보면 소득은 늘어났지만 가계에 분배되는 비중은 갈수록 하락했다. 2015년 국민총소득(GNI) 1565조8155억원 가운데 가계 소득은 970조3642억원으로 62%를 차지했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 당시 72.8%보다 10%포인트가량 떨어졌다. 반면 기업소득 비중은 1998년 13.9%에서 2015년 24.6%로 늘었다. 가계소득 감소분이 고스란히 기업의 주머니로 들어간 꼴이다. 돈을 벌어들인 뒤 기업들만 이득을 보고 근로자에게 혜택을 나눠 주지 않았다. 오히려 투자를 줄이고 비정규직 고용을 늘려 가계로 흘러가는 인건비를 줄였다. 그 결과는 비정규직에게 더욱 가혹했다.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월 평균임금은 2001년 52.6%에서 2016년 49.2%로 줄었다. 랜달 존스 OECD 사무국 선임이코노미스트는 “비정규직이 정규직에 비해 임금, 사회보장 범위, 직업훈련 기회 등이 턱없이 낮다 보니 심각한 임금 격차와 높은 상대적 빈곤이 발생한다”며 “한국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dualism)가 사회 통합과 성장잠재력 확충을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 현 정부는 가계소득을 늘리기 위한 각종 정책을 부랴부랴 꺼내 들었다. 2014년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가 제시한 ‘가계소득 증대 세제 3대 패키지’가 여기에 해당됐다. 임금을 올리고 배당에 적극적인 기업에는 세금 혜택을 주고, 투자와 임금 인상, 배당에 인색한 기업에는 세금을 더 내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최대한 가계소득을 늘려 소비를 확대함으로써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고육지책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2015년 전체 가구의 실질소득은 전년 대비 0.9% 늘어나는 데 그쳐 2009년 이후 가장 낮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대신 기업은 징벌적 과세를 피하기 위해 배당을 늘렸다. 한 번 늘리면 줄이기 어려운 임금 대신 일시적인 배당을 선택할 것이란 예견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다수의 국민보다는 주식을 보유한 소수에게 혜택이 돌아갔다. 기업들은 경기 부진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으로 인해 대규모 현금성 자산을 쌓아두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6년 11월 기준 기업이 보유한 시중통화량(M2)은 639조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홍기용 인천대 세무학과 교수는 “월급은 한 번 올려주면 내리기 힘들고 투자는 리스크를 감안해야 한다”며 “결국 기업들이 세금을 피하기 위해 배당을 늘릴 것은 누구나 예상했던 일이었는데 정부만 몰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선 비정규직 대책 등을 통해 가계소득을 늘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업들이 사내유보금으로 일자리를 늘리고 근로자 임금을 올려 주거나 정부가 세금을 감면하는 방법, 세금을 통한 기본소득 지급 등 다양한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동반성장 차원에서 어떤 합의를 통해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근로자의 소득을 올려 주는 방법이 실행된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투자할 곳을 못 찾는 기업에서 근로자로 소득 재분배가 이뤄지면 전체적으로 총수요가 늘어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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