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들의 해결 방식은 ‘사과’였다
  • 조유빈 기자 (you@sisapress.com)
  • 승인 2017.02.28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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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제 시인 성폭행 혐의로 구속…박범신 작가 등 활동 중단 선언

시집 ‘다정’과 ‘삼류극장에서의 한 때’ 등을 펴낸 시인 배용제씨가 자신의 제자들을 성폭행한 혐의로 최근 구속됐다. 배씨는 2011년부터 3년 간 경기 고양예고 문예창작 교사로 일하면서 제자 10여 명을 성희롱하고, 자신의 창작실 등으로 미성년 문하생 5명을 불러내 성추행․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배씨의 파행이 드러난 것은 지난 해 10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서다. 피해자들이 트위터에 ‘고발자5’, ‘생존자’ 등의 계정을 만들고,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인 글을 게재하면서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시인과 작가 등 문단 내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인사들이 성희롱이나 성폭행에 연루됐다는 내용이었다. 

 

배씨에게 문학 강습을 받았다는 학생 6명은 트위터에 “배용제 시인이 학생들을 자신의 창작실로 불러 성관계를 제의하고 ‘내가 네 첫 남자가 돼 주겠다’, ‘너랑도 자보고 싶다’ 등의 성희롱 발언을 했다”는 글을 올렸다. 배씨가 강제로 성관계를 한 후 나체를 촬영하는 일도 있었다는 폭로도 나왔다. 

 

 

배용제 시인 구속으로 문단 내 성폭력 문제 수면 위로

 

 

논란이 일자 배씨는 자신의 성추행 혐의를 인정했다. 배씨는 자신의 SNS를 통해 “예고에 재직하던 수년 전부터 그만둔 이후에도 폭력이라는 자각도 없이, 단 한 번의 자기성찰도 하려하지 않은 채, 많은 일들을 저질러왔다”며 “시를 가르친다는 명목 하에 수많은 성적 언어로 희롱을 저지르고, 수많은 스킨십으로 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배씨는 이어 “더욱 부끄러운 일은 몇몇의 아이들과 성관계를 가졌다. 이 어이없는 일을 ‘합의했다’는 비겁한 변명으로 자기 합리화하며, 위계에 의한 폭력이라는 사실을 자각이나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가 시작되고, 논란이 확산되자 배씨는 말을 바꿨다. “합의하에 성관계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성희롱 여부에 대해서도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경찰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서울지방경찰청은 2월24일 배씨를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위력에 의한 미성년자 간음)·아동복지법 위반(성희롱) 혐의로 구속했다. 

 

문단 내 성추행과 성폭행 문제가 공론화 되면서 그 동안 가려졌던 추가 피해 사례도 잇달아 불거지고 있다. 한 전직 편집자는 “박범신 작가가 편집팀 여성들을 ‘은교’라고 부르며 신체 접촉을 했다”며 “‘여성 편집자 중 자신과 모종의 관계가 없었던 이는 없었다. 원래 남자 작가와 여자 편집자는 그런 관계’라는 말까지 했다”고 폭로했다. 영화평론가 김수, 이이체, 이준규, 백상웅 시인, 김도언 작가 등에게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했다는 고발도 이어졌다. 

 

트위터 등에서 구체적인 증언이 나오고 정황이 확실하면 경찰은 인지수사를 진행할 수 있다.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가 폐지됐기 때문에 제3자가 성범죄자를 고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폭로는 대부분 처벌로 이어지지 못했다. 트위터에 올라온 글에서 확실한 범죄 혐의점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가 정식으로 고소하는 것이 가장 수사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지만,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고소를 꺼리는 피해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작가회의 주축으로 한 징계위원회 발족

 

결국 폭로에 대한 가해자들의 해결방식은 사과와 활동중단 선언뿐이었다. 박범신 작가는 트위터에 “오래 살아남은 것이 오욕~죄일지라도 누군가 맘 상처받았다면 나이 든 내 죄겠지요. 미안해요~”라는 1차 사과를 올린 뒤 비판이 이어지자 삭제하고 “인생-사람에 대한 지난 과오가 얼마나 많았을까, 아픈 회한이 날 사로잡고 있는 나날이에요. 더 이상의 논란으로 또 다른 분이 상처받는 일 없길 바래요”라는 글을 올렸다. 사과글을 게재한 뒤 박씨는 신작 장편소설 ‘유리’의 출간을 중단했다.

 

이이체 시인도 “피해자분의 말씀대로 저는 성적, 언어적 희롱과 폭력을 저질렀으며 이는 모두 제 잘못”이라며 “기존에 맺은 모든 저서 계약을 파기하고 출간 예정 계획을 취소하겠다”고 밝혔고, 김도언 시인도 “어느 시기에 호감을 느낀 분들과 다소 불안정한 감정을 가지고 만난 적이 있다”며 “기한없이 근신하고 반성하면서 인간의 도리를 회복하겠다”고 글을 올렸다. 

 

결국 가해자들의 사과나 저서 절판 등 ‘꼬리 자르기’식 대응 대신에 문단과 출판사의 문화를 돌아볼 수 있는 자생적인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작가회의는 지난해 11월 소설가 공지영을 위원장으로 한 징계위원회를 설립하고 성폭력 혐의로 작가 7명을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작가회의는 “이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조직적 차원에서 다각도로 방법을 모색 중”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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