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가야사 편)] 국가는 바다 위에도 있을 수 있다
  •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3.02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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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 지은 나라, 《오디세이아》 속 해상왕국 파에아키아

요즘 우리에겐 생소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고대에는 ‘해상국가(海上國家)’라는 개념이 있었다. 말 그대로 ‘바다 위의 나라’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어에는 여기 해당하는 ‘탈라소크라시’라는 단어가 있었다. 바다를 뜻하는 ‘탈라사(thalassa)’와 통치를 뜻하는 ‘크라시(cracy)’가 합쳐져 만들어진 이 말은 육지에는 비교적 좁은 땅을 베이스캠프로 두지만, 바다를 주 무대로 활동하고, 해상교역로를 통해 무역을 하거나 무역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서 경제적 이익을 쌓아 세력을 형성하는 집단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물론 그 집단의 규모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되었을 때 붙여지는 이름이다.

 

원래 그리스인들의 기록에 나오는 해상국가를 가리키는 개념인 ‘탈라소크라시’의 전형적인 국가들은 주로 상고대(上古代)에, 좀 더 정확히 보면 그리스가 지중해의 최강자가 되기 이전의 시기에 존재했던 것 같다. 대표적인 예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파에아키아(Paeacia)’다. 폭풍에 배가 휩쓸려 겨우 목숨만 건진 오디세이를 살려주고 도와주는 가운데 오디세이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 가장 소중한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던 애절한 운명의 공주 ‘나우시카(Nausicaa)’의 나라다.

 

ⓒ Pixabay

호메로스는 이 해상국가 파에아키아를 거의 이상향처럼 그리고 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늘어서 있는 항구도시로 구성된 파에아키아에는 크고 튼튼하며 빠른 배들이 수도 없이 정박해 있었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궁전과 거기 딸린 포도와 올리브가 넘치는 정원들이 있다. 파에아키아 사람들은 창과 화살 등 무력을 좋아하지 않지만 바다 위에선 당할 자가 없을 정도로 날쌔고 강하며, 춤과 노래, 달리기를 잘한다. 또한 마음씨가 친절해서 오디세이처럼 표류해서 들어온 나그네에게도 융숭한 대접을 해서 돌려보내주는 전통이 있었다. 파에아키아의 왕 알시노우스가 오디세이를 구해준 후 신하들에게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들을지어다, 파에아키아의 명장, 고관들이여- 

 이 손님은 동에서인지 서에서인지 몰라도 표류 끝에 이곳에 당도하였소이다. 

 이 분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으니, 

 과거 여느 때처럼 신속히 도움을 주도록 합시다. 

 자, 성스러운 바다에 가장 적합한 흑선(黑船)을 띠우고 

 우리 땅에서 가장 우수하다 알려온 청년 쉰 하고 두 명을 골라봅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는 보통 전편과 후편으로 나누지만, 구조적으로 볼 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오디세이가 트로이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많은 조난에 시달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고향에 돌아오지 않자, 오디세이의 아내 페넬로페와 결혼해서 이타카의 왕좌를 차지하려는 구혼자들에게 페넬로페 모자가 시달리는 과정, 둘째는 마녀 칼립소에게 붙들려 있다가 아테네 여신과 헤르메스 전령신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온 오디세이가 해상국가 파에아키아로 인도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 과정, 셋째는 고향에 돌아온 오디세이가 지략을 발휘해 구혼자들을 물리치고 가정과 나라를 되찾는 과정. 

 

이 중 파에아키아에서 체제하는 과정은 이 환상적인 나라에서 환상적인 사람들한테 따뜻한 보살핌을 받는 가운데, 오디세이가 이들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모험담으로 구성된다. 외눈박이 싸이클롭스, 사람을 동물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을 가진 마녀 키르케, 노래로 뱃사람을 홀려 바다에 빠져죽게 만드는 사이렌 등,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유명한 에피소드들은 모두, 오디세이가 파에아키아의 왕 알시노우스의 궁전에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태로 전해지는 것들이다. 

 

알시노우스 왕의 궁전에서 자신의 모험담을 들려주는 오디세이

 

이 점은 바다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긴 항해 끝에 안심하고 내려 도움을 받거나 혹시라도 난파했을 때 자신을 살려주고 회복시켜주는 이국의 땅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음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사실 앞서 본 페니키아와 같은 해상국가가 존재하려면, 이렇게 본토를 떠나서도 도움을 받아 항해를 이어갈 수 있는 항구가 꼭 있어야 하는 필요조건일 수밖에 없다. 

 

장거리 항해를 한다고 하면 현대인인 우리는 흔히 큰 배에 식량과 물을 싣고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을 생각한다. 요즘 같이 배 성능이 좋고 항해기술이 발달해 있을 때 대서양이나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데 빠른 경우 4~5일이면 되니까 그게 가능하다. 이에 비해 옛날 돛단배는 속도가 느리고 기후와 해류 등 환경조건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장거리를 안전하게 완주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옛날에는 대륙과 대륙을 잇는 정도의 항해가 불가능했을 거라는 결론이 나오기 쉽다. 

 

하지만 유럽에서 지중해를 거쳐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오거나, 거꾸로 동아시아에서 동남아시아를 거쳐 인도나 더 멀리 아프리카와 유럽까지 가는 데는 굳이 이런 방법으로 하지 않아도 항해가 가능하다. 중간 중간 쉬어가면서 가면 되는 것이다. 출발점에서는 그 다음 항구까지 가는 데 필요한 식량과 물만 실으면 된다. 배에 탄 사람 중에도 다음 항구까지만 갈 사람들도 있고 최종 목적지까지 갈 사람도 있을 것이다. 먼 거리를 꼭 가야 하는데 그 항해를 견뎌낼 만큼 튼튼한 선박이 없다면 중간에 배를 바꾸면 된다. 항해술과 조선술이 월등 발달한 현대에서조차 이런 항해법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해상활동으로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키우려면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해상교역로를 따라서 위치한 적절한 항구 지역의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일 테다. 지금도 그렇지만, 바닷길 도중에 위치한 항구가 장거리 항해를 하는 데 필수조건이었던 옛날에는 더 말할 것 없을 것이다. 그 관계가 원만하고, 관계망이 더 풍부하고 장거리에 걸쳐 형성되어 있을수록, 해상활동에서 유리해지는 조건이 된다. 

 

해상국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에 앞서는 필요조건이 있다. 뒤로 큰 산이 있고 앞으로 바다가 펼쳐져 있거나, 큰 산지 속에서 발원하는 물이 유속이 빠르고 수심이 깊은 강을 형성하여 바다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큰 산들이 뒤에 있으면 목재가 원활하게 공급되어 크고 튼튼한 배를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육지에 살고 있는 다른 인간 집단의 침입을 막아줄 수 있다. 

 

대륙에 붙어 있는 해안지방으로서 뒤로 병풍처럼 산이 둘러 있는 경우로 대표적인 것이 고대 페니키아와 지금 중국의 푸젠(福建)성이다. 페니키아는 동쪽에 위치한 레바논 산맥이 이루는 가파른 경사면을 병풍처럼 뒤에 두르고 있다. 지금은 거의 황폐한 모습이지만 고대에는 이 산지에서 향기가 높고 단단해서 고급 목재로 유명한 레바논 삼나무가 엄청나게 많았다는 사실을 성경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구전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진시황제에 이어 대륙 통일을 완성시킨 중국의 한족(漢族)은 기본적으로 육지에서 성장한 세력이었다. 이들이 점령했던 땅을 표시한 지도를 보면 현재 푸젠성 인근 및 타이완, 하이난 등 해안도서 지방은 하얀 여백으로 나온다. 역시 뒤에 위치한 병풍처럼 높은 산지 때문에 온 대륙을 다 차지하고도 이 부분만은 정복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한나라의 국경


페니키아, 광동 외에도 고대 그리스 해상국가 연합이었던 델로스 동맹의 맹주 아테네, 지중해 세계를 무력으로 장악했던 로마제국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해상국가들은 다 그런 지리적·생태적 필요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삼국시대라고 알고 있는 시기 조금 이전부터 가락국도 그랬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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