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가야사 편)]해상국가 가야의 위용, 그리고 망각의 역사
  •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3.13 15:2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디세이아》 속 이상적 해상국가와 닮아

일단 가락국의 지형을 보면 해상국가로서의 필요조건은 갖추었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마치 지붕처럼 ‘ㅅ’자를 이루고 감싸고 있는 풍부한 산림지대여서, 여기서 남한 제1의 강인 낙동강이 흘러나온다. 산세가 급한 편이어서 강 유역 충적지대가 넓지는 않지만 산에서 끊임없이 공급되는 영양물질로, 면적에 비해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원래 땅이 비옥한 곳에서는 인구가 금방 불어나서 곧 식량이 부족하게 된다. 이럴 경우 이전 시대 사람들의 해법은 대체로 산림을 개간해서 농토를 늘리는 것이었다. 배후의 산지가 경사가 급한 울창한 삼림을 이루고 있어 물살이 좋은 강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에는 보통 이것과는 다른 전략이 선택된다. 삼림을 개간해서 농토를 만들기 어려우며 물길로 움직이기가 더 쉽기 때문에, 배를 타고 움직여 생존의 기회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낙동강 수계를 둘러싸고 수로왕 시대인 1세기에 이미 6개의 작은 국가들이 성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삼국유사는 전한다. 전성기인 5세기 말 6세기 초에는 이 인근에 적어도 22개의 소국들이 낙동강을 따라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육지는 베이스캠프로 하고 주로 바다로 움직여 세를 넓히는 해상국가들이다. 이들을 통틀어 가야연맹이라고 한다. 

 

 

《오디세이아》 속 이상적 해상국가와 닮은 가야

 

이 중에서 수로왕의 가락국은 낙동강 하류의 비옥한 삼각주 지대를 품었으며 바로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곳에 있어서 가장 국세가 컸다. 가락국을 금관가야라고도 부르지만 그건 후세 사가들이 붙인 이름이고 당시에는 가라(加羅), 혹은 가락국으로 불렸던 것 같다. 지금 김해시 일대에 해당되는 곳이다. 지리적·생태학적 조건을 놓고 추정해도 그렇고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볼 때도, 가락국은 가야연맹의 맹주였을 가능성이 크다. 마치 가야연맹보다 약 500년 앞서 지중해를 주름잡았던 델로스 동맹에서 아테네가 맹주였듯이.

 

가야연맹의 지리학적 위치와 6세기 초 최전성기의 가야연맹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가야연맹은 호머가 《오디세이아》에서, 가장 이상적인 해상국가로 묘사했던 파에아키아처럼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 기슭에 항구 도시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육지에서 좁은 땅을 두고 경쟁하기보다는 바다로 나가기 위해 협력하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육지에서의 영토분쟁의 소지는 처음부터 적었을 것이다. 이런 해상 소국들의 본토는 높은 산이 경계를 만들어주는 곳에 발달하므로 이웃 국가들과는 부딪칠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상고 적에 지역이 백 리 되는 나라가 이 도(경상남도) 안에 매우 많았으나 신라가 건국하면서 통일하였다.” 가야연맹의 소국들을 말하는 것이다.

 

백리라는 옛날 단위는 약 40km에 해당된다. 서울의 동쪽 끝 경계인 구리와의 접경에서 서쪽 끝 경계인 김포와의 접경을 동서 수평으로 이으면 약 36km 정도이므로, 서울시 하나 정도 되는 면적의 공동체가 하나의 국가로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 면적을 갖고 어떻게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대 지중해 지역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던 아테네가 최전성기에 가장 긴 쪽으로 따져도 10km도 안 되는 규모였다. 그런데도 아테네는 위대했던 도시국가로 간주되며, 델로스 동맹 말기에는 더욱 위세가 등등해져서 지금의 역사가들 중에는 이 때의 아테네를 ‘아테네 제국’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해상국가의 규모는 본토의 크기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동시에 해상국으로서의 가야연맹 소속의 국가들은 적어도 베이스캠프만 비교하자면 지중해 델로스 동맹 소속의 소국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오디세이아》에서 파에아키아는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항구들이 늘어서 있으며, 거기에는 크고 튼튼한 배들이 정박해 있고, 그 뒤로는 포도과수원과 기름진 밭이 펼쳐져 있다고 묘사된다. 

 

 

비옥한 토양, 풍부한 식자원, 탄탄한 목재

 

가야연맹의 소국들도 어느 정도 비슷한 모양새로 발달했을 것이다. 낙동강 유역은 지중해성 기후가 아니니까 포도밭과 올리브 밭은 없었겠지만, 그보다 인구부양 효과가 높은 쌀과 잡곡을 제공하는 논과 밭, 그리고 사과·배·감 같이 다양한 과일나무들이 자라는 과수원이 배후지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태백산계와 소백산계의 산림에서 끊임없이 제공되는 영양물질로 인해, 좁은 면적에서도 양질의 농산물을 많이 수확할 수 있었을 것이다.

 

ⓒ Pixabay

지중해에 흔한 대리석은 없었겠지만, 그보다 내구성이 큰 고(高)퀄리티 건축자재들이 한반도에 풍부했다. 튼튼하고 향기로우며 세월에 잘 분해되지 않는 소나무 목재, 대리석보다 훨씬 견고하면서도 가공하기 좋은 화강암, 과거 한반도에 특히 풍부했던 수정(석영), 황토 및 백토 등등. 이런 자재를 이용해서 지은 멋진 궁궐 및 일반 가옥들이 낙동강 지류 하구의 충적토에 늘어서 있었을 것이다. 강 어구의 포구에는 튼튼한 목재로 지어, 특히 질이 좋기로 유명한 한반도 아마포로 만든 돛을 단 배들이 나란히 정박해 있었을 것이다.

 

풍부한 삼림이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비옥한 땅, 피톤치드 가득한 대기환경 속에서 나고 자라, 강과 바다를 충분히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인 가야 사람들은 몸도 튼튼하고 성격도 좋았을 것이다. 

 

“바다 위에서 당할 자가 없을 정도로 날쌔고 강하며, 춤과 노래, 달리기를 잘한다. 또한 마음씨가 친절해서 표류해서 들어온 나그네에게도 융숭한 대접을 해서 돌려보내주는 전통이 있었다.” 

호머는 파에아키아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했지만, 한반도 남쪽 바다 사람들도 이에 못지않게 튼튼한 체구와 호방한 기질의 소유자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들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일상화된, 즐겁고도 역동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것으로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활쏘기 등 무력에도 아주 뛰어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국가로 알려져 있는 페니키아처럼 바다 건너에도 영토를 두어, 말 그대로 바다 위의 나라를 건설했을 가능성도 있다. 활동무대는 인도까지는 커버했다는 것를 삼국유사를 통해 알 수 있고, 그보다 더 먼 곳까지 왕래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볼 이유는 전혀 없다. 머리가 좋고 창의적인 한민족이니만큼 항해에 필요한 천문학, 지구과학 분야에서 당시로선 첨단인 기술들을 주도했을 가능도 상당히 높다. 서기 1세기에서 6세기까지의 일이다.

 

 

역사는 ‘선택적 기억’이다

 

충분히 추정 가능한 이 멋진 삶의 모습을 왜 그 후손인 우리가 까맣게 잊고 살고 있을까? 이 연재에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 망각의 원인을 추론한다. 하나는 역사라는 집단적 기억을 왜곡하고 망실시키려는 힘이 작용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기후변화라는 커다란 자연의 수레바퀴도 돌아서, 환경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눈에 보이는 경관도 달라져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왜곡 쪽 얘기를 하기가 훨씬 간단하다. 남아 있는 근거가 없어서 분석할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은 끈질긴 흔적들이 없지는 않다, 여기에 인간에게 일반적인 심리 및 행동 패턴에 기초해서 추론한다면, 우리는 상당히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앞으로 몇 회차 그런 얘기를 하려 한다.

 

여기서 인간에게 일반적인 심리 및 행동 패턴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정당화’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한 인간 집단이 다른 인간 집단을 정복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역사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피정복지의 모든 정신적·물질적 유산을 파괴하는 한편 정복자를 정당화하고 크게 부풀리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그리고는 피정복지의 사람들 및 타 지역 사람들은 물론 정복자 자신의 집단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교육시키고 기록으로 남겨 대대손손 그렇게 기억되도록 한다.

 

ⓒ Pixabay

생태학·지리학적으로 볼 때 적어도 한반도 남부와 서남부 지역에는 위대한 해상국가들이 상당히 많았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들은 동아시아를 세계로 잇는 허브의 역할을 하고, 그에 걸맞는 수준으로 동아시아 문명을 주도했던 것으로 충분히 추정될 수 있다. 세계의 다른 반도 및 해양 지역에서와는 달리 한반도에 이런 과거의 모습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면 그것은 고대 이래 한민족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힘들이 그런 모습을 용의주도하게 지워왔을 때문일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신라가 금관가야를 복속시켰던 서기 531년 이래 가야연맹의 위대했던 해상대국의 역사를 지우고 축소시키려 애썼을 것이다. 중국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함락시킨 662년 이래 가야·백제·고구려의 역사를 왜곡하고 축소시키려 해왔을 것이다. 중국의 영향력이 더 커졌던 고려 때부터는 아예 한민족 전체의 역사가 축소되어 왔을 것이다. 그 영향력은 조선시대가 거의 끝날 때까지 약 1300년 동안 지속됐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런 역사왜곡 및 축소는 더 치열하고 용의주도하게 행해졌을 것이다. 이어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면서는 기본적으로 아시아인으로서 갖는 정신적·물질적 자산 자체가 소홀히 취급되어 왔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역사는 그런 긴 세월동안 권력이 컸던 집단들이 바꾸어놓았던 모양새에서 아직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1500년 가까운 역사 왜곡, 그걸 벗어나려는 노력은 이제 겨우 70년 정도 행해졌을 뿐이다. 아직도 우리는 갈 길이 멀다. 가시적으로 남아 있는 역사 기록, 신중하고 보수적인 학자들이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에만 우리를 묶어두어선 안 된다고 보는 이유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