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九泉(구천) 떠도는 비운의 왕세자 김정남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4.04 10:51
  • 호수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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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insight] 김정남 시신, 고모부 장성택처럼 북한 정권이 부관참시 할 수도

 

“반역의 무리는 이 땅에 묻힐 자격도 없다.”

북한은 ‘반(反)혁명죄’ 같은 중대범죄로 처형되는 고위 인사들에게 관영매체를 통해 이 같은 저주를 퍼붓는다. 김정은에 대한 불경죄를 저질렀거나 간첩행위 등의 혐의가 씌워져 사형당할 경우 망자나 유해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조차 없을 것이란 경고다. 2013년 12월 처형당한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당시 직책)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고모부 장성택이 자신의 후계구도와 통치노선에 저항했다며 대공사격용 고사총으로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도록 공개처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발표대로 “흉악한 정치적 야심가, 음모가이며 만고역적인 장성택”의 유골이라도 남겨질 경우 화근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말레이시아 당국이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지난 2월 중순 암살당한 김정남의 시신을 북한 측에 인도함에 따라 그 처리 문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한과 말레이시아가 지난 3월30일 공동 발표한 6개 항의 공동성명에 따르면, 북한은 사망자의 가족으로부터 시신과 관련한 모든 문건들을 받아 말레이시아 측에 제출했다. 이에 따라 말레이시아는 시신을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데 동의했다. 성명 발표와 동시에 김정남의 시신은 말레이시아 국적 항공편으로 중국 베이징을 거쳐 평양 당국에 건네졌다. 북한과 말레이시아가 김정남 암살 사건으로 위기로 치닫던 양측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시신 처리 문제를 서둘러 봉합한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김정남 암살 사건과 관련해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에 은신해 온 현광성 북한대사관 2등 서기관과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이 3월31일 새벽 경유지인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다. 김정남 시신도 이날 베이징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 AP 연합

문제는 북한이 김정남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현재 김정남의 부인과 아들 김한솔 등 시신에 최우선 권리가 있는 유족들은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의 추가 위해 시도나 테러를 피해 잠적해서다. 김한솔은 지난 3월8일 공개된 영상에서 “내 이름은 김한솔이다. 북한 김씨 가문의 일원”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현재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있다”면서 “서둘러 이 같은 상황(살해위협 등)이 나아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들 가족의 행적은 묘연하다. 서방 망명설이나 한국 도착설까지 나오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이복형제인 김정은 위원장이나 김정은의 친형인 김정철, 여동생 김여정 등이 있지만 ‘가족’의 자격으로 시신 인수에까지 나설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김정은이 전면에 부각된다는 건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정보 당국이 몰래 처리 가능성

 

결국 평양에 시신이 도착하는 즉시 철저한 비밀에 부친 뒤 정보 당국 등이 동원돼 몰래 처리할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무엇보다 묘지를 만들거나 화장해 유골이라도 남길 경우 뒷감당을 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온다. 자칫 유골 일부라도 남길 경우 추종세력이 규합하거나 반(反)김정은 정서가 퍼지는 등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북한 공작원과 외교관이 동원돼 저지른 암살이란 게 드러난 상황에서 북한은 출구전략을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북한은 말레이시아나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김정남 유해를 가족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잘 넘겼다는 점을 제한적으로 알릴 공산도 있다. 김정남이 아닌 ‘북한 국적의 공민 김철’이란 주장도 굽히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화학무기로 쓰이는 치명적 독극물인 VX에 의한 암살임이 드러났지만 ‘심장마비’라는 주장을 계속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런 요식절차를 거친 뒤에는 최대한 서둘러 김정남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려 들 것이란 전망이다. 특히 김정남의 흔적을 찾을 수 없도록 말끔하게 지우는 작업이 은밀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일부 엘리트 계층이나 주민들 사이에 김정남의 존재가 알려지고, 이복동생 김정은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실까지 입소문이 날 경우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점도 고려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증ㆍ개축이 완료된 조선혁명박물관을 시찰했다고 조선중앙TV가 3월28일 보도했다. © 연합뉴스

이런 구도의 김정남 시신 처리는 고모부 장성택 처형 때와 유사한 점이 적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장성택을 전격 체포한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보위성)는 사형 판결문을 통해 “장성택은 김정은 동지를 위대한 장군님(김정일을 지칭)의 유일한 후계자로 높이 추대하는 데 대한 중대한 문제가 토의되는 시기에 왼새끼를 꼬면서 영도의 계승 문제를 음으로 양으로 방해하는 천추에 용납 못할 대역죄를 지었다”고 밝혔다.

 

북한은 김정남 또한 마찬가지의 죄를 저질렀다는 인식을 드러낼 수 있다. 김정은 후계 지정 이후 김정남은 외신 인터뷰 등을 통해 “아버지의 3대 세습은 잘못됐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또 김정남의 아들 한솔은 SNS를 통해 김정은을 ‘독재자’로 비판하기도 했다.

 

김정남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여인으로 알려진 영화배우 출신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2년여의 동거 끝에 1971년 김정남을 낳았지만 불과 몇 년 뒤 버림받았다. 성혜림은 심장병 등에 시달리며 러시아에서 여생을 보내다 2002년 숨졌다. 김정일은 유해조차 북한으로 수습해 가지 않아 모스크바 묘지는 방치된 상태다. 반면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는 2004년 파리에서 병 치료 중 숨지자 특별기를 보내 시신을 운구했고, 평양 대성산 인근에 묘역을 조성했다.

 

 김정은에게 김정남 시신은 애물단지에 불과할 수 있다. 한때 후계 경쟁자였던 데다 유사시 북한에 친중(親中)정권이 들어설 경우에 대비한 베이징 지도부의 카드란 소문에 참기 힘들었을 수 있다. 더욱이 쿠알라룸푸르공항 암살 사건이 말끔하게 처리되지 않으면서 국제적 망신을 샀다. 부관참시를 통해 분풀이를 할 것이란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정남은 죽어서도 자신이 태어난 북한 땅에서 영면하기 어려운 신세가 됐다. 한때 후계 1순위로 거론되던 ‘비운의 왕세자’는 지금 구천(九泉)을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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