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가야사 편)] '원숭이'가 '가랏파'를 제압했다?
  •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4.1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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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확인하는 역사 왜곡의 역사

야츠시로 일대에서 전해진다고 하는 갓파, 혹은 가랏파의 스토리에는 한 가지 다른 버전이 더 있다. 1746년 기쿠오카 센료(菊岡沾涼)라는 문인이 『혼쵸조쿠겐지(本朝俗諺志)』라는 책에 쓴 대목이다. 역시 직역에 가깝게 충실히 옮겨본다.

 

중국 황하에 살던 가랏파가 일족을 거느리고 야츠시로에 와서 구마 강에 도착했다. 그 후 이들은 번영해서 9천 명에 이르렀는데, 그 두령을 ‘쿠센보(九千坊)’라고 불렀다. 이 가랏파들은 장난이 너무 심해서 사람들을 괴롭혔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이에 화가 나서 규슈 일대의 원숭이에게 명령, 이들을 공격하게 했다. 여기에 가랏파도 항복해서 구루메(久留米)의 영주에게 허락 받아 치쿠고(筑後川) 강으로 이주, 스이텐구(水天宮)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컨텐츠가 야츠시로에서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다 1954년에 비석에 새겨졌다는 내용과 다른 점을 정리해보자. 

●가랏파가 ‘중국 쪽에서’ 온 게 아니라 ‘중국 황하’에서 왔다고 한다.
●​가랏파가 언제 왔다는 얘기는 없고 느닷없이 16세기 말 실존 인물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등장한다. 
●​처음 도착했을 때의 수는 말하지 않고 번영한 후 9천이라고 한다. 
●​지역주민이 가랏파를 잡은 게 아니라 가토 기요마사가 규슈 일대의 ‘원숭이’들을 모아 가랏파를 잡도록 했다고 한다. 
●​항복한 가랏파는 그 지역에서 ‘오래오래 되라이다’라고 노래하는 축제를 지내면서 함께 산 게 아니라 구루메(久留米)라는 먼 곳으로 가서 살았다고 한다. 

‘가랏파’라는 주인공 명칭만 빼고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 싶게 차이점이 크다. 어느 편이 더 과거에 있었던 일을 잘 보여주고 있을까? 

그걸 판단하는 데 영국 역사학자 E.H.카(Carr)의 조언이 도움이 될 것 같다. 1961년 출판된 그의 책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를 연구하는 태도에 대해 획기적으로 새로운 관점들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관점들은 지금까지 역사학의 기본적 태도를 규정하고 있다. 

“사실을 연구하기 전에 역사가를 연구하라”​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의미심장한 발언들 중에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기 전에 (그걸 쓴) 역사가를 연구하라”는 말이 있다. 역사적 사실을 밝혀서 대중에게 전달하는 역사가들은 자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특유의 입장을 가진 사람으로서,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무수히 많은 증거 중에서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실들을 취사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역사적 사실을 대할 때는 그걸 쓴 역사가의 특성 및 입장을 이해하고 그걸 감안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유명한 교훈을 규슈지방 가랏파 설화의 경우에도 적용해보자. 

1746년에 쓴 민담집에 “야츠시로 지방의 갓파 도래 민담”이라고 하면서 글을 남긴 기쿠오카 센료는 ‘에도(江戸, 도쿄 지방의 옛 이름)시대’ 문화전성기의 문인이었다. 에도시대는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하고 그 당시까지 시코쿠 남부에 있었던 수도를 혼슈 동남부, 지금의 도쿄가 있는 곳으로 옮긴 이후, 1868년 메이지 정권에 의해 막을 내릴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에도시대는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처음부터 좋지 않았으며 점점 악화되어 가던 시대라는 특징을 갖는다. 한일관계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이 시기는 세계 전체가 대체로 자기네 나라가 살기 위해 남의 나라와는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 서로 침공하며 방어하는 분위기였다. 유럽이 공격적으로 식민지를 넓혀가던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본 내부에서도 유럽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의견과 일본 고유의 것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되고 있었다. 동시에 바로 옆 국가인 한국을 정복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우는 강경파와 굳이 그래야 하겠나는 온건파의 대립도 생겨나던 시기였다.

기쿠오카 센료는 가랏파 도래 설화를 자기 책에 기록했던 당시, 일본 문화의 중심지였던 에도, 지금의 도쿄의 문단에서 밀려나 일본 전국을 주유하면서 일본 고유 문화의 자취를 찾아 알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는 일본 고유의 것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을 뿐 아니라 한반도를 정복해서 일본의 힘을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다시 이 설화를 들여다보자.

가랏파가 중국에서 왔다고 명시하고, 주민과 화해해서 함께 섞여 살면서 ‘오래오래 되라이다’ 축제를 지낸 게 아니라 먼 오지로 쫓겨나 신사(神社) 안에 폐쇄적인 생활을 한 것처럼 쓰고 있다. 이로써 그 당시까지도, 그리고 물론 현재까지도 그 지역에서 번성하고 있는 가랏파의 후손들이 한반도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한반도를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충분히 할 만한 역사왜곡이다. 

이 버전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던 다이묘(大名, 장군)였는데 한창 잘 나가던 젊은 시절 구마모토의 영주를 지낸 적이 있다. 기쿠오카 센료가 굳이 그를 가랏파 설화에 끼워 넣은 것은 구마모토 영주 중에 후대까지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때 조선 침공의 선봉에 섰던 3인의 사령관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여기서도 ‘정한론’의 냄새가 난다.

흥미로운 것은 규슈의 ‘원숭이’를 모아 가랏파를 제압했다는 대목이다. 원숭이는 산에서 사는 동물로, 강과 해안가에 사는 갓파의 천적으로 전해진다. 가토 기요마사의 상관으로 한반도를 정복하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별명이 ‘원숭이’였다는 점도 관련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더 재미있는 분석이 있는데, 기후변화 문제와 관련돼 있어서 얘기가 길어진다. 다음 맥락에서 언급될 것이다.

 

 

20세기 세워진 쿠센보 동상과 19세기 말 그려진 '갓빠와 원숭이의 싸움' 그림(동그라미 속) © 이진아 제공
20세기 세워진 쿠센보 동상과 19세기 말 그려진 '갓파와 원숭이의 싸움' 그림(동그라미 속) © 이진아 제공

 

기쿠오카 센료라는 역사가를 이해하면 왜 야츠시로 가랏파 도래 설화의 새로운 버전이 탄생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한반도를 치려면 일단 한반도 국가와의 혈연적 관계성을 부인하고 정벌의 근거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가랏파가 중국 황하에서 왔다는 부분과 가토 기요마사가 등장해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부분은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버전은 이후 대중소설 등으로 재탄생하면서 일본 전역에 많이 알려진 컨텐츠가 돼 갔다. 지금까지도 야츠시로의 관광지나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글들에서 주로 이 버전이 인용된다. 

  

1954년, 규슈 서북부 해안가 도시인 야츠시로의 주민들은 이 버전과 사뭇 다른 내용을 담은 ‘가랏파 도래비’를 세웠다. 이 돌비석에 새겨진 글을 작성한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든 이 지역의 토박이였을 것이며,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뜻을 모아 글을 작성했을 것이다. 기쿠오카 센료의 ‘가토 키요마사’ 버전이 일본 전역에 알려져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굳이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가랏파 도래의 본고장에서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왔던 구비전승의 내용을 새롭게 써넣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21세기의 유전자 분석이 보여주는 것처럼 가야에서 온 사람들이 규슈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후손으로 일본의 인구를 구성해갔다면, 특히 가야에서 가까운 야츠시로와 같은 지역 사람들일수록 가야인의 직계 자손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가랏파 얘기를 많이 들었던 사람들일 테고 그 내용은 당시 일본에서 거의 공식화되고 있는 중국 황하 출신 갓파 도래 이야기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1954년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이 지역에서 공식적인 것은 아니나마 한반도 남부, 특히 부산 지방과의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해지던 시기다.

 

 

현대 한국 국민으로서 이 지역에 영향력이 커진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지역 사람들이 다시 재개된 한국과의 관계에 반가운 마음이 생겨 이런 방식으로 소극적이나마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싶었던 것일까? E.H.카의 조언에 따라 새롭게 역사 읽기를 하려니까 추정의 방향이 자연스레 그렇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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