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 검사’에서 ‘우파 스트롱맨’으로
  • 이민우 기자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17.04.11 10:50
  • 호수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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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의 파란만장 인생역정

자유한국당의 대선 주자로 선출된 홍준표 후보에겐 수많은 별명이 따라다닌다. 모래시계 검사, 돈키호테, 저격수, 홍럼프(홍준표+트럼프) 등이다. 검사 출신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홍 후보는 최근 ‘성완종 리스트’로 불거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와 관련한 2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마자 중앙 정치 무대로 돌아왔다. 혼란한 탄핵 정국에서 직설적인 말투와 행보로 보수층의 강력한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홍 후보는 3월31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대선후보로 선출된 직후 수락연설을 통해 “유약한 좌파 정부가 탄생한다면 대한민국이 살아날 길이 막막하다”며 “강단과 결기를 갖춘 ‘스트롱맨(strongman)’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고 강조했다. 각국 강경파 지도자들이 이끄는 ‘스트롱맨의 시대’에 강력한 지도자가 되겠다는 포부다. 모래시계 검사가 우파 스트롱맨이 되기까지의 변화 과정을 홍 후보의 개인사를 통해 살펴본다.

 

검사 시절 ‘통제 불능’으로 여겨졌던 홍준표 후보는 정치인이 돼서도 저격수를 자처했다. 사진은 2003년 홍 후보(오른쪽)가 정의화 의원(전 국회의장)과 설전을 벌이는 모습 © 연합뉴스


 

홍 후보는 1954년 경남 창녕의 벽촌에서 태어나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중·고등학교도 장학금을 주는 학교를 선택해야 했고, 대학 전공도 돈이 덜 드는 법대를 선택했다.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뒤 4수 끝에 사시에 합격(사법연수원 14기)했다.

 

‘모래시계 검사’ 야권 러브콜 뿌리치고 여당行

 

검찰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991년 홍준표 검사는 국제PJ파 두목과 그 조직원들을 일망타진해 조직폭력배 수사의 최대 성과를 올렸다. 광주·전남 지역 건설회사 입찰 담당 임직원을 구속시키기도 했다. 그 성과로 홍 검사는 1992년 여름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에 배치된다. 홍 검사는 이듬해 도박업자와 정치인이 연계된 ‘슬롯머신’ 사건을 맡게 된다. 그는 권력형 비리임을 감지하고 연계된 인물들을 검거한다. 자신의 검사 경력에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슬롯머신 사건 이후 그는 검찰 조직 내에선 ‘통제 불능’으로 찍히면서 2년 반동안 한직을 전전하다 옷을 벗게 된다.

 

인생사는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검찰 옷까지 벗게 됐던 그는 오히려 한국판 피에트로 검사(이탈리아에서 마피아 조직 등 부정부패와 싸웠던 검사), 조폭 검사, 돈키호테 검사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슬롯머신 사건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 《모래시계》는 그를 ‘모래시계 검사’로 만들었다. 드라마를 통해 스타 검사로 인지도를 높인 그는 1995년 10월 검사직을 관둔 뒤 여야 정치권의 러브콜을 동시에 받게 된다.

 

순간의 선택이 정치인 홍준표의 운명을 결정했다. 그는 정치권에 입문하는 과정에서 ‘우파’의 길을 선택했다. 1996년 1월 변호사 홍준표는 이기택 민주당 총재로부터 영입 의사를 타진 받고 입당을 제의받는다. 그는 민주당 입당 기자회견 날짜까지 잡았지만 결국 여당인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그 배경에는 지역구가 걸려 있었다. 홍 후보는 훗날 그의 저서 《이 시대는 그렇게 흘러가는가》에서 “내가 사는 서울 강남 을에 나가겠다고 했으나 이기택 총재는 확답을 주지 않고 심드렁했다”며 “무소속 출마를 고려하고 있던 중 청와대로부터 입당 제의가 왔다”고 설명했다. 결국 그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승리해 여권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트럼프에 버금가는 타고난 공격수

 

그는 훗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꼬마 민주당이나 국민회의에 갔었다면 (자신의 생각과) 부합했을 것”이라며 “어쩌면 이회창 후보를 공격하는 킬러가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홍 후보는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거물 대우를 받았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야당 의원이 되자 그는 저격수를 자처했다. IMF(국제통화기금) 사태의 원인이 된 종금사를 수사하는 것에 대해 “한풀이 정치”라고 비난했다. 결국 그는 1999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하지만 2000년 사면된 후 2001년 서울 동대문 을 국회의원 재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다시 회생했다. 이후 최전방에서 아군을 지키고 적군을 공격하는 돌격대장 역할을 자임했다. 2002년 이회창 당시 대선후보의 병풍(兵風) 논란에 대해선 “청와대-민주당-검찰의 조작 커넥션”이라며 “테이프가 날조됐다”고 방어에 나섰다.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축하금 등 거액의 정치자금과 뇌물로 보이는 1300억원이 CD(양도성예금증서)로 은닉돼 있다”고 폭로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다. 그의 충정은 한나라당 내에선 “대표 위에 준표 있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나돌 정도였다.

 

왼쪽부터 홍준표 후보가 모친과 함께 찍은 사진,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며 기뻐하는 모습, 검사 재직 당시의 모습 © 홍준표 캠프 제공


 

홍 후보가 진정한 정치 거물이 된 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도움이 컸다. 공격수 노릇을 하던 홍 후보는 당내 입지가 좁았다. 자기 계보 의원 한 명 제대로 없었던 그에게 친이(친이명박)계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이명박 정권 첫 여당 원내대표(2008년)와 최고위원(2010년)을 거쳐 당 대표(2011년)에 오르며 승승장구한다. 이때에도 저격수 본능은 여전했다. 원내대표를 맡고 있던 2008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를 “호화판 아방궁”이라

고 비유해 논란을 일으켰다. 2011년 10월에는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계집애들 싫어한다”고 말해 곤욕을 치렀다.

 

한나라당 디도스 사태로 대표직을 관둔 뒤 2012년 4월 총선에서조차 떨어지자 한때 정계 은퇴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으나, 그해 12월 대선과 함께 치러진 경남도지사 보궐선거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2014년 6월 지방선거를 통해 재선에 오른 그는 이후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돼 1심에서 유죄를 받았지만 2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대권 도전에 나섰다.

 

홍 지사의 거침없는 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성완종 리스트 재판과 관련해 “만약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검토하겠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해선 “뇌물 먹고 자살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친박을 향해선 “양박(양아치친박)”이라고, 안철수 후보에 대해선 “얼치기 좌파”라고 칭했다. 최근 구속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향해선 “춘향인 줄 알고 뽑았는데 향단이었다”고 꼬집었다. ‘스트롱맨’을 자처하며 비판을 서슴지 않는 ‘독고다이형’ 정치인 홍준표, 그는 ‘보수 적통’의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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