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철수’야, ‘安재인’이야?” 구분 힘든 재벌 정책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7.05.02 14:42
  • 호수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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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 두 후보 참모진 성향 비슷…‘재벌 개혁’ 공약 내용 유사

 

재벌 개혁은 역대 대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한 정책 화두였다. 그만큼 우리 경제 체제에서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재벌 개혁은 막판에 늘 흐지부지 끝났다. 선거기간 동안에는 불공정 경쟁을 비판하지만, 막상 집권하고 나면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재벌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현실론을 내세운 탓에 재벌 개혁은 늘 후순위로 밀렸던 것이다. 이는 큰 틀에서 보면 정부 의지가 약해서라고 할 수 있고, 규제를 피해 가는 재벌의 능력을 정부가 당해 내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에 임하는 각 후보들의 재벌 정책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리고 어떤 시대정신을 집어넣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현재까지 발표된 정당별 재벌 개혁 정책은 18대 대선과 비교해 별반 달라진 게 없다. 후보별로 보면,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를 제외하고, 문재인·안철수·유승민·심상정 대선후보 모두 큰 틀에서 상법·공정거래법 강화로 재벌 개혁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文·安 “집중투표·전자투표·서면투표 찬성”

 

특히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세부사항 몇 개만을 제외하고는 상당수 정책이 똑같다. 서로가 서로의 답안지를 베꼈다고 할 만큼 비슷하다. 우선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관련해 두 후보는 다중대표소송제와 집중투표·전자투표·서면투표제 도입에 찬성한다. 다중대표소송제는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나 손자회사 경영진의 불법 행위가 드러날 경우 처벌토록 하는 것이 골자다. 집중투표는 소액주주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리를 주주총회에서 몰아주는 것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며, 전자투표와 서면투표제는 부득이한 이유로 주총에 참석하기 어려울 경우, 이를 전자 방식이나 서면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제도다. 관련 제도는 이미 법제화돼 있지만 강제 조항이 아니어서 실효성 논란이 있어 왔다. 법의 취지는 총수 등 경영진의 투명 경영에 일조한다는 것이지만 이해 당사자인 기업은 이러한 규제가 경영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투기 자본의 공격에 빌미를 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아울러 배임·횡령에 연루된 비리 기업인에 대한 사면권을 제한하는 것과 계열공익법인·자사주·우회출자 등을 통한 대주주 일가의 기업 지배력 강화에 대해서도 두 후보 모두 강력한 메스를 대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사외이사와 관련해 문재인 후보는 총수 일가의 사익 추구에 휩쓸리지 않도록 공정성이 담보된 감사위원·사외이사 선임이 중요하다고 본다. 아울러 공공부문부터 노동자추천이사제를 도입한 뒤 나중에 이를 4대, 10대 재벌로 확대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문 후보는 또 주주 권익 보호 차원에서 총수 일가의 비리가 발생할 경우 소액주주라도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대표소송 단독주주권을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독립성이 보장된 감사위원·사외이사 선임에 대해서는 안철수 후보 역시 같은 입장이다.

 

아울러 두 후보 모두 공정거래법 강화를 약속하고 있다. 안 후보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시장 감시 기능과 불공정 관행에 대한 조사 및 제재 등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반대로 공정거래법상 위법 행위가 발견될 경우 현재 공정위만이 검찰에 고발하도록 되어 있는 전속고발권을 폐지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가들이 기업 경영의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도록 주주권 행사의 모범기준 ‘스튜어드십코드’ 채택에 대해서도 두 후보 모두 찬성 입장이다.

 

문재인·안철수 후보 간 재벌 개혁 공약의 유사성은 캠프 구성원들의 면모를 보면 이해가 간다. 현재 문재인 캠프에서 전반적인 경제정책은 조윤제·김광두 서강대 교수가 진두지휘하고 있는 가운데, 김상조 한성대 교수·최영표 건국대 교수 등은 재벌 관련 정책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안철수 캠프에서는 박원암 홍익대 교수와 당내 채이배 의원이 주도하는 모습이다. 조윤제 교수와 박원암 교수는 한국금융학회에서 함께 임원으로 활동했으며, 김상조 교수와 채이배 의원은 경제개혁연구소에서 소장과 연구위원으로 손발을 맞췄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경제개혁연구소 시절 채이배 의원이 김상조 교수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 간 정책적 연결 고리는 견고하다”고 설명했다.

 

 

문재인, ‘순환출자 해소안’ 공약 삭제해

 

지난해 말 ‘장미대선’이 가시화될 때만 해도 각 정당 내에서는 재벌 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차기 정부가 강력한 재벌 규제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최근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는 중도 성향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한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재벌 개혁 정책은 후퇴하고 있다. 김경률 참여연대 집행위원장(회계사)은 “최근 각 대선 캠프에 재벌 개혁과 관련한 입장을 말해 달라는 질의서를 보냈는데, 문재인 캠프의 경우 총수 전횡을 막기 위한 상법 개정에 간단하게 ‘찬성’이라는 의견만 냈을 뿐 세부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어 재벌 개혁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진보 성향의 한 사립대 교수는 “3월15일 문재인 후보가 진보 성향의 김상조 교수와 보수 성향의 김광두 교수를 핵심 브레인으로 영입한 것에 대해 언론들은 ‘불안한 동거(同居)’라고 봤지만, 실제 김상조 교수는 3~4년 전부터 법인세율 인상을 반대하고 삼성의 중간금융지주사 보유를 허용하는 등 반(反)개혁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고 말했다.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순환출자 등 재벌의 지배구조와 관련해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는 것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권오인 경실련 경제금융센터 팀장은 “올 초까지만 해도 강력한 재벌 개혁 정책을 내겠다고 공언했지만, 막상 대선 레이스에 들어가자 경제 성장을 이유로 슬그머니 후퇴한 정책을 선보이는 것은 역대 정부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꼬집었다. 권 팀장은 “순환출자 금지와 같은 강력한 규제책을 뒤로 두고, 상법 개정 등을 운운하는 것은 재벌 개혁의 생색만 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재인 후보의 경우, 과거 18대 대선 당시 공약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후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번 대선에서 문 후보는 △신규 순환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 재도입 △산업자본의 은행소유 한도 축소 △비은행 지주회사의 비금융자회사 소유 금지 등 지금보다 더 강력한 재벌 규제책을 발표했다. 현 정책은 되레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것(△산업은행의 은행소유한도 축소 △금융회사의 계열사 의결권 제한 강화 △중간금융지주회사제 도입 △소액주주의 사외이사 선임시스템 구축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 강화 △집중투표·전자투표·다중대표소송제 단계적 도입)과 거의 비슷하다. 문 후보는 최근 지난 18대 대선 때부터 주장해 온 ‘기존 순환출자 해소’를 대선 공약에서 슬그머니 뺐다. 순환출자는 재벌 총수가 적은 지분으로 그룹 지배권을 유지하는 수단이다.

 

안철수 후보와 관련해서는 ‘민간 주도형 경제성장’과 ‘재벌 개혁’이라는 두 과제를 어떻게 풀어낼지가 관건이다. 안 후보는 기업인 출신답게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있다. 핵심 공약인 4차 산업 육성과 관련해서도 안 후보는 ‘정부 개입의 최소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순환출자 금지처럼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사회적 약자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방안부터 마련하고 그다음에 민간 주도형 경제 성장을 말해야 하는데, 기본 전제가 빠진 것을 보면서 과거 MB(이명박) 정부 실패를 답습할까 우려된다”고 꼬집었다. 박 교수는 “촛불 시민혁명은 재벌 개혁을 시대적 사명으로 제시했는데, 정작 후보들은 과거 18대 대선보다도 낮은 수준의 공약만 쏟아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19대 대선에도 재벌 개혁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지만,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없고 세부 내용도 과거보다 다소 후퇴했다는 지적이다. © 시사저널 임준선

안철수, ‘민간 주도형 성장’과 ‘재벌 개혁’ 충돌

 

일부에서는 이러한 무분별한 재벌 개혁 정책이 경제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대한상공회의소 등 주요 경제단체들은 “세계 경제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경제정책의 상당수가 기업 경영을 옥죄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경제민주화론자들은 관련 법안이 실행되면 분배가 실제로 어떻게 개선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내놓지 못하고 있다”면서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 최근 투기 자본들이 ‘주주민주주의’로 가장해 기업 경영권을 옥죄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규제책을 마련하기보다 현 시스템을 잘 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거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활동한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는 “현행 상법·공정거래법으로도 재벌 규제는 충분히 가능하다. 박근혜 정부가 관련 정책을 추진하는 데 실패한 것도 결국 권력과 자본이 결탁해서 생긴 문제이지, 시스템이 잘못 작동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앞으로의 대한민국 경제는 재벌을 규제하는 게 아니라 붕괴되고 있는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서 정책을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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