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5․18과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았으면...”
  • 김경민 기자 (kkim@sisajournal.com)
  • 승인 2017.05.1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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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가 김종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김종률 작곡·황석영 작사 <임을 위한 행진곡>

 

유장한 단조의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민주화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다. 그 태생은 5·18 2주기를 기념하는 단막극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후 1987년 6월항쟁에서 대중들에게 확산되며 노동 운동 현장에서는 투쟁의 노래로, 혹은 위로의 노래로 널리 불렸다. 대학생 새내기 시절 누구나 한번쯤 불러봤을 법한 대표적인 민중가요가 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정부 기념일로 지정된 1997년부터 기념식에서 제창됐다. 하지만 이 노래는 지난 9년 간 원하는 참석자만 따라 부르는 합창 형식으로 불렸다. 이명박 정부 2년차였던 2009년, 국가보훈처는 ‘국론 분열 우려’를 이유로 제창 대신 합창 형식으로 바꿨기 때문이었다. 9년이 지나서야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다시 제창으로 돌아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오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이 곡을 다시 제창으로 부를 것을 지시하면서 부터다.

 

이 곡을 쓴 이는 김종률 현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이다. 전남 강진 출신의 김 사무처장은 전남대 재학 시절이던 1982년 5·18 2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다. 재야운동가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시 ‘묏비나리’에서 영감을 받아 황석영 작가가 가사를 붙였다. ‘묏비나리’는 작가로도 활동한 백기완 소장이 1980년 서빙고 보안사에서 고문당할 때 쓴 장편시다.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가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을 전화로 인터뷰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가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 ⓒ 사진=연합뉴스

 

‘임을 위한 행진곡’이 9년 만에 5·18 기념식에서 제창될 예정이다. 이 날 행사에 함께 참여해 노래를 부른다고 들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후보 시절 광주를 방문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식에서 제창하고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겠다고 약속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약속을 실천한 것이 반갑고 무엇보다 신뢰가 간다.

 

기념곡으로 지정되려면 필요한 절차가 있으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내년 5·18 기념식에서는 기념곡으로 함께 제창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김 사무처장이 24살 때 만든 노래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게 4시간 만에 뚝딱 써내려간 곡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4월, 5·18 2주기를 앞두고 만들어졌다. 당시만 해도 5·18을 입 밖으로 내기만 해도 잡혀가던 시절이었다. 엄혹한 시국이었지만 5·18 2주기를 그대로 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함께 운동을 하던 친구들과 “뭔가 5·18을 기념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결의했다. 그러던 중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사살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1979년 노동 현장에서 야학을 운영하다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윤상원-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을 소재로 30분짜리 노래극, 그러니까 ‘미니 뮤지컬’을 만들기로 했다. 제가 거기에 들어갈 곡들을 맡았다. 총 8곡이 들어갔는데, 그 중 마지막, 극의 대미를 장식한 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부부가 뒤에 남은 후배들에게 ‘새 날이 올 때까지 나아가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는 곡이었다.

 

 

작사가가 황석영 작가다. 그의 방북 이력으로 인해 이 노래 역시 곤혹을 치렀다. 

 

노래 속 ‘임’이 북한의 김일성 부자를 지칭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었다. 가사 가운데 ‘새날’은 북한 주도로 ‘적화통일되는 날’을 의미한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었다. 곡에 대한 지나친 왜곡이다. 이 곡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노래다.

 

1982년 당시 황석영 작가가 광주에 있었다. 제가 곡을 쓴 뒤 동료들과 함께 가사를 붙이는데 딱 떨어지는 가사가 안 나왔다. 그런데 황 작가가 갑자기 서재에 들어가 시집 한 권을 가져오더니 뭘 적어내리더라. 나중에 알았지만 백기완 시인의 ‘묏비나리’였다. 그 중 일부에서 영감을 얻어 써내려간 가사가 곡과 딱 붙은 거다. 마치 원래 그 곡 가사였던 것처럼.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 중 일부

2016년 광주 국립 5.18국립묘지에서 열린 5.18 기념식에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참석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 노래가 이렇게 대표적인 민중가요가 될 줄 알았나.

 

제가 1982년도에 이 곡을 만들고 바로 군대에 갔다. 그래서 이 곡이 어떻게 불렸고 어떻게 퍼져나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1983년 3월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연세대학교에 다니던 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신촌 거리를 지나가는데 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틈에서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가 나오는 거다. 연세대에 다니던 친구에게 무슨 노래냐 물었더니 그 친구가 “너 군대 가있을 때 나온 노랜데 요즘 최고 인기다”고 하더라. 제가 만든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그날 밤 그 친구와 밤새 술 마시고 어깨동무를 하고 거리를 다니며 이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원래 작곡을 공부했나?

 

전남대 상대생이었다. 그저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해 작곡을 독학했다. 당시에는 대학가요제들이 활성화돼있었다. 지역 VO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도 받고, 1979년 MBC 대학가요제에선 ‘영랑과 강진’이란 곡으로 은상을 받았다. 그냥 좋아서 한 일이었다.

만약 민주항쟁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아마 싱어송라이터가 됐을 것이다. 지금과는 아마 다른 인생을 살았을 거다. 

 

 

노래를 부를 때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매번 울컥한다. 처음 노래를 완성한 뒤 가사까지 붙여 카세트 레코딩으로 녹음한 뒤 처음 듣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 정말 울컥했다. 당시 함께 제작한 10명의 동료들이 있었는데 노래를 들으며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순간 공기가 울컥하고 감동적이었다. 모두 눈빛으로 서로의 감정을 공유했던 순간이었다.

 

 

새 정부가 출범했다. 이미 개혁의 신호탄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문화예술인으로서 어떤 기대감을 품고 있나.

 

이제야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다. 무엇보다. 더 이상 5·18이, 그리고 그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았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제 위치에서 뜻 맞는 사람끼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문화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계속 해나가려고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클래식 교향곡과 뮤지컬로 만들려는 준비를 한다고 들었다.

 

둘 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제 바람은 이 곡이 기념곡으로 지정된 뒤 내년 5·18 기념식에서 유명 연주자들을 초청해 교향곡 초연을 하는 것이다. 상당히 의미 있는 공연이 될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교향곡, 뮤지컬 등 다른 형태의 문화예술로 만드는 것은 의미가 있다. 박근혜 정부 때의 일도 그렇지만 불행한 역사는 국민이 원치 않더라도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역사가 사람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그래야 잊지 않을 수 있다. 교과서에만 실린 역사는 언제든 권력에 의해 훼손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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