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 北核 해결 돌파구 될 수도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심상기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6.05 14:41
  • 호수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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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中·러 경제·관광특구 떠오르는 블라디보스토크 “한국도 북방경제 교두보 삼아야”

 

‘유벽한 설악산에 있은 지 멀지 아니하여서 세간 번뇌에 구사(驅使)되어 무전여행으로 세계 만유(漫遊)를 떠나다.’(조선일보 1935년 3월8~13일) 만해 한용운은 20대 초반의 나이로 백담사를 나와 원산에서 500톤 되는 기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 그때가 1907년 전후인 듯하다. 금강경과 목탁을 넣은 걸망 하나를 짊어지고 여행지에서 마주한 것은 조선 청년들과의 격투였다. 그곳 동포 청년 5~6명이 만해를 친일단체였던 일진회(一進會) 회원으로 알고 바다에 던져 죽이려고 했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만해는 당시 개화를 내세우며 일본식으로 삭발한 일진회 회원으로 오인됐던 것이다.

 

몸집은 작으나 완력이 남달리 세었던 만해는 이들과 싸웠다. 그때 청나라 사람들이 말리고, 러시아 경관 2명이 달려와 간신히 죽을 고비에서 벗어났다. 만해는 청년들과 싸우면서 “죽더라도 뼈만은 조선 땅에 묻어 달라”고 요구해 오히려 청년들이 당황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만해에 대한 흠모와 경외감을 갖고 있던 필자는 기자 초년 시절(1962년) 만해의 묘지가 있던 망우리 공동묘지를 찾아 ‘3·1운동 유족 탐방기’를 경향신문에 쓴 일도 있었던 터여서, 이번에 블라디보스토크 크루즈 여행에 동참했다. 속초항을 떠난 크루즈선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기까지는 만 하루가 소요됐다. 2000명이나 되는 관광객이 50대 가까운 관광버스를 타고 미술관·박물관·길거리 아파트·디자인 공방을 돌아본 것은 4시간이 채 안 됐다.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이라고나 할까? 그나마 길이 2.1km라는 ‘골든브리지’가 이 도시의 상징물처럼 여겨졌다. 해상 700m 넘게 높이 올라붙은 이 다리는 금강만 바다를 전망하는 장관을 보여준다. 곳곳에 정박해 있는 낡은 함정들이 러시아 극동함대로 구성된 군사기지임을 알려준다. 이곳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출발기지이기도 하다. 그 주변에는 러시아혁명 전사를 조각한 거대 동탑(銅塔)이 있는 센트럴광장도 있다.

 

2012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의를 위해 건설된 골든브리지(금각교) © ITAR-TASS

 

일본 오가던 北 만경봉호, 블라디보스토크로

 

인구 60만 명인 이 도시는 우리 교민이 4만 명인 데 반해, 북한에서 온 벌목공은 5만~6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들 모두는 집단 숙식을 한다. 부동항(不凍港) 블라디보스토크가 최근 들어 한국뿐만 아니라 북한·중국도 끼어들어 지정학적 가치와 중요도 등이 더해 가는 것은 이들 관련국의 이해관계가 크고 복잡하게 얽혀들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러시아 쪽에서 보면 경제 비중의 70%를 차지하는 원유·가스 등의 수출 교두보가 바로 블라디보스토크다. 수출 대상국은 북한·한국뿐 아니라 일본까지도 시야에 넣을 수 있다.

 

최근 북한도 중국과의 관계가 다소 소원해지면서 러시아 쪽으로 기우는 듯하다. 북한 청진항에서 일본 니가타항을 수십 년 오가던 ‘만경봉호’가 일본의 미사일 제재에 걸려, 이제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나진을 왕래하면서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나르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취임인사를 하면서 “양국 간 극동지역 개발협력을 확대해 나가고자 한다”며 “시베리아 천연가스관이 한국까지 내려오고 한국의 철도망이 시베리아 철도망과 연결되는 시대가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하며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가스관과 철도망을 연결하는 한·러 프로젝트에 통과료 조의 막대한 수익을 올려 북한이 동참하게 되면 북한이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와의 철도·가스 협력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푸틴 대통령과 추진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후 2년에 걸친 협상 끝에 최종 서명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교착상태에 빠졌고, 결국 현실화되지 못했다. 문 대통령은 이런 프로젝트를 통해 북한이 경제적 이익을 얻어내는 대신 핵·미사일 개발을 포기하도록 이끌어내는 장기 전략을 구상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는 미국과 러시아가 합의하고 중국까지 동조하는 밑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필수 조건이 되어야 한다.

 

최근 북방경제 싱크탱크인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이승률 이사장(평양과기대 부총장 출신)은 극동 러시아 개발현장을 돌아보면서 “북한·중국·러시아가 중국 훈춘(琿春)과 두만강, 러시아 최남단 하산을 연결하는 3국 무비자 관광특구를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면서 “훈춘과 하산 핵심 항만인 자르비노·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철도 노선도 결정된 상태”라고 밝혔다. 그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 과거 정부에서 내세웠던 어젠다를 넘어 이제 실물경제 차원에서 실질적인 교류협력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연해주 지역에 한국인 전용 산업공단을 만드는 것이 가장 실제적인 대안이라고 제안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은 세 차례나 미사일 발사실험을 강행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중국·러시아와 협력하면서 남북 간의 냉각을 풀어내고 한-러 경제협력을 증진해 나갈 전략구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100년 전 만해의 러시아 기행, 오늘과 맞닿아

 

선각자 만해 한용운은 다시 한 번 대삿갓을 쓰고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지기 한 해 전인 1909년 배낭을 지고 짧은 지팡이 하나를 벗 삼아서 만주 길을 떠났다. “나는 그때에도 불교도였으니까 한 승려의 행색으로 우리 동포가 가서 사는 만주 등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우리 동포를 만나보고 새로운 사람과도 서로 이야기하고 막막한 앞길도 의논하여 보리라” 하였다.(별건곤(別乾坤) 2권 6호, 1927년 8월) 그는 애국 청년을 독려하고 독립운동 관련 여러 지역을 돌아보던 중 독립군 청년의 총격을 받았다. 허술한 승려 차림의 행색이 일본 정탐꾼으로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만해는 피투성이의 혼수상태에서 가까스로 마을까지 기어가 한 달 이상 걸려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뼛속에 박힌 탄환은 아직도 꺼내지 못한 것이 몇 개 있으며, 신경이 끊어져서 지금도 날만 추우면 고개가 휘휘 들린다.”(별건곤 2권 6호) 그때와는 100년의 시차가 있다. 그렇지만 만해의 러시아·만주 기행은 오늘의 현실과도 맞닿은 데가 있는 듯하다. 남과 북의 관계, 러시아·중국과의 힘 싸움, 여기에 일본까지 끼어든다면 100년 넘은 구한말의 정세와 겹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한국의 입지는 남북 분단과 대결국면이란 훨씬 힘겹고 무거운 위기상황에 빠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외교·안보·국방이 어떻게 보면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준전시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인의 지혜가 모아지고, 정부의 뛰어난 통찰력과 정책추진, 국민의 일체된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여행을 통해 얻은 교훈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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