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에 우울증․거식증까지…성교육 의무화에도 여전한 직장내 성희롱
  • 김경민 기자 (kkim@sisajournal.com)
  • 승인 2017.06.20 15:2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터뷰] 노무법인 인사이트 배현진 부대표

 

“‘그 분이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했을까’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염없이 저를 수렁으로 끌고 들어간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상처만 더 벌어지더라. 그 사건의 전후로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주변인에 말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어서 그냥 참는다. 다른 사람들한테 말해봤자 괜히 나만 ‘트러블메이커’로 찍힐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정작 내게 성적수치심을 준 당사자는 아무 기억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직장내 성희롱 피해자들의 진술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변하는 사회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기술, 새로운 트렌드가 탄생해 있고, 잠시만 휴대폰을 꺼놔도 확인하지 못한 뉴스가 잔뜩 쌓여있다. 사회의 겉모습만큼이나 정치의식, 남녀 성역할에 대한 인식 등 사회문화적인 부분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우리가 목도하는 많은 변화들이 대체로 더 나은 상태, 더 좋은 방향을 향한 변화지만, 과거 상태에 정체하거나 퇴보하는 부정적 방향으로의 변화도 있다. 직장 내 성희롱 문제가 그 대표적인 분야다.   

 

배현진 노무법인 인사이트 부대표 ⓒ 시사저널 임준선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이 법정 의무 교육으로 매년 실시되고 있고, 이전에 비해 많은 기업들이 사내에 성희롱 고충처리기구를 설치하고 있지만, 성희롱으로 고통 받는 여성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매년 발행하는 ‘성희롱 시정권고 사례집’(2015)에 따르면 성희롱 진정사건 접수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꾸준히 증가했다. 2014년부턴 다소 하락 추세에 접어들긴 했지만 2015년 신고건수 201건으로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국가인권위에 사건 접수가 된 170건의 사건 중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성희롱을 한 경우는 총 156건(91.8%)이었다. 여성에 의한 남성 성희롱 사건은 근소한 비율로 존재했다. 연령별로는 20대(42.9%)와 30대(31.1%)가 높았다. 사건 당사자의 관계에선 ‘직접고용 상하관계’가 67.6%로 과반을 넘기는 비율이었다.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이라는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성희롱 사건이다.  

 

 

2015년 210건 성희롱 신고 접수

 

문제는 직장 내에서, 특히 직책의 상하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성희롱 사건의 경우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쉽게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때문에 많은 경우 별다른 조치 없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인권위에 접수된 사건 중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는 일반회사 직원 응답자의 78.4%가 성희롱 사건을 ‘참고 넘어갔다’고 응답한 바 있다. 그 이유로 남성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여성은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될 것 같지않아서’라는 응답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6월19일 시사저널사의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 강사로 나선 배현진 노무법인 인사이트 부대표는 이 같은 직장 내 성희롱 문제의 특수성을 지적했다. 배 부대표는 “많은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서 피해를 준 당사자는 악의를 가지고 성희롱을 하기 보단 나름의 친밀감의 표현에서 한다”며 “하지만 상대방에게 피해를 줬다면 이에 대한 조처는 가차없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은 직접 당해본 것과 당해보지 않은 것의 경험적 차이가 매우 크다. 개인의 수치심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자존감 저하의 문제만은 아니다. 성희롱 및 성추행을 당했을 때 느끼는 혐오감과 굴욕감은 지극히 파괴적인 것이어서 몸과 마음을 모두 망가뜨린다.”

 

배 부대표는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 있어서 ‘수치심’이라는 감정에 주목했다. 수치심은 개인의 자아와 자존감의 연장선상에 있는 감정이다. 혐오감이나 굴욕감이 혼재된 이 감정은 은밀하게 작용하지만 때론 한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파괴적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그 파괴의 화살이 스스로를 향할 때 정신질환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배 부대표는 “성희롱 피해를 입은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수치심이 무서운 이유는 그게 단순한 감정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음주, 중독, 식이장애 등 행동으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성희롱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 정신질환으로까지 이어져

 

중소 IT업체에 다니던 직장여성 김한나(가명․31)씨는 지난해 2년 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 뒀다. 퇴사사유서엔 ‘건강상의 이유’라고 적었지만, 그가 회사를 그만둔 결정적인 이유는 심한 거식증 때문이었다. 겉보기에 외려 마른 편인 그가 섭식장애에 시달린 건 입사 후 1년 정도 지난 후였다. 자주 마주치는 직장 상사가 그를 볼 때마다 특정 개그맨을 언급하며 놀렸는데, 그 말이 체형콤플렉스가 있던 김씨에게 비수가 돼 꽂혔던 것이다. 외모에 대한 성적 평가의 말이 수치심을 자극해 식이장애까지 이어진 케이스다.

 

 

“성희롱 예방교육에서 무엇보다 중요한건 사고 대처법보다 예방법이다. 평소 행실에 문제가 없더라도 부지불식간에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는 게 중요하다. 사전 교육을 통해 최신의 사례들을 업데이트하면 이 문제에 대한 감응도가 높아지는 측면이 있다. 불편하지만 성희롱 예방교육을 반드시 해야하는 이유다.”

 

미래의 발생가능한 성희롱을 예방하기 위해 무엇보다 평소 ‘성희롱’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고, 한 발 더 나아가 공론화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현진 부대표는 강조한다. ‘나는 성희롱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성희롱이란 이슈에 대해 감정을 느끼는지’ 등을 스스로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성희롱 사건을 단순히 직장 내 구성원 간 이뤄지는 부적절한 언행이라는 측면을 넘어 ‘직장내 괴롭힘’으로 외연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왕따, 특정 성별 차별 등과 같은 층에 놓고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사회엔 좀 더 수치심, 굴욕감, 이런 감정에 대해 오픈하고 얘기를 나누는 문화가 필요하다”며 “다 함께 행복하기 위해 열린 논의를 통해 행동 규범을 스스로 만들고 실천해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