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와 산림자원 황폐화가 부른 테베의 건국
  •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6.2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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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유럽사 편)]

 

시간좌표를 조금 뒤로 옮기고 공간좌표를 서쪽으로 움직여, 기원전 1900년 경 그리스의 보이오티아(Boeotia) 지방으로 가보자. 홀로세(Holocene, 약1만년전부터 현재까지의 지질 시대) 기후 최적이 끝나가고 한랭기로 들어가는 국면, 테베(Thebes)라는 도시국가가 건국되는 과정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시공간이다. 당시의 일을 전하는 설화가 그리스 신화의 일부로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지중해 동쪽 연안의 해양 강국 페니키아(Phoenicia)의 왕자였던 카드무스가 서쪽 나라로 납치된 여동생 에우로파를 찾아오라는 부왕의 명을 받고 부하들을 데리고 도착했다. 그는 우물을 지키던 무서운 용과 싸워 죽이는데, 그때 전령신인 헤르메스가 나타나서 용의 이빨을 뽑아서 땅에 뿌리라고 말한다. 

 

17세기 독일 화가 루벤스가 그린 카드무스 전설 이미지 (출처: pubhist.com)

 

시키는 대로 했더니 땅에서 아주 많은 수의 중무장을 한 남자들이 솟아났다. 헤르메스는 카드무스에게 그들 사이로 돌을 하나 던지라고 말한다. 카드무스의 돌에 맞은 사람은 화가 나서 돌아보더니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그랬다고 생각하고 죽여 버렸다. 그랬더니 그 옆에 있는 사람이 화가 나서 또 그 사람을 치고, 이렇게 점점 싸움이 붙어 결국 그 많은 사람들이 거의 다 죽었고 다섯 명만 남았다. 카드무스는 남은 다섯을 잘 다스려서 부하로 만들어 도시를 건설했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에서도 가장 먼저 형성된 도시국가 중 하나인 테베의 건국설화다.

 

 

테베 건국설화에서 읽는 영토확장의 역사

 

비현실적인 요소가 많은 얘기지만 이 역시 가락국기나 길가메시 서사시처럼 상징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사실 요소를 추론해보자.

 

우선 주인공 카드무스와 그의 고향 페니키아에 주목해보자. 여동생 에우로파를 찾으러 고향을 떠났지만 동생을 찾지 못해 돌아가지도 못하고 생사를 건 승부를 계속해가는 카드무스. 앞서도 몇 번 소개됐던 페니키아라는 해상국이 다른 지역으로 영토를 넓히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로 생각할 수 있다. 

 

일단 이 페니키아라는 나라에 대해서, 이 시기의 기후변화 그래프와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아래 왼쪽의 그래프는 눈금 단위가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을 한 눈금으로 그려졌고, 그 중 일부를 확대한 오른쪽의 그래프는 기원전 연도 표시로 돼있으므로, 숫자 표시에 그런 차이가 있음을 유념하면 되겠다.

 

기후학자 클리프 해리스와 기상학자 랜디 맨의 논문 'Global Temperature' 게재 그래프로부터 재구성 ⓒ 이진아 제공

 

페니키아는 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그리고 이스라엘 북부 바닷가 항구 도시 몇 개를 연결한 좁고 긴 땅을 본토로 해서 지중해 전역에 걸쳐 영토를 구축했던 해상국가다. 원래는 홍해 연안, 지금의 바레인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 지중해로 이동, 홀로세 기후최적기를 통해 융성해왔다. 한창 때인 기원전 1200년에서 기원 전 500년까지, 페니키아의 영토가 됐던 땅은 현재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요르단, 몰타, 터키, 사이프러스, 이집트, 리비아, 튀니스, 알제리, 모로코,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에 걸쳐 있었다.

 

페니키아가 이렇게 오랫동안 강대국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본토가 해상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탁월하게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닷가 아주 가까운 곳에 두 줄기의 산맥, 즉 레바논 산맥과 안티레바논 산맥이 평행으로 달린다. 길가메시의 자그로스 산맥이 울창한 삼림을 형성했던 홀로세 기후 최적 시기 내내, 이곳에서는 구약성서에도 종종 등장하는 유명한 레바논 삼나무 숲이 울창하게 형성됐다.

 

여기서 바다까지 그리 길지 않은 거리지만 여러 가닥의 강물이 흘러나오는데, 그 하류에 역시 홀로세 기후 최적 이래 아주 기름진 평야가 형성되었고, 아라도스, 비블로스, 시돈, 티레 등 항구도시가 발달했다. 마치 가야연맹이 지금 김해지방의 금관국, 창원의 탁순국, 함안의 안라국 등의 항구도시국가 연명체였듯이, 이들 항구도시들은 각각 소국을 이루면서 페니키아라는 연맹체를 구성했다.

 

레바논 산맥은 자그로스 산맥보다는 훨씬 규모가 작지만 해안선을 따라 발달해서 습기를 품은 서풍을 전면으로 받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상당히 질이 높은 삼림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향기롭고 단단하기로 유명한 레바논 삼나무는 건축 자재와 배를 만드는 목재로서 최고였기 때문에 이 일대뿐 아니라 중동 전역으로, 그리고 시돈, 티레 등의 항구를 거쳐 지중해 전역으로 팔려나갔다. 아마 길가메시가 삼림을 벌채하는 본보기를 보여준 서기전 2500년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왼쪽: 페니키아 본토에서 테베까지의 해로. 오른쪽: 페니키아 본토의 배후지를 형성해준 레바논 산맥 및 안티레바논 산맥 지형도와 현재 레바논 산맥 일부의 모습 ⓒ 이진아 제공

 

하지만 앞 길가메시 이야기에서도 보았듯이, 이렇게 나무를 흥청망청 잘라낼 수 있는 것은 기후가 온난할 때 얘기다. 앞에 나온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갑자기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는데, 이 시기 페니키아의 왕으로 알려진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카드무스의 아버지 아게노르였다. 기온이 내려가면 식물의 생장여건이 갑자기 악화되면서 무엇보다 식량부족 사태가 생기게 된다. 기근이 오래 계속되면 사람들의 면역력도 떨어져 질병이 창궐한다. 

 

 

산림자원으로 흥하고 망한 지중해 역사

 

이럴 경우 위도가 높은 지역일수록 더 타격을 받으므로, 좀 더 따뜻하고 식량의 여유가 있는 곳을 찾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 같은 위도의 지방끼리도 좀 더 먹을거리가 풍부한 곳으로 침략전쟁이 벌어지거나, 그렇게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없으면 불쌍한 난민의 행렬을 이루어 이동하게 된다. 앞 그래프에서 보다시피, 기원전 1900년서부터 기원전 1400년까지의 한랭기는 유럽에서는 사람들의 대이동 기간이었다.

 

이런 이동은 육로에 한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먼 바다까지 항해할 배를 만들 만한 나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니키아의 경우는 견고한 삼림생태계를 갖춘 레바논/안티레바논 산지에서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배를 만들 목재가 공급되었을 터이므로, 이 한랭기동안 페니키아 사람들이 본토를 떠나 배를 타고 지중해 동쪽으로 향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보겠지만, 한랭기동안 지중해에는 중동지역에서 유럽지역으로 흐르는 강한 해류가 형성되므로, 이 여정을 더욱 촉진시켜주는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면적이 좁고 지나친 경작으로 황폐해져가는 고향의 땅보다는 좀 더 인구를 부양할 여력이 큰 외부의 땅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 중에는 테베 같은 국가를 세운 성공적인 집단도 있었을 것이다. 

 

한랭기에 접어든 기원전 1900년 무렵의 보이오티아는 결코 만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식량도 급속히 줄었겠지만, 다른 거시적 환경요인의 악화도 있었다. 그 결과 식량이 크게 줄었을 것이고 사람들도 더욱 공격적으로 변해갔겠지만, 그 부분은 기후변화에 초점을 둔 이 연재에선 다루지 않겠다. 앞서 길가메시 편에서 말했듯이, 설명이 너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여러 요인이 중첩되어 작용한 결과 당시의 보이아티아는 상당히 먹고 살기 힘들 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험악한 분위기였던 것 같다. 카드무스 설화에서 그런 정황을 읽을 수 있다. 이미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지칠 대로 지친 보이오티아 원주민들을 카드무스가 잘 이끌어서 좀 더 강한 집단으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그들의 후손인 고대 도시국가 테베의 시민들이 나중에 이 일을 전할 때는 사실 그대로 말하거나 쓰지는 않았을 테다. 자기 조상들의 일에 대해, 본토에서 먹고 살 것이 없어 바다 건너 남의 땅을 떠돌다가, 사람들이 다 지쳐 방어력이 약해진 곳을 장악, 거기서 자리 잡았다고 할 후손은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여동생, 그녀를 납치해간 서쪽 나라의 불한당들, 멋진 왕자의 용맹, 그를 도와주는 신(神)들의 존재 등등의 드라마틱한 요소로 조상의 무용담을 꾸미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렇게 고생스러웠던 한랭기가 지나가고 그 다음 온난기가 되면서, 페니키아와, 그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던 그리스는 지중해 헤게모니의 두 주역으로 나란히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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