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한미 정상회담, 무엇을 논의하고 어떻게 끝났나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17.06.2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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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사건∙미국산 쇠고기 수입 등으로 정권 초반 위기 직면하기도

 

취임 51일째. 역대 정부 가운데 가장 일찍 한미정상회담이 열린다. 문재인 대통령은 첫 해외순방을 위해 6월28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문 대통령은 6월29일 오후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나 만찬을 가지고, 6월30일 단독 정상회담과 확대 정상회담을 갖게 된다. 양국 정상은 이번 회담에서 북핵문제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논의 여부, 경제 협력 확대 등 현안을 전반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 문제도 관심사다. 문 대통령이 향후 국정의 방향을 결정하는 최대 시험대에 오른 상황에서, 역대 대통령들과 미국 대통령들의 첫 만남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윤창중 전 대변인 성추행 사건

박근혜 정부의 첫 한미정상회담은 2013년 5월에 성사됐다. 화두는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대북정책 기조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였다. 박 전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통역 없이 10분간 산책을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대한 미국 측 지지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첫 정상회담은 비교적 성공한 정상회담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당시 박 전 대통령을 수행하던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주미한국대사관 여성 인턴 성추행 사건이 터지면서 국정 운영에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한미 쇠고기 협상’…광우병 사태로 초반 위기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4월에 부시 전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전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공식 별장인 캠프데이비드에서 부시 전 대통령과 만남을 가졌고, 골프를 즐기면서 좋은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이 전 대통령은 직접 골프 카트를 운전하기도 했다. 주한미군 감축 백지화, 한미 자유무혁협정(FTA)협상 지속 등의 성과도 올렸다. 그러나 당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결정하면서 후폭풍이 일었다. 이 전 대통령이 귀국한 후 광우병 보도 등으로 촛불집회가 시작되면서 이명박 정권 초기를 뒤흔드는 이슈가 됐다. 이명박 정부는 외교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함에 ‘쇠고기 협상 카드’를 수용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이라크 파병 결정’으로 우호적 분위기 조성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외교·안보 라인 인사 중에는 과거 노무현 정부에 몸담았던 이들이 많이 포진해있어 노 전 대통령 당시의 한미관계가 재연될지에 대한 관심이 높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79일 만인 2003년 5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만나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더불어 한미동맹 50주년을 맞아 '완전한 동반자 관계'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확인했다. 노 전 대통령이 국내 파병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한미정상회담 전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것이 동맹관계를 회복하고 정상회담의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평가다.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은 당시 "그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의혹을 품었지만 이라크 파병 결정 이후 한미 간의 의혹이 해소되고 상호간에 신뢰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며 "지금은 상당히 정상화됐으며 특히 대통령의 미국 방문 뒤 경제와 국민들의 심리가 안정됐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2003년 9월 또다시 추가 전투병 파병을 요청했고,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노 전 대통령은 '국민 재신임 투표'를 내걸고, 2003년 10월 두 번째 한미 정상회담 직전 '추가 파병을 하겠다'는 전제 하에 '국내적 절차'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을 설득했다.

 

2005년 노 전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이 가진 한미정상회담은 실패한 회담으로 꼽힌다. 노 전 대통령과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당시 회담에서 BDA(방코델타아시아)에 예치된 북한 계좌의 동결 해제를 두고 한 시간이 넘게 논쟁을 벌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 ‘한국 경제 위기 극복과 대북 정책’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6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만났다. 한국 경제 위기 극복과 대북정책이 주요 이슈였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김 대통령을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 비유하고 “그(김대중 대통령)는 50년 만에 최초의 여야 간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룩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고 언급했다. 양국 정상은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미국 기업의 대한 투자 촉진을 위한 정부 차원의 각종 지원 조처와 대북제재 단계적 완화 등의 내용을 발표했다.

 

그러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정상회담에서는 곤욕을 치렀다. 김 전 대통령은 클린턴 전 대통령의 정책을 다 뒤집으려고 했던 부시 전 대통령에게 대북 포용정책을 계승하게 만들려다 실패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부시 대통령의 강경책은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으며 그의 독선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최악의 회담…박정희 전 대통령-카터 전 대통령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해 11월 미국에서 존 케네디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미국 대통령과 만남을 통해 전 세계에 정당성을 인정받고, 경제개발을 위한 미국의 차관을 기대했지만 케네디 전 대통령은 비민주적 절차로 정권을 잡은 것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1979년 6월에 있었던 박 전 대통령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회담은 최악의 회담으로 꼽힌다. 민주주의자였던 카터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의 억압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이에 간섭하지 말라고 강하게 반발하면서 험악한 분위기마저 조성됐고, 두 정상은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관련해서도 날카롭게 대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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