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의 고양이를 보면 일본 사회가 보인다
  • 이인자 도호쿠대학 교수(문화인류학)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6.28 16:23
  • 호수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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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자 교수의 진짜일본 이야기] ‘무연사회(無緣社會)’ 시대에 인간관계 이어주는 ‘지역고양이’

 

6월 둘째 주 토요일, 장마철인데 눈이 부시게 하늘이 푸르른 새벽에 집 근처 공원에 나왔습니다.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간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먹이를 주는 사람들이 궁금해서입니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무렵 풀숲에 고양이를 불러 먹이를 주는 사람이 있고, 아침엔 단체로 공원 정자에 모여 먹이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말 느지막한 아침에 눈곱도 떼지 않고 잠자리에서 바로 나온 듯한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평상에 앉아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도 있습니다.

 

주로 산책 중에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나홀로족으로 외로움을 적절하게 달래기 위해 공원에 살고 있는 주인 없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은 현재 애완용 동물을 기르는 사람이 줄었다고 합니다. 기르는 부담은 덜고 또 사람과의 교류도 얄팍해진 사회에서 공원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면서 생명체와 연결돼 있음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른 아침 일본 센다이(仙臺)의 한 공원 입구 정자 앞에서 지역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주민들. © 사진=이인자 교수 제공

 

매일 고양이의 無事 기리며 공동으로 보살펴

 

이런 짐작만 하던 저는 그들 사이에 들어가 이것저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날은 아침 6시쯤에 나가봤습니다. 공원 입구에서 가까운 정자에는 70대 전후로 보이는 6명의 부인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도 그들의 발밑에 앉아 편안히 놀고 있었습니다. 첫눈에 항상 먹이를 주는 사람들이겠구나 하고 알아차렸지요. 별 경계를 하지 않고 고양이 이야기를 해 줬습니다. 놀랍게도 두 마리의 고양이는 이름도 있었어요. 얼굴이 하얀 것은 시로코(白子), 얼굴에 검은 얼룩 모양이 있는 것은 도라코(寅子)라고 부르고 있더군요. 그들의 말에 의하면 둘은 자매이고, 지금은 피임을 시켜 임신할 염려가 없고, 엄마는 6개월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으며, 아빠 고양이도 병으로 죽어 고아라고 합니다. 마치 기르고 있는 주인이 들려줄 만한 스토리를 전해 주더군요. 저녁에도 먹이를 주는 사람이 있다고는 알고 있지만 서로 교류는 없다고 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산책하면서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다른 사실에 놀랐습니다. 공원에 내놓고 기르는 집고양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일본에는 ‘지역고양이’라는 말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들고양이와 구별해 지역 봉사활동가나 주민이 먹이를 주고, 번식을 막기 위해 피임수술도 하고, 분뇨 청소를 하면서 돌보는 고양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피임수술을 한 고양이를 못 알아보고 다시 수술할까 봐 귀 모서리를 잘라내서 표시도 한답니다.

 

첫날 들여다본 걸로 성이 안 찬 저는 다음 날 다시 공원을 찾았습니다. 둘째 날인 일요일엔 좀 더 일찍 5시 정도에 나갔습니다. 두 분이 전날 인사한 사이기에 반갑게 맞이해 주시더군요. 두 분은 청소 중이었습니다. 정자 옆에 설치된 수도에서 물을 받아 평상을 물걸레질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먹이를 들고 나타나자 정자 주변에서 누워 있던 고양이가 껑충 일어나 그녀들을 맞이합니다. 요즈음 먹이는 과자처럼 1회용으로 포장돼 있더군요. 1회용 먹이는 많지 않았지만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받아먹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가져온 먹이를 먹고 나면 정자 옆에 있는 약간 우거진 풀숲 사이로 들어가 편하게 누워 쉽니다. 보호자인 그녀들은 그곳을 ‘고양이 기지’라고 알려줬습니다. 이분들은 고양이를 중심으로 공통의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할 분담을 누가 정한 것도 아닐 터인데 자발적으로 정자 주변을 청소하고 먹이를 들고 오고 피임수술을 시키고 병이 나면 병원에 데리고 가고 매일매일 고양이의 무사를 기리면서 공동으로 보살핍니다. 그러면서 자신들 안에 고양이와의 추억을 쌓아가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처음 만난 저에게 고양이에 얽힌 무수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사회의 큰 그림자 ‘무연사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돌보는 지역고양이는 일본 내에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한 양태로 서식하겠지만, 이 공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풍경은 일반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분들은 10여 년 전부터 공원 산책을 하면서 만난 사이였고 3년 전 우연히 공원에 버려진 임신한 고양이를 함께 돌보다 새끼고양이까지 보살피면서 사이가 돈독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침 산책 시간 이외에 만나 친분을 쌓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여섯 분 중 한 분만 남편과 살고 있고 모두 혼자 사는 분들이었습니다. 매일 만나는 고양이는 멀리 떨어져 사는 자녀들과 비슷한 애정이거나 그 이상의 감정으로 돌보고 있다고 보입니다. 고양이 먹이와 모두가 마실 커피를 항상 만들어 온다는 요시코씨는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40살이 넘은 딸이 아이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딸은 직장생활을 하고 있기에 자신이 손주를 봐줘야 할 게 불 보듯 뻔해 손주를 낳고자 노력하는 딸이 달갑지 않다고 합니다. 고양이를 데려다 키우고 싶어도 체력에 자신이 없고 일에도 지장이 있을 것 같아 참고 있는데 손주를 보살피는 것은 더더욱 벅찬 일이기에 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분들이 “손주가 예쁜 것은 3년뿐”이라며 공감을 하더군요.

 

이런 대화를 들으면서 공원에 살고 있는 지역고양이가 이들에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조건적인 부모 사랑을 발휘하기에는 그 자체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이미 알고 있는 세대인지도 모릅니다. 장성한 자녀들은 함께 살고 있지 않기에 감정적 교감을 고양이만큼도 못합니다. 이런 현상이 무연사회의 그림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緣)이 있는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어려움을 같이 극복하고 기쁨을 나누고 싶지만, 고령의 부모들에게는 그걸 받아줄 자녀들이 이미 정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각자 생활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어떤 자녀는 부모가 모르는 곳에서 외롭고 가난하게 또 다른 무연의 형태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끔 주말에 보는, 세수도 안 하고 공원에 나와 고양이와 노는 50대 남자분이 떠오릅니다.

 

무연사회는 일본 사회의 큰 그림자로 연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연이 된다고 생각한 가족도 그 유무와 관계없이 각자 사정에 따라 실질적으로 무연이 되어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연이 되는 것은 좋지만 너무 큰 짐을 지우게 하면 그것도 무연사회로 이어집니다. 그러한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고 있자니 공원에 살고 있는 지역고양이는 한 줄 빛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집고양이처럼 보살피고 있지만 모든 걸 혼자 감당하지 않습니다. 또 함께 보살피는 사람들 간에 아주 약하고 엷은 인간관계지만 고양이로 인해 사람이 이어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 눈으로 공원을 둘러보니 고양이만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체가 무연사회 도래라는 무시무시한 시대에 지역 주민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지면 사정상 마치지만 일본의 공원은 그 사회의 축소판, 아니 소우주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다음 기회에 좀 더 이야기를 풀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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