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KAI, 임직원 동원해 특정 의원들 정치후원금 모금
  • 송응철 기자 (sec@sisajournal.com)
  • 승인 2017.07.31 00:33
  • 호수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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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팀은 B의원, 2팀은 C의원…’ 구체적 후원 방향 지시하기도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 대한 수사가 한창이다. 검찰의 칼끝은 현재 하성용 전 KAI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을 향해 있다. 하청업체를 통한 비자금 조성 혐의가 중점 수사 대상이다. 이후 의혹이 확인되면 검찰은 하 전 사장이 비자금을 정·관계 로비에 사용했는지 여부도 들여다보겠다는 입장이다. 이미 하 전 사장이 정치권에 줄을 대기 위해 애를 쓴 정황들은 포착된 상태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계 국회의원들에게 고액의 정치후원금을 전달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하 전 사장의 후원은 합법적인 액수 내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후원금의 출처가 불법 조성된 비자금일 경우에는 상당한 파장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서울중앙지검 방위사업수사부는 최근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각종 비리 의혹과 관련해 전방위 수사를 벌이고 있다. © 시사저널 포토

 

부서별로 구체적인 후원 로드맵 전달

 

이런 가운데 KAI가 특정 국회의원들에 대한 정치후원금 모금에 임직원들을 동원한 사실이 시사저널 취재 결과 확인됐다. 2014년 중순, 내부 연락망을 통해 임직원들에게 메일을 보내 특정 국회의원들에게 정치후원금을 낼 것을 종용한 것이다. 메일은 ‘회사 발전에 많은 도움을 준 정치인들께 도움을 드리고자 본부 내 정치후원금 모금건을 공지한다’는 내용으로 시작됐다. 그러면서 ‘사원들이 자발적으로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협조 부탁한다’고 정치후원금 모금을 독려하기도 했다.

 

메일에는 구체적인 후원 방향을 지시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생산지원 담당은 A의원을, 항공기생산 담당의 생산1팀과 기술1팀은 B의원을, 항공기생산 담당의 생산2·3팀은 C의원을 지원하라’는 식이었다. 정치후원금 전달 대상 의원들은 국방위원회 등 KAI 유관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에 몸담고 있었다. 이처럼 메일에는 일부 부서에 대한 정치자금 모집 지시만 단편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 점을 감안하면, KAI가 보다 광범위한 정치후원금 모집을 벌였을 개연성이 상당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동안 공공의 성격이 강하거나, 사업 특성상 정치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기업들 사이에서는 직원들을 동원한 정치자금 후원이 암암리에 행해져왔다. 정치자금법에 기업이나 법인은 정치자금 후원을 할 수 없도록 돼 있어, 직원들을 대신 내세우는 것이다. 모집금액은 약속이라도 한 듯 ‘10만원’이다. 소액 정치후원금 기부문화 활성화를 위해 10만원까지는 전액 세액공제 대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10만원까지는 연말정산에서 모두 돌려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KAI도 바로 이런 경우다. 국책은행인 정책금융공사가 최대주주(26%)여서 정부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데다, 방위사업 특성상 정치권과의 관계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KAI 직원들이 정치후원금을 내는 행위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정치자금법엔 개인은 국회의원에게 500만원까지 후원이 가능하다고 명시돼 있다. 대선이나 대선 경선 후보자에게는 1000만원까지도 낼 수 있다. 그러나 정치자금 후원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이어야 한다. 정치자금법은 조직적 모금이나 강요를 통해 국회의원에게 정치후원금을 내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다. 실제, 정치자금법 제31조에는 ‘누구든 국내외 법인 또는 단체와 관련된 자금으로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없다’고 적시돼 있다. 따라서 메일의 내용대로, ‘회사 발전에 많은 도움을 준 정치인들께 도움을 드리고자’ 조직적으로 정치후원금을 모집한 것이라면, 후원금의 성격은 ‘단체와 관련된 자금’이 될 수 있다. 보은이 아닌 청탁 성격의 자금 모집이라고 해도 얘기는 달라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KAI의 정치후원금 모집은 ‘누구든 업무·고용, 그 밖의 관계를 이용해 부당하게 타인의 의사를 억압하는 방법으로 기부를 알선할 수 없다’는 정치자금법 제33조를 위반했을 소지도 있다.

 

비자금 조성 및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고 있는 하성용 전 KAI 사장은 검찰수사가 본격화되자 사의를 표명했다. ⓒ 사진=연합뉴스

 

“경영진 윗선의 지시가 있었을 것”

 

KAI 스스로도 정치자금 모집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KAI 내부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이로 인한 내부 반발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치후원금 모집 사실이 일부 외부로 새어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KAI 측은 발신 메일을 삭제하는 등 증거를 인멸하고, 정보 유포자를 색출하는 작업을 벌이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내부 정보를 외부로 유출하는 것은 내규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사태가 확산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진화에 주력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KAI가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직원들을 대상으로 정치후원금 모집에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 민영화와 연관 짓는 시선이 적지 않다. 당시 KAI의 최대 관심사는 민영화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의욕적으로 추진해 왔다. 그러나 민영화에 강한 의지를 보이던 진영욱 전 정책금융공사 사장이 2013년 10월 퇴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일각에서는 민영화가 무산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됐다. 꺼져가는 민영화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정치후원금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특히 2014년 국정감사에서 KAI 민영화가 다뤄질 예정이기도 했다.

 

또 정치후원금을 모집한 시기는 KAI의 상품권 로비 의혹 시점과도 맞물린다. KAI는 2013년과 2014년 52억원어치의 상품권을 구매했는데, 이 중 17억원 상당의 용처가 불분명한 상태다. 상품권 일부가 군이나 방위사업청 관계자들에게 흘러들어간 사실이 파악되긴 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다. 일각에서는 해당 상품권이 민영화를 위한 정치권과 군 관련 기관 로비에 사용됐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된다. 2014년을 기점으로 집중적인 민영화 로비가 벌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정치후원금 모집에 KAI 경영진이 개입돼 있는지 여부는 현재로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처럼 조직적인 정치후원금 모집이 실무자들의 개인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하 전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의 지시 내지는 묵인이 있었으리란 것이다. KAI의 한 내부관계자는 “KAI의 경우 정치후원금 모집 정도의 중대한 의사결정을 실무자들이 내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며 “윗선의 지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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