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제만 먹어도 보험 가입 힘들다?
  • 김예린 인턴기자 (yerinwriter@naver.com)
  • 승인 2017.08.02 10:50
  • 호수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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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우울증 등 ‘가벼운’ 정신질환 앓아도 보험 가입 여전히 힘들어

 

#사례1. 학업 스트레스로 원형탈모가 생긴 고등학생 김아무개군(18)은 감정기복이 심해져 정신과병원을 찾았다. 상담을 받고 약을 두 달간 복용했는데 민간보험 가입을 거절당했다. 가입하려면 5년 동안 약도 안 먹고 진료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보험사 직원 설명에 김군은 결국 가입을 포기했다.

 

#사례2. 2년 동안 신경안정제를 복용해 온 최아무개씨(여·24)는 국민건강보험 혜택 없이 정신과 진료비와 약값을 온전히 부담해 왔다. 정신질환 병력이 있으면 민간보험 가입이 힘들다는 보험사 직원 말에 진료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건강보험 혜택을 거절한 것이다. 건강보험을 적용하지 않아 세 배 비싸진 치료비가 부담스러워 최씨는 약을 안 먹고 참아보려 애썼다.

 

정신질환을 겪는 인구는 증가하는데 민간보험 가입 문턱이 여전히 높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정신질환 진료기록 보유자는 질환의 종류나 경중과 상관없이 보험 가입 및 보험금 지급을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정신질환에 대해 더 합리적이고 세분화된 보험 가입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주문한다.

 

© 일러스트 정찬동

 

고지의무 위반 이유로 보험금 지급 안 해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은 많지만 전문가 상담을 받는 이들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발표한 ‘정신질환 실태 역학조사’를 보면, 국민 4명 중 1명(25.4%)이 평생 한 번 이상 정신질환을 경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평생 동안 정신건강 문제로 전문가와 상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10명 중 1명(9.6%)에 그쳤다. 1년 동안 정신건강 서비스 이용률이 30~40%에 달하는 미국과 캐나다, 호주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정신건강 서비스 이용률이 저조한 이유 중 하나로 민간보험제도가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건강보험기록에 ‘F코드’(정신질환을 가리키는 질병분류코드)가 있을 경우 가입 거절 대상이 될 수 있다. 자살하거나 다칠 위험률이 높다는 게 그 이유다. 보험사 대부분이 정신질환 종류와 심각성 등 구체적인 기준 없이 F코드만을 근거로 가입을 거절하기 때문에 불면증과 경증 우울증 등 F코드에 속하는 가벼운 정신질환도 보험 가입이 힘들다.

 

실제로 기자가 대형 보험사 5곳에 문의한 결과, 정신질환 치료를 목적으로 병원에서 상담하거나 약을 처방받으면 최소 1년, 최대 5년이 지나야 실손의료보험(실손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일부 환자들이 약값과 치료비를 100% 본인이 부담하면서까지 건강보험 진료기록을 남기지 않으려는 이유다.

 

고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보험금을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고지의무는 계약자가 보험계약 전 직업·병력(病歷) 등 중요 사항을 알리는 의무를 말한다. 반건호 경희대 소아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S보험사는 ‘보험 가입 시 유의사항’에 ‘중요 사항에 대해 다르게 알린 경우 보장을 제한하거나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적시했다. 하지만 알릴 사항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가벼운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도 그 사실을 보험사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험금을 지급받지 못한 피해 사례가 많다.

 

 

정부는 실태파악조차 못하고 있어

 

보건복지부는 이러한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2013년부터 ‘Z코드’(보건일반상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정신과 방문 시 무조건 F코드로 기록했던 방식을 상담만 받는 경우 Z코드로 기록할 수 있도록 개선한 것이다. 하지만 Z코드로는 약 처방을 받을 수 없다. 석정호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Z코드 허용은 상담만 받는 사람에게 일부 도움이 되지만, F코드로 진료나 약 처방을 받은 사실만으로 보험 가입을 거절해 사회적 편견을 조장하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금융감독원도 지난해 1월부터 판매되는 실손보험은 일부 정신질환에 대해서도 보장하도록 했지만 현실은 다르다. 이정택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가벼운 정신질환에도 까다로운 가입조건을 내세워 사실상 가입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또 생명보험과 질병보험에서는 차별이 여전하다. 이 연구위원은 “암보험 등 질병보험을 기존에 가입했더라도 정신질환 약을 처방받으면 해당 질병에 대한 보험금을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정신질환이 다른 신체질환의 원인이 된다는 불명확한 인과관계로 차별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험사가 정신질환자 가입을 기피하는 주된 이유는 정신질환과 관련한 경험통계 부족으로 다양한 가입 기준을 마련하기 힘들다는 점이 꼽힌다. 김은경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정도의 정신질환이면 어떤 보험사고가 발생하고 병원비가 얼마나 필요한지 등을 계산하기 위한 경험통계가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독일과 스위스 등 유럽 국가의 경우 정신질환자에 대해 일괄적으로 보험 가입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질환 종류, 장래 입원 가능성 등에 대한 확률을 분석해 다양한 가입 기준을 마련한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경험통계 대신 건강보험공단 통계를 바탕으로 기준을 다양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보험연구원 자료를 보면, 해외 보험사는 국내 보험사와 달리 가입 여부 판단 시 불면증을 고려 대상에서 제외한다. 우울증도 발병횟수 등을 근거로 세분화한 가입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보험금을 수령하지 못하는 피해를 막기 위해 고지의무 제도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나라에선 보험 가입 시 계약자는 보험사가 제시한 질문지에만 답하는 게 아니라 묻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도 알려야 한다. 김 교수는 “계약자가 보험사의 질문에만 답하는 수동적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영국·프랑스·독일·일본 등에선 이미 수동적 고지의무를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신질환에 대한 보험 차별을 해소하려면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석정호 교수는 “정신건강 문제를 초기부터 치료받고 개선할 수 있도록 보험가입 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제도 개선과 홍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부는 실태파악조차 못한 상황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정부의 정신건강 종합대책에 따라 해마다 정해진 목표가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실태조사를 하거나 개선방안을 마련하진 않았다”면서 “금융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 법제처 등 관계부처와 함께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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