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으로 입은 상처 축제로 치유하다
  • 이인자 도호쿠대학 교수(문화인류학)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8.07 13:54
  • 호수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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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자 교수의 진짜일본 이야기] 쓰나미로 없어진 마을 이시노마키市 나가쓰라의 올여름 마쓰리 풍경

[편집자 주]

일본 도호쿠(東北)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는 이인자 교수는 재일교포·묘제(墓制) 연구의 권위자이며 동일본대지진 연구에서 세계 일인자로 평가받는 석학(碩學)이다. 이 교수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 후 피해지역을 답사하며 재난에서 살아남은 희생자 유족과 생존자들의 정서적 피해와 복구에 대해 연구해 왔다. ​

7월 중순, 아무도 살지 않고 황야로 변한 마을 터에 퉁소와 북소리가 정적을 깨고 어우러집니다. “욧샤! 욧샤! 얍!” 장단 맞추는 사람 목소리도 타악기 정도의 역할을 합니다. 그 리듬에 맞춰 화려하게 차려입은 마을 여인들이 산 위의 신사(神社)에서 춤을 춥니다. 신에게 봉양하는 춤입니다. 산속의 신사에 모신 신에게 엄숙하게 제사를 올리는 일은 궁사(宮司)와 10여 명의 마을을 대표하는 남자 임원들만의 일입니다. 제사를 마치고 그들은 상여처럼 생긴 화려한 가마 미코시(神輿)를 짊어진 젊은 사람들을 앞세우고 행렬을 지어 산에서 내려옵니다.

 

정부 지원 안 받고 자력으로 마쓰리 이어가 

이번엔 마을 어귀로 내려와 두 척의 배에 나눠 탑니다. 주로 남자들로 구성된 북과 퉁소 반주를 하는 사람들이 미코시를 모시듯 싣고, 또 한 척은 춤을 추는 여인들이 탑니다. 두 척의 배는 나란히 바다 위에 떠서 미끄러지듯 만(灣) 가장자리를 돌면서 음악에 맞춰 선상에서 신에게 바쳤던 춤을 춥니다. 마을 사람들은 배 선착장에 나와 바다 위의 배를 보면서 돌아오길 기다립니다. 배는 옆 마을 앞자락까지 가서 한바탕 공연을 합니다. 구경 온 사람들이 올해는 춤을 추는 사람 중에 젊은 사람이 끼어 있다고 좋아하면서 돈을 건네줍니다.

 

한국 초등학교에서 기증한 북을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는 나가쓰라의 마쓰리 © 사진=이인자 제공


 

한참을 만 안에서 놀던 두 척의 배가 선착장으로 돌아오면 마쓰리(祭·축제)는 막을 내립니다. 2011년 3월11일 일어난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로 없어진 마을 이시노마키(石卷)시 나가쓰라(長面)의 올여름 마쓰리의 풍경입니다. 지진 전 이 마을은 150여 가구 500여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쓰나미로 1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고 가옥은 모두 유실돼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으로 나라가 지정한 그런 곳이지요.

 

여름 마쓰리에 온 마을 사람들은 7년 전 만 해도 마을의 자기 집에서 마쓰리를 준비하고 즐겼던 사람들인데, 지금은 같은 마을 사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모두 사는 곳이 다릅니다. 가깝다고 해도 15km 떨어진 가설 주택에서 왔고, 멀리서는 시외나 미야기(宮城)현 밖에서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인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서로의 안부를 묻습니다.

 

“오랜만이야. 잘 지내고 있어? 가족은 모두 안녕들 하시고?”

“이렇게 마쓰리라도 있어야 서로 만나는것 같아.”

“맞아.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 올 이유도 없고, 모두 여기저기 흩어져 사니까 서로 보기 어렵지.”

 

저는 6년간 이 마을 주민이 어떻게 정착해 가는지 조사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 외에도 쓰나미 피해로 살지 못하게 된 여러 마을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각각 마을마다 특징이 있는데, 나가쓰라는 외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 마쓰리를 치르고 있습니다. 재해 후 마을 마쓰리가 지역 커뮤니티를 되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일본 정부는 여러 형태로 마쓰리를 되살릴 수 있도록 지원을 했지요.
 

나가쓰라 사람들은 떠내려간 북이며 신구(神具) 제기 등을 마련하지 못했지만 지원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마을보다 일찍 마쓰리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거르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조사하고 있는 다른 마을은 조성금을 받아 마쓰리에 필요한 가면, 북, 퉁소, 의상 등을 모두 훌륭하게 갖췄지만 3·11(동일본 대지진) 이후 한 번도 마쓰리를 하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뿔뿔이 흩어진 마을 사람들 한곳에 모여 

마쓰리는 도구만이 아니라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조직적이면서 꾸준히 마쓰리 내용을 이해하고 진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일정 수 있어야 합니다. 퉁소나 북, 춤 등은 마쓰리 한 달 전부터 선배들의 지도를 받아 연습해야 합니다. 쓰나미로 마을을 잃어 뿔뿔이 흩어져 사는 이들이 7년이나 한곳에 모여 자력으로 마쓰리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드문 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런 마을이 많다는 점에 저는 놀랐습니다. 7년째 재해 지역 연구를 한 저는 마쓰리를 계속하고 있는 마을은 좋은 리더와 그를 도와주는 참모가 많아 재해 후의 정착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곳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재해 첫해에 마쓰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한 흔적들은 마을마다 있었습니다. 특히 어린아이를 많이 잃은 마을은 찬반이 엇갈리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도 작용합니다. 하지만 나가쓰라의 경우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마쓰리를 하도록 준비했다고 합니다.

 

산속 신사에서 제사 지내는 모습 © 사진=이인자 제공

 

바다 위에서 신에게 드리는 춤을 추는 장면 © 사진=이인자 제공


 

쓰나미가 덮쳤던 날부터 집을 잃은 나가쓰라 사람들은 중학교에 마련된 피난소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10대에서 70대 후반까지의 남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걷거나 자동차로 다녔던 길을 배를 타고 들어가 행방불명자 수색을 했습니다. 그 현장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고 합니다. 엊그제까지도 함께 마을에서 생활했던 친구나 지인이 주검이 되어 있는 현실을 매일 겪어야 했습니다. 또한 아무 의심 없이 생활했던 집 주변의 마을을 하루아침에 바다가 집어 삼켜 흉측한 해골처럼 널브러져 있는 현장에 매일 가서 시신을 찾았습니다. 마을이 죽었다는 것을 매번 확인하는 듯한 날을 보냈던 것입니다. 남자들은 그런 작업을 마치고 피난소에 돌아와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작은 마이크로버스를 갖고 있던 산조(三條)씨는 이 차에서 작업을 하고 돌아온 남자들을 모아 술을 마시며 매일 밤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우리가 이렇게 매일 어두운 생각만 하고 슬퍼하면 앞날을 어떻게 도모하겠느냐며 매년 7월에 하던 마쓰리를 올해도 하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산조씨는 고교를 졸업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아들을 쓰나미로 잃은 유가족이기도 합니다. 그의 작은 버스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처럼 유가족 입장인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옥보다 더한 상황이었지만 400년이나 이어져 내려온 마쓰리를 하면 기분이 밝아질지도 모르고, 실제로 여름이 되면 역시 마쓰리 생각이 나서 하자고 했어요. 저 세상에서 보고 있을 우리 아들에게도 어두운 모습만 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렇게 시작한 여름 마쓰리는 뿔뿔이 흩어져 살던 마을 사람을 한곳에 모이게 한 첫 행사가 되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흥으로 가득하던 여름 마쓰리는 쓰나미로 희생된 마을 사람의 공동 제사처럼 되어 그들의 넋을 달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후 가을 마쓰리와 봄에 하는 두 차례의 마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줬으며, 그 준비를 위해 서로 만나 지혜를 모으는 기회가 되었지요. 그리고 정기적으로 매년 4회의 마쓰리를 행하는 나가쓰라가 앞으로 어떻게 정착해나아가는지 저에게는 눈을 뗄 수 없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한 사회가 철저하게 분쇄된 듯한 재난을 겪었을 때 무엇을 짚고 일어설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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