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빙하기의 나무들, 근대 문명을 만들다
  •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8.2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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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유럽사 편)]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지중해에서 상당기간 해상 강국의 지위를 누렸지만, 한랭기로 접어들면서 이들의 운명도 기울기 시작한다. 알프스 산지 중에서 고도가 그리 높지 않아 벌목할 만했던 곳은 엄청난 남벌로 이미 황폐해지기 시작한데다가 기온이 떨어지면서 나무의 생장 속도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세 온난기 유럽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인 지중해의 목재 교역이 현저히 줄었다.

 

이번의 한랭기는 앞서 중세 암흑기를 가져왔던 한랭기보다 훨씬 더 추웠고, 훨씬 빠른 속도로 온도가 떨어져 갔으며, 지구자기장도 약해져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많은 현대 유럽인에게 아직까지 악몽 같은 집단적 기억으로 남아 있기도 하는 ‘소빙하기(Little Ice Age)’가 시작된 것이다.

 

클리프 해리스&랜디 맨, ‘Global Temperature’ 게재 그래프로부터 재구성. © 이진아 제공


 

14세기 말에서 19세기 말까지 약 500년간 지속된 소빙하기 동안 전 세계가 힘들었다. 그 중에서도 유럽, 특히 서유럽은 피해가 컸던 지역으로 꼽힌다. 서유럽은 위도가 높아 한랭기에 더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원래 농업생산성이 그리 높지 않은 지역이라 거시적 환경조건이 조금만 악화돼도 타격이 크다. 

 

(역사적으로 서유럽의 농업생산성이 낮았던 이유는 무엇보다 입지조건 때문이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에 있어 바람이 불어오는 서쪽으로는 육지가 없고 대서양만 있다. 따라서 공기는 맑지만 흙먼지가 보충되지 않아 토양을 조금만 과잉 경작해도 금방 침식돼버리며, 큰 바다의 영향으로 구름이 많이 형성되어 일조량이 적어지게 된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동양의 격언은 서양 사회에도 적용된다. 이렇게 힘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유럽은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스토리는 ‘검은 죽음(Black Death)’라는 별명이 붙었던 무서운 전염병, 페스트에서 시작된다.

 

 

페스트가 가져온 대전환

 

유럽에서 극심한 식량난으로 면역력 수준이 크게 떨어지자 페스트가 다시 창궐했다. 1300년대 중반 약 30년간 돌았던 이 질병으로 유럽 인구가 3분의 1 정도까지 줄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사람의 수가 줄어들자 지난 중세 온난기의 특징이었던 공격적인 산림 개간 역시 줄어들었다. 유럽의 숲은 한랭기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회복되기 시작했다.

 

14세기 유럽에서 페스트는 빠른 속도로 퍼져갔다. ©​ 위키미디어


 

근본이 해양족인 해안지역 사람들은 목재가 확보되면 일단 배를 만들어 탄다. 이 움직임에 가장 앞선 것은 포르투갈로, 당시 ‘항해공(Prince Navigator)’이라는 별명이 있었던 엔리케 왕자가 적극적이었다. 어느 날 이 왕자의 부하장군이 이끄는 배가 지브롤터 해협을 벗어나 북아프리카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려다가 폭풍우를 만난다. 

 

풍랑 속에 배가 떠밀려 간 곳은 포르투갈 앞바다에서 서남쪽으로 약 7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섬의 해안가였다. 정신을 차린 포르투갈 선원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곧은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숲이 바닷가에서 산꼭대기까지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랭기 고향의 숲에서 높은 곳까지 올라가 어렵사리 나무를 베어내던 걸 보던 그들의 눈에는 이 섬이 그저 목재를 가득 실은 컨테이너 박스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지체 없이 벌목하기 시작했다. 이 섬에는 ‘마데이라’(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왼쪽: 마데이라 섬의 위치. 오른쪽: 마데이라 섬의 현재 모습. 현재 온난기이기 때문에, 기록에 남아 있는 근대기의 상황에서보다는 많이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저지대 인근 산지의 숲은 다 벌채되었지만 고지대의 삼림은 남아 과거의 위용을 짐작하게 해준다. ©​ ​ 위키미디어


 

뜻하지 않았던 행운을 얻은 포르투갈은 항해를 통해서 자원을 얻는 일을 국가 차원에서 전격적으로 밀어주기 시작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그냥 앉아서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이 차례로 뛰어들었다. 한랭기임에도 불구하고 삼림이 회복되어 어느 정도 배를 만들 나무는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배를 타고 나가다가 포르투갈이 마데이라를 만난 것처럼 풍부한 삼림을 가진 땅을 발견하기만 하면, 거길 점령한 다음 나무를 베어내서 크고 튼튼한 배를 만들었다. 그렇게 하면 장거리 무역과 식민지 확보에 유리해진다. 유럽 사람들이 대항해 시대, 혹은 지리상의 발견 시대라 부르는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곧 바다 위 경쟁도 심해져갔다. 유럽의 해양국들은 서로 더 큰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또 그 이권의 낙수를 노리는 해적들을 막아내기 위해, 배를 타고 싸움을 해야 했다. 앞서도 나왔지만 이때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변수는 거의 크고 튼튼한 배였다. 무엇보다 배 위에서의 싸움은 배끼리의 충돌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만들었다 해도 목재 조각을 이어서 만든 배는 충돌 시 쉽게 부서지며, 그럼 그걸로 끝이다.

 

 

200년만에 황량한 섬이 된 ‘나무 섬’ 마데이라

 

마데이라 섬 같은 곳에서 오래 자란 큰 나무들은 대항해시대에서 주도권을 잡을 만한 배를 만드는 데 최적의 목재를 제공했었다. 하지만 마데이라의 삼림은 빠르게 소진돼갔다. 소빙하기 초기에 승기를 잡았던 포르투갈 해군의 함선을 만드느라, 또 다른 나라들에게도 목재를 팔아 돈을 벌어들이느라, 그리고 당시 유럽에서 잘 팔렸던 설탕을 만들기 위해 사탕수수 시럽을 조리느라, 크고 작은 나무들을 사정없이 베어냈기 때문이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거목들로 완전히 뒤덮여 맨땅은 한 치도 안 보였던” 섬이었지만 200년 정도 지나자 덤불로 뒤덮인 황량한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다른 식민지의 심림은 더 빨리 사라져갔다. 콜럼버스와 그 뒤에 도착한 탐험가들은 신대륙 입구에 있는 섬이 망원경에 잡히던 순간부터 울창한 숲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지금의 아이티 근처 에스파뇰라 섬에 도착했을 때 그는 “1000종은 될 듯한 나무들이 섬 가득히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이 자라고 있었다”라고 일기에 기록했다. 그런 에스파뇰라도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한 지 50년이 되지 않아 거의 나무가 사라진 섬이 되어버렸다. 

 

17세기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 동부 해안가의 조선소 모습. 신대륙의 크고 튼튼한 나무들로 만들어진 영국의 함선들은 제국주의 시기 후반에 영국이 세계를 주도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인프라였다. ©​ ​위키미디어

 

나무와 함께 해상강국으로서의 면모도 소진되어 간다. 마데이라 섬을 망친 포르투갈이 쇠락하고, 남미의 목재를 기반으로 해상 주도권을 쥐게 된 스페인이 급부상했다. 콜럼버스가 감동했던 에스파뇰라 섬이 결딴나는 등 목재자원이 빈약해짐에 짐에 따라 스페인도 약해졌다. 

 

1588년, 그때까지 ‘무적함대’로 떵떵거렸던 스페인의 해군을 영국이 패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였던 북미의 엄청난 삼림자원으로 튼튼한 선박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뉴저지 지방의 삼림을 대대적으로 벌채하던 모습을 기록한 지방의회 기록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초록색을 띤 것은 모조리 먹어치우는 메뚜기 떼의 습격처럼 사람들은 퍼세이크 강 동쪽에 있는 모든 나무를 파괴하고 펜실베이니아로 들어갔다.”

 

어떻게 해서든 배를 만들어, 유럽의 입장에서 ‘신천지’를 발견하기만 하면, 발견한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사회 전체가 팔자를 고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종전까지 지구촌에서 가장 후진 지역 중 하나였던 유럽은 세계의 리더로 부상했다. 지구촌의 부가 유럽으로 모여들었고, 유럽을 중심으로 한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 시기를 ‘근대’라고 부른다.

 

유럽 입장에서 보면 근대는 위대한 승리의 시대였다. 목숨을 건 모험을 계속한 결과 고향의 빈곤과 비참을 극복하고 세계의 주인으로 우뚝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몽의 시대’, ‘합리성의 시대’, 위대한 발견의 시대’, ‘대항해의 시대’, ‘대탐험의 시대’- 근대는 이처럼 대체로 멋진 별명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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