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잊힌 일본의 만행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 이민우 기자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17.08.28 16:36
  • 호수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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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6000여 명 희생…학살 현장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만큼 처참

 

“아직은 어둠이다. 밝혀져야 할 것이 가려진 이 허위의 빛은 빛이 아니다. 죽은 이들은 죽어 한 세기가 다 되도록 눈감지 못한 채 원통함으로 구천(九泉)을 떠돌고, 죽인 자들은 대명천지 펄펄하게 살아 고개 쳐들고 설치는 여기는 아직 식민의 땅이다.”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 금강공원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일제 만행 희생자 위령비의 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은 36년의 시간은 가장 아픈 역사로 기록돼 있다. 나라를 잃은 사람들은 전쟁의 도구로, 성노예로 끌려갔다. 일제의 총칼에 수많은 사람들이 스러졌다.

 

광복 이후 7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망각에 맞서 잊지 않으려는 기억의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 친일파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무수한 공을 들였다. 친일파 명단을 작성하고 재산을 환수하려는 법까지 제정됐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강제 징용 등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려는 노력도 있었다. 하지만 노력은 부족했고, 역사는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일제의 만행이 너무나도 잔혹한 탓에 기억의 대상에서 다소 배제됐던 사건을 다시 소환하고자 한다.

 

© 사진=연합뉴스

 

조작된 유언비어가 낳은 집단 狂氣

 

94년 전 이맘때였다. 1923년 9월1일, 도쿄와 요코하마 주변에는 새벽부터 강한 바람을 동반한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비가 개고 한낮의 더위가 시작될 정오 무렵 리히터 규모 7.9의 강한 진동이 관동 일대를 급습했다. 건물과 집, 나무들이 휘청이다 쓰러졌다. 도로는 땅 밑으로 꺼졌고, 다리는 끊어졌다. 도시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불과 13초간의 지진으로 관동 지역은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진동이 멈추자 거리 곳곳에서 불이 났다. 순식간에 발생한 화재는 강한 바람을 타고 도시 전체를 휩쓸었다. 불과 두 시간 만에 도시가 화마(火魔)에 휩싸였다. 피난민으로 북적였던 육군 피복 야적장에 불이 옮겨 붙으며 4만 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관동 지역 인구 1000만 명 가운데 이재민만 310만 명에 달했다. 14만2000명이 죽고, 3만7000명이 실종됐다. 정작 지진보다 화재로 인한 피해가 더 컸다. 깔려 죽은 사람보다 불에 타 죽은 사람이 훨씬 많았다. 압사자는 1만 명에 불과했다.

 

충격적인 자연재해는 예기치 못한 비극으로 이어졌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비규환이었다. 먹을 물과 식량은 부족했다. 도시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됐다. 도로가 끊겨 지원을 받을 방법마저 사라졌다. 가족과 재산을 잃은 사람들은 사실상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사람들은 정부를 향해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했고 민심은 요동쳤다.

 

이때 갑자기 유언비어가 퍼졌다. 형무소를 탈옥한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거나 사회주의자들이 집단 봉기했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소문이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의 폭동과 방화였다. “조선인이 방화를 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어 넣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문은 살길을 찾아 이리저리 날뛰던 사람들의 불안감에 더욱 불을 질렀다. 불행과 불안 사이에서 머물던 일본인들의 심리는 조선인에 대한 증오로 변했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어난 조선인 학살의 처참한 비극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됐다.

 

© 사진=연합뉴스

 

나흘 동안 진행된 ‘조선인 사냥’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해 군대와 경찰을 동원했다. 지진과 화재로 군경 병력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탓에 주민들에게 자경단을 조직하게 했다. 자경단은 위급 상황 발생 시 각 마을의 재향군인과 청년 등을 중심으로 모여 주민과 시설을 보호하고 재난을 수습하는 민간자치기구였다. 대지진이 발생하자 관동 지역에 총 3689개 자경단이 소집됐다. 불길을 잡고 주민을 보호하는 임무였다.

 

경찰은 자경단을 긴급 소집하면서 조선인을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총기를 지급하면서 조선인을 살해해도 좋다고 지시했다. “조선인 300명 정도가 불을 붙여 들고 혼마키에 다가왔다”(오노 후사코 증언)거나 “조선인 2000명이 오자키 방면에서 몰려오고 있는데 시민들은 무기를 들고 이들을 경계할 것이며 살해해도 무방하다”(우치다 료헤이 증언)고 지시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몰려오지 않았다. 경계를 푼 자경단은 직접 조선인들을 찾아내 살해하기 시작했다.

 

9월2일 아침부터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돌아다닌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조선인 사냥’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자경단에 잡힌 조선인들은 변명조차 할 기회가 없었다. 학살 현장은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만큼 처참했다. 일본말이 서툴거나 대답을 제대로 못한 사람들은 죽창이나 칼에 찔려 살해됐다. 여자와 어린이도 가리지 않았다. 두 살 된 아기도 살해할 정도였다. 더욱 심한 경우에는 살아 있는 채로 톱질을 해 사지를 자르기도 했다. 조선인의 비명소리와 욕설을 내뱉는 일본인의 목소리가 뒤섞여 지옥을 연상케 했다.

 

가나가와현 야마토시에 거주하고 있는 다카세 요시오는 당시 10살이었다. 그는 일본 ‘가호쿠신문’에 이 같은 목격담을 남겼다.

 

“(지진 당시) 집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불길을 피해 군중들에게 떠밀려 쓰키시마 3호지로 피해 들어갔다.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물을 찾아 바깥으로 나왔는데, 벌거벗은 채 철사줄로 묶은 5~6명의 남자들을 수십 명이 쿡쿡 찌르며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철사줄에 묶인 남자의 손발을 잡고서 불 속에 던져 넣기 시작했다. 같은 날 선착장에선 벌거벗은 남자 10명 정도가 차례차례 바다에 던져지는 것을 봤다.”

경찰서 안에서조차 학살이 자행됐다. 각 경찰서 유치장에는 수상한 조선인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수감 중이었다. 자경단은 경찰서를 포위하면서 조선인들을 내놓으라고 함성을 질렀다. 겁을 먹은 서장과 순사들은 도망쳐버렸고, 유치장에서 끌려 나온 조선인들은 경찰서 마당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군마현, 요리이정, 가메이도, 혼조 등 많은 경찰서에서 비슷한 학살이 벌어졌다. 유치장에서 수용소로 조선인을 호송하는 경찰을 습격해 몰살시키는 일도 발생했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사건은 9월6일자 계엄사령부의 지시로 일단 종지부를 찍었다. “그 성질의 선악에 관계없이 조선인을 무법으로 대우하는 것은 절대 삼가야 한다”는 훈령이었다. 9월7일에는 유언비어 전파자를 10년 이하의 징역과 3000엔 이상의 벌금에 처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자경단이 소지한 무기를 압수하기 시작했다.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살해가 마지막으로 보고된 것은 9월15일이었다.

 

© 사진=연합뉴스

 

사건을 일으킨 것도, 덮은 것도 日 정부였다

 

당시 독립신문 특파원이 조사·보고한 바에 따르면,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조선인이 6661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은 당시 희생자 수가 2명이라고 밝혔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경단은 명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처형한 게 아니라 그저 닥치는 대로 죽였기 때문에 스스로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몰랐다. 사법성은 232명, 극우 집단 흑룡회는 722명, 역사학자 요시노 사쿠조는 2711명, 이재동포위문반은 2613명으로 ‘추정’했다.

 

대학살의 원인이 된 유언비어는 누가 퍼뜨린 것일까. 일본 정부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 유언비어가 퍼졌다는 증거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정권 교체 시기에 있었다. 임시 내각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국가 재난이었다. 또 이런 혼란을 틈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국가 수뇌부는 초조했다. 이재민들이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과 결합해 정권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이에 따라 계엄령을 선포하려는데,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때 누군가가 계엄령 선포와 그 명분을 제시했다.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와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쓰시,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 등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받고 있다.

 

일본 정부는 내각 결의와 천황 재가를 받은 뒤 9월2일 도쿄시를 비롯한 주변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9월3일에는 도쿄부를 비롯한 주변 지역, 9월4일에는 사이타마현과 지바현으로 확대했다. 그러면서 명분으로 “일부 불령선인의 습격 소문이 있고, 이외의 방면으로 불꽃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국민은 혼란기의 치안 공백을 틈타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조선인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은 당연한 조치라고 환영했다.

 

그들은 왜 조선인을 희생물로 삼았을까.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무장투쟁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밀양경찰서 폭파 사건, 총독부 폭탄투척 사건, 그리고 일련의 저격 사건 등 일본인들이 불안해하기엔 충분했다. 여기에다 관동 지역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많았다. 치안 트리오는 이 점을 잘 활용했다.

 

문제는 엄청난 학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이었다. 일본 정부는 대지진과 화재의 충격을 잠재우고 조선인 학살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큰 난관에 부딪혔다. 너무 많은 조선인을 죽여 사태를 감출 수가 없었다. 수만 명의 목격자가 있었다. 군경과 민간 조직이 저지른 범죄가 들통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자 정부는 “비상설 민간인 집단 자경단이 재난 중 유언비어에 현혹돼 벌인 우발적 범죄”라는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됐지만, 대부분 법적 처벌을 면했다. 일본 정부는 9월17일부터 10월1일까지 자경단 체포 작전에 들어갔다. 이 작전으로 735명이 체포됐고, 이들 가운데 125명만 기소됐다. 재판 결과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나와, 실형을 받은 사람은 30명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1924년 1월 사면을 받아 모두 풀려났다.

 

당시 후나바시 경찰서 경관이었던 와타나베 요시오는 《관동대진재의 추억》에서 재판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9월20일경부터 자경단 및 기타 살인범에 대한 검거가 시작됐다. 우리는 범인 다수를 연행해 왔다. 지바에서 재판관과 검사 서기가 와서 연행해 온 범인을 차례차례 불러냈다. 판사가 ‘사람을 죽였는가’라고 묻자 범인은 솔직히 인정했다. 그러자 판사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에 처한다. 항소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범인이 ‘항소하지 않겠다’고 하자 바로 풀려났다. 우리는 이것을 일일재판이라고 불렀다.”

2016년 8월2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관동대지진 학살 희생자 추모식이 열렸다. © 사진=연합뉴스


 

한국 정부 외면으로 사라진 역사

 

해방 후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사건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학살 상황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지만, 단교된 상태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이때 조사한 기록에는 일본 경찰과 소방대 등 공권력이 조선인 학살에 가담했으며, 피살된 조선인 중에는 10세 미만 어린이도 다수 포함됐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나이가 확인된 최연소 피해자의 연령은 2세였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언급을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 징용 문제 등 굵직한 현안이 외교 문제로 비화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였다. 2006년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들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조사 권한이 없다”며 거절했다. 지난 2014년 19대 국회 여야 의원 103명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를 설치하는 특별법안을 발의했으나, 결국 통과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이후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지원위원회’에서 일부 조사에 도움을 줬지만, 이마저도 2015년 말 해산됐다.

 

관동대지진이 어느 정도 수습된 후 양심 있는 일본인들은 각 고을에 학살당한 조선인을 위한 추모비를 세웠다. 매년 9월1일이 되면 재일동포 및 일본인들이 이 추모비 앞에서 고인들의 넋을 기리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규탄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군경 개입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이 새롭게 불거지는 것을 막으려는 이유에서다. 일본 정부의 외면 속에 한국 정부 역시 이 문제에 더 이상 깊이 관여하지 않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日 정부 “학살 관여한 적도, 사과할 생각도 없다”

 

일본 정부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올해 5월12일 이 문제에 대한 정부 입장을 묻는 민진당의 아리타 요시후(有田芳生) 참의원의 질의에 대해 “조사 결과 일본 정부 내에 그러한 사실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간토(關東·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명할 예정이 없다”는 답변서를 제출했다. 이 답변서는 내각 회의를 통해 결정됐다.

 

아리타 요시후 참의원은 최근 공개된 정부 보고서에 정부 차원의 관여가 있다는 내용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정부 보고서에는 “관동대지진의 사망 및 행방불명자는 10만5000명 이상이며, 이 중 일부가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과 함께 “학살이라는 표현이 타당한 예가 많았다. 학살 대상은 조선인이 가장 많았다. 중국인, 내지인(자국인)도 수는 적었지만 살해됐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보고서는 전문가가 집필한 것으로, 기술의 하나씩에 대해 정부가 대답하는 것은 어렵다”며 “역대 정부가 유감을 표명한 것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자료를 삭제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4월19일자 신문에서 “조선인 학살 내용이 내각부 홈페이지에서 삭제됐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홈페이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일 뿐”이라며 “개편이 끝나면 계속 해당 자료를 게시하겠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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