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압박으로 FTA 실리 노리는 트럼프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7.09.13 13:51
  • 호수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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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폐기’ 운운하는 트럼프 美 대통령의 노림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갈등이 봉합되는 양상이다. 북한 핵실험으로 가뜩이나 외교·안보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터져 나와 관계당국을 긴장케 했지만, 협정 폐기에 따른 미국 쪽 손실도 만만치 않다는 보도가 잇따르면서 논란은 수그러들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한·미 FTA 문제를 놓고 트럼프 행정부는 ‘갈 지(之)자 행보’를 이어왔다. 그러나 한 발짝 물러서 사태를 복기해 보면 트럼프 행정부는 일관되게 재협상의 당위성을 강조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7월 공화당 대선후보 수락연설에서 한·미 FTA를 가리켜 ‘(미국의) 일자리를 없앤 거래’(Job killing deal)라고 맹비난한 바 있다. 올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방미 수행경제인단이 ‘40조원 투자’라는 선물꾸러미를 안겼지만, 정상회담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재협상을 선언했다.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과 미국 측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무역대표부 대표 등 한·미 대표단이 8월22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를 열고 영상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향후 협상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전략

 

그리고 9월2일 워싱턴포스트는 복수의 미국 행정부 내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FTA 폐기를 준비하라고 참모들에게 지시했다”고 보도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한·미 동맹 균열을 우려한 한국 내 보수층은 “민감한 시기에 트럼프로부터 크게 한 방 얻어맞았다”며 우려를 증폭시켰다.

 

하지만 9월6일 백악관이 의회에 당분간 한·미 FTA 폐기 관련 논의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든 모습이다.

 

결론적으로 FTA 갈등은 다급한 안보 현안에 밀렸을 뿐 언제든지 수면 위로 재부상할 수 있는 파급력을 갖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미국은 한·미 FTA를 대한(對韓) 통상전략의 핵심으로 삼는 반면, 우리 측은 한·미 동맹이라는 틀에서 움직이다 보니 운신의 폭이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당장 미국 측 공세에 내놓을 만한 카드가 마땅치 않다. 대미(對美) 투자 카드는 지난 6월 한·미 정상회담 때 사용해 실효성이 없어졌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 진짜로 폐기를 염두에 두고 절차적 정당성을 밟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차라리 그보다는 한·미 FTA를 반기는 미국 내부에서 해법을 찾는 것이 더 낫다는 분석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전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유무역 제일주의다. 구체적으로 트럼프 행정부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같은 다자간 FTA보다는 한·미 FTA와 같은 양자 FTA를 더 선호한다. 때문에 한·미 FTA는 미국 내에서도 가장 성공한 자유무역협정으로 평가받아 왔다. 무역협회 산하 한국국제무역연구원이 올 3월 펴낸 보고서(한미 FTA 5주년 평가와 시사점)에 따르면, FTA 발효 후 한국의 미국 수입시장 점유율은 발효 전 2.57%에서 2016년 3.19%로 0.62%포인트 뛰었고, 미국의 한국 수입시장 점유율도 같은 기간 8.50%에서 10.64%로 2.14%포인트 상승했다. 특히 지난해 미국의 한국 시장 점유율은 10년 내 최대치를 기록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도 한·미 FTA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FTA를 미국 통상정책의 재앙으로 규정한 것은 왜일까. 우선 일자리 확보에 나선 트럼프 행정부의 고민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 일자리 정책은 쇠락한 중부 공업도시 ‘러스트벨트(Rust Belt)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러스트벨트는 미국 제조업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이러한 산업적 특성 때문에 지난 대선에서 이 지역 백인 유권자들은 트럼프에게 몰표에 가까운 표를 몰아줬다. 결국 러스트벨트 내 백인 지지층의 지원을 등에 업고 집권한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지역주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구체적인 방안이 나와야 하는데, 그중 하나가 한·미 FTA라는 것이다.

 

미국 측이 한·미 FTA의 불공정을 문제 삼으면서 자동차·철강·기계 등 제조업종을 예로 들고 있는 것도 이들 산업이 대부분 러스트벨트에 몰려 있어서다. 때문에 구체적인 재협상 단계에 접어들 경우 미국 협상단은 이들 제조업 관련 규정을 자국에 유리하게 개정할 가능성이 높다.

 

동시에 앞으로 진행될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관련해 미국 협상단이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자국 언론을 통해 일방적으로 폐기를 선언한 바 있다. 최남석 전북대 무역학과 교수는 “FTA 폐기 발언 또한 재협상에 나선 미국 협상단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포석”이라고 분석했다. 한·미 양국은 8월22일 서울에서 공동위원회를 열었지만 이견만 확인한 채 끝났다. 트럼프 대통령의 폐기 발언은 NAFTA 때와 마찬가지로 그 이후에 터져 나왔다.

 

© 시사저널 미술팀

 

“한·미 FTA 폐기할 경우 정치적 피해 더 클 것”

 

협상전문가들은 오히려 트럼프의 계산된 전략에 말려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지적한다. 박상기 BNE글로벌협상컨설팅 대표는 “이번 한·미 FTA 폐기 발언은 트럼프 자신이 쓴 《협상의 기술》이라는 책에 나오는 ‘진실이 충만한 과장’(Truth full hyperbole) 전략”이라면서 “상대방에게 이번 계약으로 얼마나 많은 이익을 얻을지 설명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만약 계약을 안 하면 큰 손해를 본다고 겁주는 전형적인 협상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박 대표는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잘 먹힐지 몰라도 국가 간 협상에서 이러한 협상법은 금세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에 정치적 배경보다는 논리적 허점을 파고드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런 면에서 미국 각 주(州)의 주정부·의회 등 공공은 물론, 미국 내 주요 이익단체를 활용하는 것도 충분한 대안이 될 수 있다. FTA 폐기가 미국에도 별 소득이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FTA 폐기 시 한·미 양측 모두 공산품 수출이 감소하지만 미국 측 감소폭이 훨씬 커 우리 쪽 연간 대미 무역수지 흑자가 약 2억6000만 달러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전까지만 해도 미국 내 다수의 정부기관·경제단체·연구기관들은 한·미 FTA를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국제무역위원회는 2015년 기준 미국의 대한 무역수지가 283억 달러 적자지만, 만약 FTA가 없었다면 적자 규모가 440억 달러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보수 성향의 헤리티지재단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자동차 수출은 FTA 발효 이후인 2011년에서 2015년 사이 약 200% 증가했다고 평가했다.

 

관세 인상으로 대표되는 무역보복 조치가 미국 경제에 꼭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2002년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철강 수입 관세를 최대 30% 높였다. 그 결과 그해 한 해 동안 미국 내 20만 명의 일자리가 날아갔으며, 전체 실직자의 53%가 캘리포니아·텍사스·오하이오 등 특정 10개 주에서 집중적으로 나왔다.

 

협상 테이블에 앉을 미국 측 대표인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9월5일 멕시코시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한국과 ‘일부 수정’하고자 하는 협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폐기를 언급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과는 다소 온도차가 난다. FTA 폐기로 인한 미국 내 반발이 만만치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특히 미국축산협회와 미국육류수출협회 등 농축산 단체들은 한·미 FTA 재협상 발언이 나오자 7월27일 소니 퍼듀 미 농무장관 앞으로 서한을 보내 “한·미 FTA는 미국 쇠고기 산업이 한국에서 번창하기에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어줬다”며 “한·미 FTA에 대한 어떠한 변경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성향의 월스트리트저널조차 9월4일자 사설에서 “한·미 FTA는 양국 모두에게 이득이며 이를 폐기할 경우 정치적 피해가 더 클 것”이라고 지적했다.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월드 트레이드 온라인’ 등 미국 통상 전문매체들은 “이는 백악관이 현재 상황에서 한·미 FTA 파기를 논의하지 않는다는 말일 뿐 나중에 다시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무엇보다 협정 폐기는 트럼프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비준과 달리 의회 동의 없이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한·미 FTA는 한쪽 당사국이 협정을 종료할 의사를 서면으로 통보하면, 180일이 지난 후 자동 종료된다. 다시 말해 트럼프 행정부가 최악의 경우 폐기를 통보할 시 우리 정부의 의사와 상관없이 한·미 FTA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런 면에서 이미 TPP 탈퇴를 공식 선언한 트럼프 행정부가 한·미 FTA마저 용도폐기하지 말란 법은 없다.

 

북핵 이슈 등이 터지면서 한반도 안보가 한·미 양국의 중요한 의제로 등장한 것은 한·미 FTA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다. 긍정적인 것은 북한 핵실험으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미국 내 한·미 동맹의 균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워싱턴포스트는 9월2일자 기사에서 “백악관 내부 회의 당시 맥마스터 미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개리 콘 국가경제자문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강하게 반대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의회 내 무역협정 소관 위원회인 상원 재무위와 하원 세입위 소속 여야 의원 4명은 9월5일 성명을 통해 “북한의 핵실험에 따라 강력한 한·미 동맹의 필수적 중요성이 강조됐다”며 폐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세 번의 미 연방 하원의원을 지낸 김창준 ㈔김창준정경아카데미 이사장도 “폐기 발언은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욱해서’ 나온 것에 불과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FTA를 안보와 연계시킬 가능성은 많지 않다”고 전망했다.

 

 

‘불합리한 점 개정 등 실리 노려야’ 지적

 

물론 반대 의견도 있다. 한반도 안보 위험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를 이용해 통상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사립대 교수는 “상대방이 위기에 빠졌을 때를 비즈니스 기회로 삼는 것은 트럼프 협상 정책의 기본”이라고 설명했다.트럼프와 백악관이 9월1일과 4일 “한국이 미국산 무기를 구매하는 것을 개념적으로 승인했다”고 한 것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트럼프 협상력의 좋은 사례다. 그런 면에서 올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우리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에 막대한 투자를 약속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결과적으로 트럼프 입장에서는 미국 내 투자도 얻어내고 FTA 재협상도 이뤄낸 꼴이 됐다”면서 “최악의 경우 미국에서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새로운 FTA를 요구한다고 해도 한·미 동맹을 감안할 때 우리로서는 거절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지금처럼 무대응으로 일관하지 말고, 필요하다면 어떤 부분에서 무역역조가 벌어지고 있는지를 따져봐서 가급적 빨리 협상을 마무리하는 것이 낫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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