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살아 있음을 증명한 40년의 기록
  • 조창완 북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9.13 14:45
  • 호수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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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지성 시선집’ 500호 기념호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처음 본 모르는 풀꽃이여, 이름을 받고 싶겠구나 / 내 마음 어디에 자리하고 싶은가… 

돌 속에 추억에 의해 부는 바람, 흔들리는 풀꽃이 마음을 흔든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 / 불을 기억하고 있는 까마득한 석기 시대,

돌을 깨뜨려 불을 꺼내듯 / 내 마음 깨뜨려 이름을 꺼내가라

-황지우의 시 《게 눈 속의 연꽃》 중에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제각기 떠오르는 시(詩)가 있다. 윤동주의 《서시》나 정현종의 《섬》처럼 익숙한 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시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가는 느낌이다. 폭주하는 영상의 시대에 시가 주는 호흡이 자리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시를 지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시가 무너지면 사랑이 무너지고, 사람이 사라져 미움과 비인간의 시대가 올 거라는 두려움이 잠재하고 있다. 그리고 황지우의 시에서처럼 그들은 돌을 깨뜨려 이름을 찾아 서로를 부른다. 그런 애닮을 쌓은 작은 성이 다시 만들어졌다. 위의 시에서 제목을 따온 ‘문학과 지성 시인선’ 500호로 나온 앤솔로지 시집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문학과 지성사 펴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오생근·조연정 엮음 문학과 지성사 펴냄 272쪽 8000원


 

한국 시단 이끈 문학과 지성·창비·민음의 시선집

 

한국 당대 시단을 만든 3가지 요소는 ‘문학과 지성(문지)’ ‘창비’ ‘민음’의 시선집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견고한 실천적 지성을 가진 ‘창비 시선’은 뼈를 만들었고, 단단한 사유적 깊이를 지난 ‘문지 시인선’은 살을 만들었다. 반면에 원리주의적 시 정신에 충실했던 ‘민음’은 ‘오늘의 시인 총서’와 ‘민음의 시’를 거치면서 피부를 만들었다.

 

이 세 출판사는 견고한 진용의 편집위원을 바탕으로 각기 시의 철학을 만들었다. 세 그룹은 때로 경쟁하며, 때로 격려하면서 현대사를 거쳐 왔다. ‘문지 시인선’은 ‘창비 시선’보다 3년 늦은 1978년 이성복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로 시작했으니, 호수로는 500호고, 햇수로는 40년이다. 이번 ‘문지 시인선’은 이전 100호들을 거칠 때처럼 엮음집으로 찾아왔다. 이번에 수록된 시 130여 편은 그간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시집을 대상으로 했다. 이 가운데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시집을 선정하고, 그 시인 한 명당 2편씩의 대표작을 선정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오생근 시인과 조연정 평론가가 엮은 이번 시선집의 제목은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다. 여기서 부름의 대상은 당연히 ‘시’다. 조 평론가는 발문의 제목을 ‘우리가 시를 불렀기 때문에’로 해서 그 뜻을 분명히 밝혔다. 시인들에게 시는 가장 치열한 수단이자 목적이었다. 그들에게 시는 ‘수천 년을 휘둘러온 시퍼런 뚝심의 / 도끼날만큼이나 뜨겁고 굳센 힘이 / 멈춘 듯 쉴 새 없이 흐르고 있다’(장영수의 시 《시가 나에게 내리는 소리》 중에서)고 할 만큼 단단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날이건 내가 칼로서 / 시詩를 가지리라 허공과 시간과 / 우리의 갈증을 베어내는 칼, // 지구 위에서 우리가 공유한 결핍을 베어내리라 베어 던지리라 / 내가 칼인 시를 가지리라’(김정란 《시와 힘》 중에서)라고 말할 만큼 굳은 의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간 100호마다 진행된 앤솔로지 시집의 주제도 시가 많았다. 200호 《시야 너 아니냐》가 그렇고 ‘시인의 자화상’이 그려진 시들을 모은 400호 《내 생의 중력》이 그렇다. 그리고 이번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는 시와의 만남을 담은 셈이다.

 

그러면 시인들에게 시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시는 무엇일까. 발문에서 조연정 평론가는 “시는 우리가 시가 아니었다면 절대 볼 수 없던 것, 들을 수 없던 것, 만지고 느낄 수 없던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지게 한다. 시는 인간의 감각 능력이 무한한 것임을 증명하면서 우리의 존재론적 지평을 넓힌다. 더불어 시는 진리에 관한 인간 사유의 폭과 넓이도 확장시킨다”고 말한다.

 

 

‘밀리언셀러 시집’ 소식 끊긴 지 오래

 

평론가의 말이 맞는다면 다가오는 인공지능(AI)이나 로봇의 시대에 사람들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시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소설이나 드라마의 집필은 이미 인공지능의 영역이 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반면에 아직 시를 쓰는 인공지능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의 기원에는 과거 하늘과 소통하던 샤먼의 언어에서 기원했다는 말이 있으니 완전한 허언도 아닐 것이다.

 

독자로부터 선정된 시를 중심으로 한 만큼 500호 기념 시선집을 읽다 보면 이 시대 시 수요자들이 가진 깊은 어둠도 느낄 수 있다. 500호 시선집과 별책으로 나온 《그대가 있다》라는 필사노트에서 눈에 띄는 시인은 고정희·최승자·기형도·한강처럼 인간 내면에 가진 슬픔을 묘사하는 시인들이 많다. 자신을 분질러 꽃병에 꽂아달라는 최승자식(式) 사랑이나,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고백하는 기형도의 시가 독자에게 더 많이 읽히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관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 후에 발간된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은 82쇄를 돌파했고, 46쇄를 찍은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도 이런 독자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그런 점에서 시는 현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아픈 부분을 위로하는 치유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문지 시인선’을 통해 굳건한 시 세계를 만들어온 시 문단 거목들을 빼놓을 수 없다. 첫 시집의 주인공인 이성복을 비롯해 황동규·오규원·마종기·정현종·김광규·황지우·김혜순 등 중견 문인 가운데 유독 이 시선에 애정을 가진 시인들이 많다. 이들은 대중적인 코드의 시가 아님에도 입소문을 탔고,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통쇄 63쇄)나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52쇄)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런데도 시의 위기는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다. ‘문학과 지성 시선집’에 대한 독자의 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고,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게 판수를 늘리는 시집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과 지성뿐만 아니라 다른 출판사의 시집 어디에서도 과거처럼 밀리언셀러 시집이 나왔다는 소식이 끊긴 지 오래다. 그러나 500호를 넘긴 문학과 지성이나 창비, 민음의 시집들은 굳건하게 시가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나지막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느끼거나 슬픔을 느끼거나 자신을 찾아오라고 속삭이고 있다. 

 

 

New Book

 

어느 노과학자의 마지막 강의

프리먼 다이슨 외 지음│생각의길 펴냄│584쪽│2만2000원

 


1993년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를 강의하던 저자는 그들이 쓰던 교재의 저자이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프리먼 다이슨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기적처럼 다이슨 교수의 답장이 온다. 이후 이들은 과학과 기술, 삶과 종교에 대한 다양한 문제를 같이 논하는 지적 교류를 한다. 원자탄 발명에 한 역할을 했던 노(老)학자의 깊은 회한을 만날 수 있다. 

 

 

국세청은 정의로운가

안원구·구영식 지음│336쪽│이상 펴냄│1만5000원

 

전 대구지방국세청장을 지낸 안원구씨가 최순실 일가의 해외은닉 재산을 추적하는 과정에 대해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와 대화로 엮은 책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도곡동 땅 실소유주 MB 문건’과 관련해 갖은 고초를 겪고 자리에서 물러났던 그는 사비를 털어 이 문제에 접근했다. 자신이 몸담았던 국세청에 대한 올바른 진단과 개혁의 목소리를 담았다. ​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강상중 지음│사계절 펴냄│232쪽│1만2000원

 

 

우리에게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전후 일본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으로 다양한 지식을 주었던 강상중 교수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시대에 자존감 있게 사는 법을 다룬 책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방법, 책읽기, 귀감이 되는 리더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결과적으로 이 사회에서 다양하게 소통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담고 있다.​ 

 

 

제가 그 둘쨉니다

이혜경 지음│온하루출판사 펴냄│272쪽│1만3000원

 

 

자식에 대한 빗나간 사랑을 담은 《물마루》, 가족해체가 부른 비극을 다룬 《제가 그 둘쨉니다》 등 9편의 소설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크고 작은 회한을 그리고 있다. 이웃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보여주면서, 삶의 이면과 잊고 있었던 의식 저편의 본질을 선명하게 그려내는 소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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