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Insight] 시누이·올케의 궁중 파워게임 벌어졌나
  • 이영종 중앙일보 북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9.21 10:41
  • 호수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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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동생 김여정, 리설주에 밀려난 듯한 정황 감지돼

 

평양은 요즘 잔치판에 가까운 축하행사로 흥청거린다. 지난 7월 두 차례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4형’ 발사 성공에 이어 9월초 6차 핵실험을 두고 ‘수소탄 완전 대성공’을 주장하며 자축 분위기를 띄우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도 이런 자리에 직접 참여해 자신의 리더십을 과시하고, 체제 결속을 다지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북한 정권수립 기념일인 9·9절에는 공식 기념행사를 사실상 생략한 채 핵실험 축하공연과 연회에 참석했다.

 

이런 떠들썩한 행사가 이어지면 대북 정보 당국이나 관측통들은 부산해진다. 북한 매체들이 전하는 보도나 영상을 통해 김정은 체제의 내부 움직이나 권력운용 양상을 가늠해 볼 기회란 점에서다. 체제선전 등을 위해 내보내는 공개 정보지만 이를 면밀하게 분석해 보면 적지 않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정보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많은 돈과 인력이 투입돼야 하는 비공개 정보활동에서 점차 공개 정보 쪽으로 무게가 쏠리는 것도 이런 측면 때문이란 얘기다. 특히 베일에 싸여 있는 김정은 패밀리 내부 권력의 미세한 변동을 포착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번 축하행사와 연회 등에서는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화제에 올랐다. 김정은이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치켜세워준 핵무기연구소장 리홍섭과 당 군수공업부 부부장 홍승무 등에 북한 매체의 카메라 앵글이 맞춰지는 가운데 김여정의 위상변화를 가늠해 볼 동향이 드러난 것이다. 대북 정보 당국의 잠정 결론은 “김여정이 과거보다 힘이 빠진 듯하다.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와의 역할 분담 측면에서나 궁중 파워게임 차원에서 상당히 밀려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2014년 4월22일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열린 모란봉악단 공연을 부인 리설주(앞열 왼쪽 세 번째), 동생 김여정 (두 번째 열 오른쪽 첫 번째)과 함께 관람하고 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김여정, 핵실험 축하연회에서 존재감 ‘제로’

 

조선중앙TV가 공개한 영상에서 김여정의 위상은 크게 줄어든 느낌이다. 핵실험 축하연회나 공연에서는 존재감이 거의 없거나 아예 등장하지 못했다. 대신 부인 리설주는 김정은의 곁을 지키며 ‘평양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위상을 과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핵개발 주역 등에게 김정은의 옆자리를 내줬지만 한발 떨어져 다소곳하게 서 있거나 미소를 짓는 장면을 통해 오히려 탄탄한 입지를 보여줬다는 분석이다. 이 때문에 김여정의 자리는 더욱 작아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안치돼 있는 평양 금수산태양궁전에서 9월9일 이뤄진 핵실험 유공자 단체 기념촬영 행사 때 김여정의 줄어든 위상은 확연히 드러났다. 이미 자리를 잡고 도열해 있는 과학자·기술인력 앞쪽으로 김정은이 등장하자 경호·의전팀이 긴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빠의 최근접 의전을 담당하는 김여정의 모습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카메라가 김정은에게 맞춰지자 먼발치에 서 있던 김여정은 앵글에서 벗어나려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다. 또 오빠의 뒤를 따르지 못하고 수십 미터 바깥으로 빙빙 돌아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도 TV 화면에 포착됐다.

 

이런 장면은 지난 4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군사퍼레이드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당시 김여정은 주석단에 자리한 김정은을 밝은 표정으로 챙겼다. 탄도미사일과 전차부대 등이 지나가자 대형 앨범 형태의 책자를 들고 와 오빠 앞에 펼쳐 보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핵심 고위인사들을 밀쳐내듯 하며 오빠에게 다가서는 장면도 드러나 최측근 실세로서의 위상을 과시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지난해 5월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7차대회도 마찬가지다. 당대회를 집권 5년 차의 김정은 권력을 확고히 하는 자리로 기획하고 연출한 게 바로 김여정이었다. 당시 평양시 환영대회가 열린 행사 본부석에 스마트폰과 수첩을 들고 총괄하던 김여정의 모습이 외신기자의 망원렌즈에 포착되기도 했다. 미국 CNN이나 영국 BBC 외에 일본과 서방 언론 등 100여 명의 외신을 불러들이는 과감한 시도를 한 대목도 눈길을 끌었다.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노(老)간부들과 달리 김여정이 어린 시절 해외유학을 하며 서방 문물을 접했기 때문에 이런 판단이 가능했을 것이란 얘기가 나왔다.

 

 

김여정을 노골적으로 내모는 일은 불가능

 

한때 김여정을 두고 북한 권력에서 김정은 다음가는 사실상의 2인자라는 말이 나왔다. ‘모든 길은 여정 동지로 통한다’거나 ‘만사여통’이란 얘기가 북한 권력 핵심층들 사이에 떠돌 정도였다. 김정은의 관심이나 신임을 받으려면 김여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말이었다. 노동당의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여정은 차관급 직책을 훨씬 뛰어넘는 권세를 누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10대 시절 스위스에서 함께 유학하며 다진 끈끈한 우애가 김여정을 평양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하게 한 것이란 게 대체적인 분석이었다.

 

당초 김여정과 리설주 사이에 적절한 수준의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는 관측이 우세했다. 28살 동갑인 시누이·올케 사이에 절대 권력자 김정은을 둔 암묵적 합의가 필요했을 것이란 얘기다. 리설주가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과 내조를 맡고, 김여정은 외부행사 의전이나 최근접 수행을 담당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한동안 리설주의 공개석상 등장이 장기간 이뤄지지 않거나 뜸해지면서 김여정에게 힘이 실리는 양상을 보였다. 이를 두고 리설주가 출산 등으로 공백이 불가피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국가정보원은 8월말 “리설주가 올해 초 셋째를 출산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국회 정보위에 보고했다. 2월께 셋째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인 듯 리설주는 지난해 3월말 김정은을 수행한 이후 9개월 정도 공개석상에 등장하지 않아 ‘김여정이 견제를 하고 있다’는 등의 설이 나돌았다.

 

김여정이 권력무대에서 다소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걸 두고 리설주가 김정은의 귀와 눈을 잡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안방권력’인 리설주를 뛰어넘어 김여정이 오빠 곁으로 다가가기 쉽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그동안 김여정이 지나치게 권력실세로 부각되면서 원로 핵심 엘리트들의 지적을 받았거나, 수위 조절을 요구받았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물론 김여정의 위상 축소 조짐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노골적으로 견제하거나 몰락 쪽으로 내모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지는 ‘백두혈통’이란 점과 함께 오빠의 신임이 여전하다는 측면에서다. 김정은 유고 시 대안으로 떠오를 정도로 여전히 평양권력 내에서의 위상은 상당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을 것이란 분석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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