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요석은 고조선 사람들의 '성공 조건'이었다
  •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0.2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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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

 《붕괴(Collapse)》. 짧고 임팩트 있는 제목의 이 책은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UCLA) 지리학과 교수이며 뛰어난 환경역사학자이기도 한 제레드 다이어몬드의 2005년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문명의 붕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거기서 그는 각각 망가레바, 핏케언, 핸더슨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태평양의 세 섬에 대해 얘기하면서, 망망대해로 둘러싸인 작은 섬에서 극히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소개한다. 

 

이 섬들은 지금 무인도 혹은 극소수의 주민만 사는 곳이 됐지만, 한때 사람들이 꽤 살았던 흔적이 있다. 저자는 이 흔적을 분석하면서 환경과 인간생활의 관계를 조명하는데, 제한된 자원과 단순한 기술로 살았던 원시적인 사회의 모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그가 섬사람들의 생존 성공도를 크게 좌우했던 생태학적 자원으로 꼽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숲, 갯벌, 그리고 흑요석이다. 핏케언 섬 같은 곳은 숲도 보잘 것 없었고 갯벌이 없어 쉽게 구할 수 있는 동물성 단백질원도 없었지만, 흑요석이 많이 나기 때문에 그걸 구하러 카누를 타고 오는 인근 섬 주민들과 교역을 통해서 먹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숲과 갯벌이 중요한 이유는 지금까지 많이 나왔고, 흑요석은 왜 중요할까?

 

 

흑요석 © 사진=Pixabay


 

흑요석(obsidian)이란 화산암의 일종으로, 검고 단단하며 얇게 쪼개지는 성질을 가진 돌이다. 극히 미세한 두께로도 쪼개질 수 있어서 가공하기 편한 편이며, 웬만한 금속이나 석재보다 훨씬 단단하고 표면에 미세한 요철도 없이 매끈하기 때문에 날카로운 날을 가진 도구나 무기의 재료로 최적이다. 따라서 철기제련법이 등장하기 전까지 원시사회에서는 흑요석으로 만든 무기가 가장 강력했으며, 지금까지도 고도로 정밀함을 요구하는 수술 같은 과정에서는 흑요석 메스가 사용된다. 

 

이 흑요석은 아무 데서나 나지는 않는다. 형성되는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유리 성분을 많이 가진 용암이 화산폭발과 함께 대규모로 공기 중에 분출되는 순간 급속히 냉각되어야 한다. 따라서 세계에서도 흑요석 산지는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 번에 나는 양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덕분에 흑요석이 많이 나는 지역 사람들은 자기 지역에서 생존에 필요한 다른 자원들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먹고 살 일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무기와 도구를 만드는데 압도적으로 유리한 특성을 갖는 흑요석을 찾아 먼 곳에서도 식량과 목재 등을 들고 찾아왔을 터이기 때문이다.

 

흑요석 산지 사람들은 풍요롭게 살 수 있었다

 

금속 무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이전 시대에 흑요석이 많이 나는 지역 바로 옆에 식량이 풍부한 지역이 있었다고 하자. 두 지역에 사는 인간 집단의 관계는 어땠을까? 십중팔구 이 두 지역의 사람들은 서로 연대해서 더 강력한 인간집단을 만들었을 것이다. 풍부한 식량으로 강한 체력을 키운 사람들이 강력한 무기로 무장을 하게 되면, 그 인근에서 최강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두 집단은 서로 상대방이 없으면 그런 최강자의 자리를 지키기 어려우므로, 긴밀히 연대해서 하나의 집단으로서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은 바로 이렇게 해서 성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성기 고조선의 영토는 요하유역에서 지금의 평안도 및 함경도까지를 통합했던 큰 국가였다. 요하유역이 마지막 빙하기 이래 가장 식량생산성이 높은 땅이었다는 것은 앞서도 보았다. 함경도 북부, 백두산 바로 아래 지역은 바로 이 흑요석이 많이 나는 고장이었다. 요하유역과 지금의 함경도 지역이 손을 잡는다면 평안도 지역은 자연스럽게 그 과정에 통합되기 쉽다.

 

 

고조선의 영토와 흑요석 산지. ©사진제공= 이진아


 

지금으로부터 약 9만 년 전, ‘백두산 6기’라는 지질시대명이 붙은 시기에 백두산이 폭발하여, 유리성분이 많이 함유된 용암이 대규모로 분출되어 지면으로 떨어져 알칼리성 유문암을 형성했다. 그 과정에서 백두산의 동남쪽 사면, 지금의 회령에서 나진, 청진에 이르는 일대에만 흑요석 맥이 형성된 것이다.

 

여름이면 동남쪽에서 불어오는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이 지역에 폭우를 쏟아 붓고 있던 시기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일까? 유리성분이 많은 용암은 대기 중에서 급속 냉각되면 흑요석이 되고, 천천히 냉각되면 유문암이 된다. 백두산 주변에 알칼리성 유문암 대지를 형성한 제6기 폭발은 흑요석이라는 귀한 자원을 함경도 일부지역에만 선사한 것이다.

 

고조선은 요하 유역에서 지금의 북한 땅 전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점유하는 국가였다.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하면 이런 영토 점유 패턴은 상고대사회에서는 이례적인 것이다. 요하 유역처럼 강 주변을 점유한 인간집단은 바닷길을 따라 인근 강의 하구까지 가서, 거기서 강을 타고 올라가면서 교역 상대를 (때로는 정복의 대상을) 확대하는 게 일반적이다. 서해안에서 함경도 오지 및 동해안까지 이어지는 강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요하유역에 중심이 있었던 국가가 지금 함경도 지방의 험한 산지를 넘어 동해안 유역까지 영토로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앞서 가야사 편에서 가락국의 일본 규슈 영토가 에비노 고원 앞에서 멈추었던 것을 생각해보자. 

 

장백산맥계와 태백산맥계의 높은 산들을 넘어서 육로로 가는 길도 험했을 테고, 서해안의 남쪽은 동아시아 남부를 활동무대로 했던 해상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을 터이므로 돌아서 올라가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은 그렇게 물과 육지의 길을 통합한 영토 패턴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다.

 

어렵사리 길을 찾아 왕래하면서 하나의 집단을 이룰 만큼 결속을 다지려면, 그 정도 강력한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 철기 제련법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 청동기는 제련하기도 어렵고 쉽게 부식하며 무겁고 잘 무뎌져서 그리 효율적인 무기는 아니었다. 이럴 때 자연이 준 첨단소재 흑요석을 갖고 있는 인간 집단이 있다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고생해서 구해올 가치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흑요석을 가진 집단으로서는 그 중에서 자신들에게 귀한 물자, 이 경우엔 험한 산지여서 항상 부족했던 식량(땅에서 나는 것이든 바다에서 나는 것이든)을 가진 사람들이 교역 영순위였을 것이다. 인류사에서 보기 드문 인간 집단 결합의 패턴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벽화 ‘수렵도’. 상고대 사냥 그림 중에서도 말을 타고 빨리 달리며 활을 쏘는 모습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다. ©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이 결합은 고조선이라는 국가 사회를 성립시키기 훨씬 이전인 약 3만 년 전의 후기 구석기 시대에 이미 어느 정도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빙하기가 최저점을 치고 빠른 속도로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하던 시점이다. 그래도 여전히 혹심한 추위가 계속되던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백두산 흑요석이 낚시 바늘, 작살 등 어구류와 함께 화살촉으로 많이 만들어져 쓰였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세종대 홍익희 교수는 가벼우면서도 치명적인 흑요석을 화살촉으로 만들어 일상적으로 썼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화살의 명인으로 일대에 명성을 날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고대로부터 우리 신화에 활 잘 쏘는 인물이 등장함은 물론 중국이 예로부터 우리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썼던 ‘이(夷)’라는 한자는 큰 활을 상징하는 그림문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한국인은 세계의 양궁대회를 석권하고 있다.)

 

흑요석은 산지가 정해져 있고 탄소동위원소 측정법 등으로 연대를 추적하기 쉬우며 부식되지 않기 때문에, 흑요석 유적을 추적하면 그 옛날 교역의 루트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한반도 전역이 구석기 시대에 벌써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한반도에서 흑요석 출토 유적 수는 110곳이 넘는다. 이 가운데 구석기 유적은 13개이고 나머지는 신석기 유적이다. 단양, 홍천, 심지어는 한반도 전라도 장흥에서도 구석기 시대 백두산 흑요석이 나온다. 시베리아의 알타이 유적에서도 백두산 흑요석 세석기들이 발굴되었다. “백두산의 흑요석이 수만리에 해당되는 거리로 운반된 것은 고대 한국인들의 생활반경의 광대함을 보여준다.” 홍익희 교수의 설명이다. 

 

 

흑요석 운반 루트를 보면 고대 한국인들의 생활반경이 보인다

 

산과 바다 생태계가 어우러져 제공하는 풍부한 식량과 최고의 산업소재 흑요석을 갖춘 한반도 사람들은 동아시아는 물론 훨씬 더 넓은 범위에 이르기까지 최강자로 군림할 조건을 갖추었다. 아마 우리가 지금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오랜 기간을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최강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지구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끊임없는 지구환경의 변화, 또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또 다른 내용의 다음 장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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