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Insight] 혹독한 겨울 맞게 된 김정은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0.25 13:23
  • 호수 146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러시아까지 동참한 전례 없는 대북제재 김정은 “제재압살 책동을 물거품으로 만들자”

 

대북제재의 먹구름이 심상치 않다. 잇단 김정은의 탄도미사일 도발에 이어 지난 9월초 ‘수소탄 대성공’으로 주장되는 6차 핵실험 감행으로 압박의 차원이 달라진 듯하다. 유엔의 대북결의안 2375호를 필두로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의 제재 파상공세가 평양으로 밀어닥치고 있는 모습도 드러난다. 그동안 북한은 “제국주의의 대북 압살 책동에 끄덕 않을 것”이라며 결사항전과 제재무용론을 펼쳐왔다. 하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다르다.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 밀려오고 있다는 긴장감이 북한 체제 내부에서 감지된다.

 

무엇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전면에 나선 대목이 눈길을 끈다. 그만큼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김정은은 10월7일 평양에서 노동당 7기 2차 전원회의를 열었다. 노동당 창건 72주년(10월10일)을 앞둔 시점에서 체제정비와 권력 핵심 인선을 위한 자리다. 지난해 5월 당 7차 대회를 치른 지 1년5개월 만에 총화 절차를 마련한 것이다. 여동생 김여정을 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진입시키는 등 친정 체제를 구축한 부분에 안팎의 시선이 쏠렸다.

 

10월19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왼쪽 두 번째)과 부인 리설주(왼쪽 세 번째)가 평양 류원신발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 사진=조선중앙통신 연합

 

고위 탈북인사 “북한, 1년도 버티지 못할 것”

 

하지만 김정은이 이보다 더 관심을 가진 건 대북제재에 대한 북한의 대응전략 마련인 것으로 분석된다. 그가 전원회의 보고를 통해 언급한 20개의 문장 가운데 5가지 대목이 제재와 관련한 내용이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김정은은 “제재압살 책동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화(禍)를 복(福)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기본열쇠가 바로 자력갱생”이라고 주장했다. 그만큼 신경을 쓰고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원회의 소집이 경제제재 강화와 장기화에 대비한 비상대책회의 성격이 짙다는 진단도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온다.

 

북한의 관영매체들도 총동원돼 제재 국면 극복을 위한 선전·선동에 나선 모습이다. 노동신문은 연일 북한의 대표적 공장·기업소와 협동농장 등이 올해 생산계획을 조기에 초과 달성했다고 주장한다. “룡성기계연합기업소의 일꾼과 노동계급이 연간 계획을 100.3%로 초과 달성했다”는 발표에 이어 평양수지건재공장은 2년분 계획을 완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정부 당국과 대북 경제 전문가들은 북한이 예년보다 일찍 연간계획 초과 달성 보도를 쏟아내고 있는 데 주목한다. 대외적으로는 제재에 끄떡없다는 점을 주장하고, 안으로는 주민들에게 압박 국면에 대비한 채비를 서두를 것을 독려하는 차원이란 얘기다.

 

하지만 빨간불이 곳곳에서 켜지고 있다. 북한이 9월25일부터 나흘간 평양에서 개최한 국제상품전람회는 대북제재의 충격파가 고스란히 전달된 현장이었다. 대한무역투자공사(KOTRA) 모스크바 무역관이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박람회엔 81개 외국 기업을 포함해 모두 150개 기업이 참가했다. 하지만 외형적인 모습과 달리 외국 기업이나 관계자들의 참여가 현저히 축소됐다고 한다. 휘발유 가격도 8월 중순 이후 급등세를 보여 1㎏당(북한은 리터가 아닌 kg 단위로 유류를 판매) 북한 돈 6000원 수준이던 올해 초보다 3배 이상 올랐다. 9월 중국이 북한으로부터 수입한 규모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37.9%나 줄어 7개월 연속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런 가운데 북한 경제 사정에 밝은 고위 탈북인사가 “대북제재로 인해 북한이 1년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 주장하는 등 비관적인 쪽에 무게가 실린다. 노동당 자금부서인 39호실에서 일하다 탈북한 리정호씨는 외신 인터뷰에서 “백악관이 부과한 제재는 역사적으로 최고 수준이며 북한은 이번처럼 강력한 제재를 경험한 적이 없다”고 분석했다. 전례 없는 압박 수위에 북한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경고다.

 

대북제재는 북한 최고지도자들을 괴롭히는 두통거리였다. 국가주석 김일성도 1994년 6월 핵 위기 속에 방북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난 뒤 노동당 간부들을 모아놓고 “제재를 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카터에게 말해 줬다”며 허풍을 떨었다. 김일성은 “우리는 제재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제재를 받으며 살아왔지 제재를 받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지금까지 제재를 받으면서도 우리가 별일 없이 살아왔는데 이제 제재를 더 받는다고 해서 못 살아갈 줄 아는가라고 말해 줬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며칠 뒤 김일성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대북제재의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집권 시기에도 미국이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를 동결하고 2500만 달러의 자금을 압류하는 등 북한 당국을 괴롭게 했다.

 

물론 북한 경제의 폐쇄적 특성 때문에 대북제재 약발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거나 어딘가 큰 구멍이 뚫려 있다는 관측이 있는 게 사실이다. 미국과 유엔 등의 대북압박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미사일 프로그램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속도를 늦추는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제재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효과 없는 제재와 압박보다는 협상과 대화를 통해 핵 포기를 유도하고, 북한의 변화를 꾀하자는 입장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다.

 

 

“효과 없는 제재보단 대화로 해결”

 

그렇지만 전례 없이 촘촘하게 짜인 대북제재망으로 이번만큼은 김정은의 핵·미사일 도발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북한의 후견국을 자처해 온 중국과 러시아까지 동참한 압박에 김정은이 당혹감을 드러내고 생존전략을 모색하는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다. 북한은 10월17일 최선희 외무성 미국국장을 모스크바에 파견해 미국과의 1.5트랙(반민반관) 대화를 모색하고, 러시아를 통해 숨통을 트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노동신문도 10월19일 “조선(북)의 핵 보유를 용기 있게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길을 찾는 게 합리적”이란 입장을 밝히는 등 대화 탐색 움직임을 보인다.

 

정부 당국자들은 대북제재 자체가 목적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북한의 태도변화와 핵·미사일 포기를 이끌어 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대북제재의 수단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국제사회가 얼마나 일치된 호흡으로 공조망을 마련하느냐에 따라 성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대북제재의 성적표가 향후 북한의 태도변화나 협상 국면으로의 전환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의 무모한 핵·미사일 도발이 자초한 대북제재 때문에 북한은 그 어느 때보다도 추운 겨울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