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잃어버린 인간성 회복할 수 있다”
  • 김경민 기자 (kkim@sisajournal.com)
  • 승인 2017.10.26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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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첫 내한한 볼리비아 기타리스트 피라이 바카

 

조명이 켜진 무대 위엔 갈색 스페니시 기타를 품은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기타리스트는 조용히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가만히 손가락을 움직여 연주를 시작했다. 그가 연주한 것은 볼리비아 민속 음악. 기타리스트는 10여분의 연주를 마쳤다. 그의 공연엔 큰 움직임도, 화려한 표정연기도, 거대한 협연도 없었지만 그 음악을 듣고 있자니 마음속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다. 

 

세계적인 기타연주자 피라이 바카(Pirai Vaca․50)는 ‘남미 최고의 기타리스트’란 평가를 받는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그를 두고 “관객들에게 탁월한 음악성과 무대 장악력으로 충격을 줬다”고 평가했고, 독일 라인자이퉁은 “과장이 아니라, 피라이 바카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공연을 올렸으며, 존 F. 케네디 센터로부터 권위 있는 펠로십을 수여받은 몇 안 되는 남미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모국 볼리비아에서는 음악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문인·조형예술인·음악인 협회의 전국음악대상 외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10월25일 서울 인사동에서 그를 만났다. 한 쪽 어깨에 기타 케이스를 걸친 그는 이번이 첫 한국 방문이다. 한국국제교류재단(KF․이사장 이시형)의 KF갤러리 오픈스테이지에 오르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0.5cm 가량 기른 오른쪽 손톱과 짧게 바싹 자른 왼쪽 손톱이 그가 ‘기타리스트’임을 인증하는 듯했다.

 

2시간 가까운 인터뷰 끝에 그는 “한국의 전통적인 공간을 보고 싶다”며 기자에게 갈 만한 곳 몇 군데를 물어왔다. 그는 “이번 방문 일정에서 자유시간이 많지 않다며 시간이 허락하는 동안엔 한국의 오래된 문화와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곳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비단 한국인 뿐 아니라 세계인들의 정신적 유산과 그것이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력에 관심이 많은 그였다. 볼리비아 태생인 그는 볼리비아의 오랜 민족적 유산과 영적인 전통에선 영감을 받고, 이를 음악적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기타연주자 피라이 바카 ⓒ 시사저널 임준선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첫 방문이라 들었는데.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를 가본 적은 있지만 한국은 처음이다. 한국이 매우 국제적인 국가라곤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발전한 나라일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곳곳에서 최신 기술이 사용되고 있어서 매우 놀라웠다. 기술 선진화의 측면에서 뉴욕, 도쿄보다 앞선 것 같다.

 

 

이번 한국 공연에서 선보일 무대는 어떤가?

 

저는 공연 프로그램을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을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짠다. 부드럽게 애무도 했다가, 강렬하게 휘몰아치기도 했다가…. 

 

이번에도 볼리비아 음악뿐만 아니라 스페인 음악, 아프리카 음악, 클래식 음악도 선보일 예정이다. 연주자에게 다양하고 폭넓은 레퍼토리를 연주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감성은 매우 다양해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려면 할 줄 아는 음악의 스펙트럼 역시 넓어야 한다. 

 

또한 이것은 기타 연주의 가능성 자체를 넓혀준다. 기타가 얼마나 풍부한 소리를 갖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다. 줄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전통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기타 전체를 마치 퍼커션처럼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제 안의 서로 다른 음악적 감수성을 표현하기 위한 방식들이다. 음악으로 표현한 제 삶인 셈이다.

 

 

음악으로 삶을 표현한다는 표현이 매우 문학적이다.

 

음악은 제게 현실세계에서 한 발 더 깊이 들어간 감각 세계로의 문을 열어줬다. 제 연주는 사실 생(生) 그 자체가 음악으로 발산된 것일 뿐이다. 제 삶에서 음악은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였다. 음악은 오감(五感)이 접할 수 없는 세계로 저를 인도한다. 

 

1992년의 일이다. 볼리비아 한 교회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중이었다. 멀리 빛 한 줄기가 느껴졌고, 순간 제 몸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점차적으로 저를 둘러싼 무대라는 공간, 제 앞의 관객들의 존재가 사라졌다. 종교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상태(state of grace)’였다. 모든 것이 흐려지며 역설적이게도 정신은 그 어느때보다 또렷해졌다. 매우 ‘음악적인 순간(musical moment)’이었다.

 

그날의 경험 이후 그 상태를 다시 경험하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을 하려면, 그러니까 살아있는 음악을 하려면 기타를 치는 테크닉이나 사운드만 중요한 게 아니다. 연주자와 공간의 분위기, 에너지가 몸에 배어야 한다. 

 

연주를 할 때 제 몸 안에서 뭔가가 휘몰아치는 느낌을 받는다. 발바닥과 머리끝에서 에너지가 들어와 몸 한가운데서 만나 에너지 충돌을 일으키는 듯한 느낌. 근데 놀라웠던 것은 제가 연주하는 장면을 촬영한 영상을 봤는데, 연주하는 동안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더라. 

 

 

하지만 당신의 연주를 듣는 동안 청중들 역시 내면 에너지의 휘몰아침을 느꼈을 것이다. 볼리비아 음악도 당신의 주된 레퍼토리 중 하나다. 볼리비아 음악의 특징은 뭔가?

 

볼리비아는 세 개의 지역으로 이뤄져 있다. 안데스 산맥 고지대와, 동부 밀림 저지대, 그리고 수도 지역이다. 춥고 건조한 고산 기후부터 덥고 습한 열대 기후까지 다양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만큼 다양하고 폭넓은 문화를 가지고 있다 .

 

저는 저지대 도시인 산타크루즈에서 자랐다. 아버지 로르히오 바카(Lorgio Vaca)는 남미에서 유명한 벽화가다. 그는 진정한 민중 미술가다. 사회적 지위나 재력과 같은 조건과 상관없이 누구라도 미술을 감상하고 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공공장소의 벽화를 그리는 이유다.

 

기타연주자 피라이 바카 ⓒ 시사저널 임준선

 

예술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나보다.

 

3형제 가운데 막내인데 형제 중 유일하게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다. 16살에 처음 단독 콘서트를 했다.  

 

어릴 적 전 입버릇처럼 “아버지에 많은 빚을 졌다”고 말하곤 했다. 쿠바에서 공부하던 20대 시절, 저는 늘 아버지의 작품에 큰 감동을 받았다. 아버지가 제게 보내주는 편지와 그가 그려 보낸 그림을 보면서 울기도 했다. 

 

26세 때 제 인생의 변환점이 된 순간이 있었다. 그때 전 쿠바 하바나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중이었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달리던 중, 초자연적인 순간을 경험했다. 세 개의 장면이 연달아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첫 번째 장면은 젊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어머니를 만나 저를 낳기 전의 아버지였다. 비전 속 아버지는 민중들을 위해 사회적인 메시지가 담긴 작품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장면이 이어졌다. 어떤 ‘존재’들이 모여서 회의 비슷한 걸 하고 있었고, 그 자리에서 제가, 그러니까 젊은 저의 아버지의 아들로 가기로 결정이 됐다. 그리고 이어진 세 번째 장면이 제가 하바나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현재 시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2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저는 안데스 지역 원주민 문화에선 잉태되기 전부터 아이가 부모를 선택해 나온다고 믿는다는 것을 알게됐다. 지극히 안데스적인, 그러니까 볼리비아적인 사고방식이 제 안에 내제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제가 아버지로부터 그토록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았던 이유를 말이다. 우린 영적으로 공유하는 유산이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 세계를 바라보는 제 시선이, 제 삶이 바뀌었다. 그 경험 이후 1차원적, 수평적이었던 시간감각이 다차원적, 수직적으로 바뀌었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에 맞추듯 말이다.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방송들이 이뤄지고 있고, 우리는 원하는 주파수를 찾아 그때 그 주파수에서 나오는 방송을 선택해 듣지 않나.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접한 주파수에 일어난 일만 경험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매우 영적인(spiritual) 인물이란 생각이 든다. 당신에게 있어서 음악 작업이란 단순한 선율적인 작업을 넘어서는 정신적 영역의 작업이기도 한 것 같다.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다. 사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뭔가가 가슴에 뭔가를 하나씩 품고 세상에 나온다. 저는 이 뭔가가 누구에게나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자라면서 인간으로서 이뤄야할 가장 큰 위업은 그 뭔가를 잘 발아시켜 우리 안에 있는 그 뭔가와 삶을 조절해 조화를 이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사회는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살아가도록 한다. 때문에 밖에서 요구하는 기준에만 맞추려 애쓰는 살아가기도 한다. 불행한 삶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 속 작은 목소리에 귀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바로 인간성의 회복이다. 음악은 그 소릴 들을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문을 열어줄 매개체다.

 

 

유튜브 채널에 공개된 피라이 바카 콘서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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