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대학가 시험제도 유감
  •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0.27 10:19
  • 호수 1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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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는 바야흐로 중간고사 기간이다. 매해 이맘때가 되면 교정은 아름답게 물들기 시작하건만, 학생들 옷차림은 추레해지고(?) 발걸음은 빨라져만 간다. 여전히 학점 부담을 절감하는 학생들로 인해 강의실 곳곳엔 긴장감이 흐르고 때론 비장함까지 넘쳐난다.

 

희끗희끗한 머리의 원로교수님이 당신 대학 시절 시험 답안지에 얽힌 무용담을 들려주셨다. 교양필수 과목을 담당했던 어느 교수님께서 매 학기 똑같은 문제를 출제하셨다 한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여말선초(고려말 조선초)에 대해 논하라”였다는데, 학생들은 시험 당일이면 저마다 책상을 끌어안고 그 위에 커닝 페이퍼를 옮겨 적었다고 한다.

 

한데 어느 해인가 시험감독 조교가 강의실에 들어오더니 학생들을 모두 일으켜 세운 뒤 저마다 자리를 바꾸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덕분에 책상 위에 공들여 적어놓은 예상 답안지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는데, 아쉬움도 잠시 막상 문제지를 받아보니 한 번도 출제된 적 없는 “나말여초(신라말 고려초)에 대해 논하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는 게다.

 

충격에 휩싸인 학생들 반응은 세 부류로 나뉘어졌다 한다. 첫 부류는 머리를 끙끙 싸매고 답안을 작성했고, 두 번째 부류는 백지를 내고 일찍 나가버렸고, 세 번째 부류는 문제지 ‘나말여초’에 두 줄을 긋고 ‘여말선초’로 바꾼 후 자신들이 준비한 답을 적어냈다는 것이다. 결과는 (예상했듯이) 감히 문제를 바꾼 학생들이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고, 차라리 백지 답안지를 낸 학생들이 후한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다.

 

© 사진=연합뉴스

일전에 포스텍 총장님을 만난 자리에서, 내년부터 포스텍 신입생은 전공 없이 선발하고, 1년 동안은 보다 다양한 전공을 섭렵할 수 있도록 학생 평가 시스템을 조정해서, 기존의 상대평가 대신 ‘패스(pass)/노 레코드(no record)’로 운영할 계획임을 전해 들었다. 배경인즉 2015년 미국 신생아의 평균 기대수명이 142세로 예측된 상황에서, 요즘 대학에 입학하는 세대는 적어도 80세까지 사회적 활동을 지속해야 될 텐데, 20대 초반 4~5년 동안 배운 지식만으로는 역부족일 것이 분명하기에 내린 결정이라 한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학생들은 학점에 연연해 내용이 어렵다거나 낯설다거나 좋은 점수 따기 어려운 과목은 피해 다니는 것이 현실이니, 학생들에게 새로운 영역을 경험할 기회도 주고 그에 따른 위험 부담도 줄여주기 위해 상대평가 대신 통과(pass) 여부만 판단하는 과목을 대폭 늘릴 계획이라는 게다. 덧붙여 패스의 반대말로 ‘fail’이란 표현보다는 아예 기록조차 남기지 않는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느냐 하셨다.

 

개인적으로는 포스텍의 실험을 두 손 들어 환영하고 꼭 성공을 거두길 희망한다. 10월19일 목요일자 일간지에는 기보(棋譜) 한 번 보지 않은 인공지능 ‘알파고 제로’가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 리’에 100전 100승을 거두며 바둑의 신(神) 경지에 올랐다는 기사가 났다. 세상은 멀미를 느낄 만큼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네 대학 강의실에선 여전히 답안지에 암기 능력을 테스트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대학은 상대평가를 하라는 교육부 지침에 따라 무조건 A부터 F까지 학생들을 줄 세우면서.

 

물론 교육과정에서 합리적 평가 시스템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지금의 평가 방식이 시대가 요구하는 학생들의 잠재력 및 역량 개발에 역행하는 것은 아닌지 깊은 반성이 필요한 것만은 확실하다. 과학과 기술은 눈부신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데, 강의실에선 여전히 기존의 관행을 고수하면서, 70년대 대학 시절 작성했던 답안지를 지금 학생들도 똑같이 작성하고 있는 현장 앞에서 답답함과 두려움이 교차함은 나만의 기우는 아닐 것 같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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