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 드러낸 현대판 음서(蔭敍) 제도
  • 이민우 기자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17.10.29 16:15
  • 호수 146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부·공기업·금융기관 고위 간부의 자녀 ‘특혜 채용’ 의혹

 

청년 실업률 9.2%, 청년 체감실업률 21.5%, 정신건강 위험군 15.4%.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층을 대변하는 수치들이다. 하지만 이 우울한 통계들은 어쩌면 ‘흙수저’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인 것 같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이 부모 덕분에 좋은 일자리마저도 쉽게 차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권력과 부를 이용해 자녀에게 좋은 일자리를 구해 주는 ‘현대판 음서제도’라 할 수 있다.

 

올해 국정감사에서도 채용 비리 소식은 끊이지 않았다. 취업 스트레스에 빠진 청년층을 좌절하게 만드는 내용들이다. 감사원, 중소기업진흥공단, 강원랜드, 한국석유공사, 한국석탄공사, 부산항만공사, 중소기업진흥공단, 서울교통공사, 한국항공우주산업(KAI), SR, 우리은행 등 정부기관과 공기업, 금융권 곳곳에서 의혹이 제기됐다. 문건이 공개되거나 정황 증거들이 공개된 곳이 이 정도면, 실태는 더욱 충격적일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특권층의 세습이 고착화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온다.

 

© 심상정 의원실 제공

 

“◦◦ 아들” “예금 XX억” 채용비리 천태만상

 

자녀 특혜 채용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언론 보도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누구나 한두 번쯤 접했을 만한 이야기다. 하지만 정황만 있을 뿐, 입사 과정에서 특혜를 줬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저 “특혜는 없었다”는 한마디 해명을 반박할 만한 증거나 내부자의 증언을 확보하기 어려워서다.

 

하지만 최근 특혜 채용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벌어졌다. 국정감사에서 한 금융기관의 특혜 채용을 입증할 만한 문건이 공개된 것이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10월17일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우리은행의 특혜 채용 의혹을 제기했다. 심 의원이 공개한 지난해 우리은행 신입사원 공개채용 내부 문건에는 20명이 특혜 채용됐다는 정황이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었다. 은행 내부에선 이름·나이·출신학교·학점과 함께 이들의 ‘배경’을 명시한 관련 정보를 정리했고, 여기에 이름이 오른 이들은 모두 합격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명단에는 국정원, 금융감독원, 우리은행 전·현직 임직원 등의 자녀와 친인척 등이 이름을 올렸다.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추천받은 지원자도 2명 포함됐다. 한 합격자는 ‘금감원 요청’으로, 다른 합격자는 ‘금감원 이아무개 부원장 요청’이라는 설명과 함께 본점 간부의 추천으로 리스트에 올랐다. 서울의 한 대학 부총장의 요청에 의해 추천받거나 경기도의 한 종합병원 이사장의 요청으로 내부 문건에 이름을 올린 합격자도 있었다. 전 부행장 지인의 자녀, 홍보실장 조카도 채용됐다. 지난해 우리은행 신입사원 경쟁률은 무려 113대1에 달했다.

 

은행의 실적 향상을 위해 ‘큰손’인 VIP 고객들의 자녀도 리스트에 포함됐다. 서울의 한 부구청장 자녀의 이름 옆에는 ‘급여이체 1160명, 공금예금 1930억원’이 적시돼 있었다. 국군재정단 연금카드 담당자 비고란에는 ‘연금카드 3만좌, 급여이체 1만7000건’이라고 기록돼 있었다. 우리은행의 한 센터장이 추천한 것으로 적힌 고객 자녀의 경우 ‘여신 740억원’ ‘신규 여신 500억원 추진’이라고 적혀 있었다. 은행 거래 액수와 채용이 관련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살 만한 대목이다.

 

한 국정원 간부의 딸은 2015년 신입사원 선발에 합격했다가 부적격 사유로 합격 취소된 뒤, 2016년 다시 선발됐다. 심지어 그는 신입사원 연수 때 무단이탈을 하고 동료 평가에서 최하위를 받아 인사 부서에서 특별 보고서까지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우리은행 측은 현장 평가가 좋아 종합적으로 판단해 채용했다는 해명만 내놨다.

 

금융권에서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다. 한 금융회사 관계자는 “신입직원을 채용할 때 예탁 자산이 많은 고액자산가 자녀를 우대한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내용이었다”며 “영업실적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심 의원은 “우리은행 관계자는 해당 문건이 인사팀 내부에서 작성된 것이 맞다고 하면서도 100% 블라인드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추천이 당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답했다”며 “뿌리 깊은 채용 비리를 사회에서 뿌리 뽑을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감원은 이 문제를 검찰에 수사 의뢰하기로 했다. 국정원 측도 우리은행 채용 특혜 의혹에 대한 자체 조사에 들어갔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우리은행 공채의 특혜 채용 정황이 담긴 내부 문건을 공개했다. ⓒ 사진=연합뉴스

 

취준생들 들러리로 만든 그들

 

우리은행만의 문제가 아니다. 채용 비리는 공공기관 곳곳에도 만연해 있다.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감사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2년부터 올해 7월까지 채용 비리와 관련해 감사원이 해당 기관에 처분을 요구한 것은 모두 255건이다. 감사원 감사를 통해 밝혀진 채용 비리 사건만 적어도 이 정도 수준이라는 의미다.

 

행정부와 공무원의 감찰을 담당하는 감사원도 채용 비리 의혹에 휩싸였다.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에 따르면, 감사원은 지난 2012년과 2013년에 각각 4명의 경력 직원을 채용했다. 이 과정에서 2012년 감사원 전직 국장의 아들 A씨가, 2013년 감사원 전직 사무총장의 아들인 B씨가 각각 입사했다. 이들은 각각 민간 기업 근무 경력 8개월과 7개월이었다. 실무 수습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경력으로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모두 1등으로 채용됐다. 대한법조인협회는 “그동안 수많은 비리와 부정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단 한 건의 개선책도 내놓고 있지 않다”며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정부 산하 공공기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권력의 압력에 버틸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의 조카를 채용했다는 의혹으로 수사를 받고 있는 KAI, 최경환 자유한국당(옛 새누리당) 의원의 인턴마저 채용시킨 중소기업진흥공단, 강원도 소속 의원들은 물론 정치권 실세들로부터 일상적으로 청탁을 받은 강원랜드는 채용 비리의 온상이 됐다.

 

최근에는 수서고속철도(SRT) 운영사 SR에 대한 채용 비리 의혹이 제기됐다. SR은 지난해 채용 과정에서 자사와 모기업인 코레일의 임직원 자녀 12명을 뽑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신규 채용 인원 300명 가운데 12명이 간부 자녀인 셈이다. 코레일 간부 C씨 아들은 채용시험 필기 직무 평가에서는 D등급을 받았는데, 서류전형에서 4등, 면접에서 6등을 해 객실장에 뽑혔다. 해당 의혹을 제기한 김경협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공공철도를 운영하는 기업에서 임직원 자녀에게 취업 특혜를 주는 일이 있었는지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 지하철 1~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시 산하 공기업 서울교통공사에서도 채용 비리 의혹이 제기됐다. 전·현직 직원의 자녀를 무기계약직으로 특혜 채용했다는 지적이다. 유민봉 자유한국당 의원에 따르면, 교통공사 처장 D씨 아들은 역무지원 업무직으로, 센터장 E씨 아들은 안전 업무직·지하철 보안관 분야 무기계약직으로 입사했다. 정규직으로 입사하려면 전공과목과 영어 시험 등 채용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무기계약직은 면접 절차만 거쳤다. 특히 무기계약직으로 채용된 이들은 서울시 방침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될 예정이라는 게 유 의원의 설명이다.

 

공공기관 부정 채용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불거졌지만 매번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정권 창출의 공신들이 ‘낙하산’으로 공공기관장과 감사에 임명되면서 소관 부처나 감사기관들마저 채용 비리를 사실상 묵인해 관행처럼 반복된 셈이다. 한 취업준비 모임 회원은 “이러니 평범한 사람들이 들어갈 회사가 줄어드는 것 아니냐”며 “인턴을 하고 자격증을 따며 취업을 준비하다가도 이럴 때 정말 힘이 빠진다”고 토로했다.

 

시민단체 회원들이 9월25일 강원랜드 채용 비리 의혹을 받고 있는 권성동·염동열 자유한국당 의원을 고발했다. ⓒ 사진=연합뉴스

 

文 대통령 “반칙과 특권의 상징…전수조사”

 

채용 비리 문제는 단지 몇 사람에게 특혜를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합격 인원은 한정돼 있는데, 그 자리에 누군가 대신 들어오면 합격될 사람이 떨어지는 경우도 생긴다. 특정인을 합격시키기 위해 서류평가와 면접평가에서 점수를 조작해 실제로 합격권에 있던 이들이 탈락하는 일도 있었다. 일부 기관은 특정인 채용을 위해 전형별 기준을 인위적으로 수정하면서 수많은 지원자들을 ‘채용 비리의 들러리’로 삼기도 했다.

 

문제는 특혜 채용 의혹이 제기되고 어렵사리 사실 관계가 밝혀진다 하더라도 바로잡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문제다. 감사원으로부터 부정채용 지적을 받은 공공기관들이 문제가 된 직원들의 합격을 취소한 경우는 없었다. 퇴사를 강요할 근거가 마땅히 없어서다. 감사원 및 각 기관 등으로부터 받은 부정채용 합격자 및 감사 후속조치 현황 자료에 따르면, 부정채용이 드러난 합격자 34명 가운데 28명은 여전히 책상을 지키고 있었다. 감사원 관계자는 “채용된 사람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이상 채용된 이들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잇따라 불거진 채용 비리 사태에 청와대도 칼을 빼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월23일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공공기관 채용 비리는 우리 사회의 만연한 반칙과 특권의 상징으로 보인다”며 “전체 공공기관에 대한 전수조사를 해서라도 채용 비리의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