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제왕은 ‘색마’였다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0.31 18:42
  • 호수 1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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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펼친 ‘성추행 스캔들’의 나비 효과

 

할리우드가 와인스타인의 이름으로 연일 뜨겁다. 여느 때 같았으면 북미 굴지의 영화 제작·배급사인 ‘와인스타인 컴퍼니’에서 발표한 신작 때문이었을 터.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 회사의 설립자이자 공동 회장인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행 스캔들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는 수십 년간 할리우드의 수많은 여배우와 자사 여직원들을 성추행·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피해자들의 증언이 빗발치고 있으며, LA와 뉴욕 경찰국은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와인스타인으로 촉발된 성추행 스캔들은 할리우드를 넘어 미국 사회 전반의 핵폭탄급 이슈가 되고 있다. 할리우드의 거물이 추락하며 불러온 거대한 태풍이다.

 

 

하루아침에 할리우드의 거물에서 괴물로

 

시작은 뉴욕타임스의 기사였다. 지난 10월5일(현지 시각) 보도는 1990년대부터 30여 년에 걸쳐 하비 와인스타인이 배우·회사직원·모델 등을 지속적으로 성추행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인용하며 ‘와인스타인이 피해 여성들을 호텔방으로 불러 마사지를 요구하거나, 자신이 목욕하는 장면을 지켜보라고 요구하는 등 변태적 행위를 해 왔다’고 보도했다. 또한 ‘피해 여성들은 업계에 막 진입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이 제안을 거절하면 업계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보도는 하비 와인스타인이 과거 최소 8명과 합의해 관련 고소를 막았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보도 당일 하비 와인스타인은 공식 성명을 통해 “동료들에게 많은 고통을 준 것을 인정하며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혔다.

 

익명에 가려 있던 피해자들은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와인스타인 컴퍼니의 직원들뿐 아니라, 최초 보도 당일에 언급된 애슐리 주드를 시작으로 안젤리나 졸리, 기네스 펠트로, 레아 세이두, 에바 그린 등 여배우들의 폭로가 줄을 이었다. 그중 기네스 펠트로의 증언은 와인스타인이 신인 배우의 커리어를 이용하려 했음이 드러나는 전형적 사례였다. 기네스 펠트로는 “와인스타인이 제작하는 《엠마》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뒤, 사전 미팅을 빌미로 호텔에 불려간 적이 있다”고 밝혔다. 마사지 요구를 거부한 그는 당시 남자친구였던 배우 브래드 피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당시 피트는 와인스타인에게 강력히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 © DPA연합


 

이후 이탈리아 배우이자 감독인 아시아 아르젠토는 CNN 보도를 통해 20여 년 전 하비 와인스타인으로부터 구강성교를 요구받았다고 주장하며, 비단 그의 범죄가 추행의 차원만이 아님을 공론화했다. 미국 잡지 ‘뉴요커’는 10월10일 보도를 통해 ‘1990년대부터 2015년까지 와인스타인으로부터 성추행 혹은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은 13명’이라고 밝혔다. 피해자들의 폭로가 줄을 잇자 와인스타인 컴퍼니는 10월8일 이사회를 열어 하비 와인스타인에게 해임을 통보했다. 이메일을 통해서였다. 회사의 공동 설립자이자 하비의 동생 밥 와인스타인 역시 형을 퇴출하는 데 동의했다. 이사회 임원진 일부 역시 책임을 통감하며 사임했다.

 

와인스타인 컴퍼니의 전신은 와인스타인 형제가 1979년 설립한 저예산 독립영화 제작·배급사인 ‘미라맥스(MIRAMAX)’다. 《펄프 픽션》(1994), 《굿 윌 헌팅》(1997) 등의 대성공을 이끌어낸 이 회사는 1993년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계열사가 되면서 승승장구했고, 이후 디즈니와의 갈등으로 2005년 분리하며 회사명을 와인스타인 컴퍼니로 바꿨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스티븐 소더버그 등의 감독을 발굴하고, 《잉글리시 페이션트》(1996), 《시카고》(2002), 《아티스트》(2011) 등을 오스카 작품상의 주인공으로 이끌었던 하비 와인스타인은 ‘아카데미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렸다. 그가 제작·배급에 관여한 영화 중 오스카 후보에 오른 영화는 300편 이상이다.

 

탁월한 안목을 지닌 제작자인 한편 악명도 높았다. 특히 해외 영화의 경우 북미 시장 관객의 입맛에 맞게 마음대로 편집권을 휘두르기 일쑤였다. 봉준호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인 《설국열차》(2013) 역시 편집 문제를 둘러싸고 한 차례 홍역을 겪은 바 있다. 이런 악취미를 일컬어 와인스타인에게는 ‘가위손 하비(Harvey the scissorhand)’라는 별명이 붙었다. 

 

 

제임스 토백 등 ‘제2의 와인스타인’ 폭로 봇물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행 스캔들이 더욱 큰 충격을 안긴 이유는 그가 대외적으로 페미니즘을 지지해 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와인스타인은 2015년 대학 내 성폭력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더 헌팅 그라운드》를 배급했고, 한 대학에 페미니즘 관련 수업이 개설되도록 기부금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 차기작 중에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변호를 도맡은 것으로 명망 높은 여성 변호사 리사 블룸의 전기 영화도 있었다. 와인스타인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민주당 후보 시절 거액을 기부한 민주당의 대표적 후원자이기도 했다. 사건 보도 이후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은 즉각 와인스타인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비 와인스타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회사 직원 미미 할레이, 전 배우 헤더 커, 배우 도미니크 휴엣, 시나리오 작가 겸 배우 루이제트게이스(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 AP·EPA·UPI연합


 

사태의 양상은 미국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메릴 스트립, 주디 덴치를 위시한 여배우들의 지지 성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벤 애플렉 등 남성 영화인들 역시 꾸준히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배우 알리사 밀라노는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서 성폭력 고발 캠페인 ‘미투(#Metoo)’를 진행하고 있다. 가수 레이디 가가 등 유명 인사를 포함한 피해 여성들이 자신의 과거 사례를 폭로하기 시작했고, 이 캠페인은 전방위로 퍼져나가며 반향을 얻고 있다. ‘제2의 와인스타인’ 사례도 쏟아지고 있다. LA타임스는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이자 작가인 제임스 토백이 38명의 여성들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했음을 보도했고, 배우 리즈 위더스푼은 16세 때 영화감독에게 성폭행당한 사실을 폭로했다. NBC보도에 따르면, 민주당 소속 일부 의원들을 포함한 정계 인사들도 폭로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와인스타인 컴퍼니라는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빠르게 사라질 예정이다. 회사의 지분 일부가 매각될 것이라는 보도 역시 흘러나오고 있다. 미국제작자협회(PGA)가 와인스타인의 징계 절차 논의를 시작했고, 아카데미상 수여 단체인 미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그를 영구 퇴출했다. 할리우드의 ‘와인스타인 지우기’가 시작된 것이다. 할리우드를 쥐락펴락하던 거물급 인사에서 추악한 범죄자로 전락한 하비 와인스타인. 그가 의도치 않게 몰고 온 태풍은, 언젠가는 마땅히 밝혀져야만 하는 수많은 가려진 진실들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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