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한용운이 있다면, 미얀마엔 우 옥다마가 있다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前 KBS PD ()
  • 승인 2017.11.08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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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힝야족의 근거지 라카인주에서 ‘미얀마의 간디’로 추앙받는 우 옥다마



​미얀마의 실질적 통치자인 아웅산 수지 국가자문역이 최근 로힝야족을 처음으로 직접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얀마 정부와 군의 로힝야족 탄압에 대해 무대응으로 일관해온 데 대해 국제사회 비난 여론이 비등해지자 이를 의식한 행보로 풀이된다. 이렇듯 이제 로힝야족 난민사태는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뉴스로 부각됐다.

 

수지 여사가 로힝야족을 찾아 방문한 곳은 바로 미얀마 서부에 위치한 라카인주(州)다. 라카인주는 로힝야족의 근거지로 알려졌다. 미얀마군과 로힝야족 반군 간 유혈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로힝야족 사태로 인해 라카인주 또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 장소가 됐다.

 

그런데 라카인주에는 이곳 국민들로 부터 ‘미얀마의 간디’로 추앙받는 우 옥다마(U ottama, 1879-1939)란 인물이 있다. 그는 미얀마 식민지 시대의 승려이자 독립투사였다. 국내에선 낯선 이름이지만, 만해 한용운과 그는 여러 면에서 상당한 공통점을 보인다. 시대를 앞선 선각자이자 사상가이기 때문일까. 필자는 우 옥다마를 보면 볼수록, 만해 한용운 선생을 떠올리게 된다.

 

 

군의 로힝야족 '인종청소'를 방치했다는 비판을 받아온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가운데) 국가자문역이 2일 사태 발생 2개월여 만에 처음 현장을 찾기 위해 라카인주 시트웨 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식민 투쟁을 펼친 두 스님의 ‘불꽃같은 삶’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당시 버마로 불렸던 미얀마와 한국에서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대규모 시위를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1919년 3·1 만세운동이, 미얀마에서는 1920년 양곤대학생들의 집단휴학동맹이 펼쳐졌다. 그리고 1923년 1월에 미얀마인 총연합회(GCBA)가 주도한 총파업이 벌어졌다. 미얀마와 한국 각지에서 식민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인한 유혈 사태가 발생했고, 그것은 결국 무장 독립투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두 스님은 동시대에 너무나 닮은꼴의 인생행로를 걷게 된다.
 
먼저, 행동으로 독립투쟁에 앞장선 점을 들 수 있다. 한용운은 3·1운동의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만세시위에 가담하다 체포되었다. 2년 10개월 동안 복역하고 출옥한 후에도 강연과 기고, 문학작품 등을 통해 투쟁을 지속했다. 1926년에는 6·10 만세 사건의 예비검속 대상으로 검거되었고, 1937년에는 불교 항일운동인 만당(卍黨)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한용운이 3·1운동으로 경성감옥에 수감 중이던 1921년 3월, 우 옥다마도 승려로는 처음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식민통치 정부의 과세정책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고 당시 영국 총독인 레지날드 크래독에게 “집으로 돌아가라(Craddock, get out)”는 공개서한을 신문에 게재한 사건 때문이었다.

 

1년여 만에 풀려난 후, 1924년에는 납세거부운동으로 2년 반 동안 복역했고, 1927년에는 반식민지 활동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우 옥다마도 만해처럼 체포와 구금을 여러 차례 반복한 ‘행동하는 종교인’이었다. 집회 현장에서 빼어난 언변으로 좌중을 사로잡는가 하면, 시대를 꿰뚫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기고 및 저술 활동을 활발하게 펼친 것도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 빼놓을 수 없다.

 

5000만명이 넘는 인구 중 약 90%가 불교도인 미얀마. 남성들은 대체로 8살 이후 사원에서 동자승으로 수행(修行)하며, 대부분의 미얀마인들은 집안에 불상을 모셔두고 하루 두 차례 공양을 한다. 불교는 미얀마인들의 정신적인 지주이며 생활의 근간이다. 1886년 미얀마를 점령한 영국은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분리통치정책(divide & rule)을 폈다. 주로 북부 산악지역에 사는 까친족·친족과 서남부 지역의 까옌족 등의 소수 민족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인구의 70% 정도를 차지하는 미얀마족과 소수민족 간에 종교적 갈등을 야기시켜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려는 술책이었다.

 

불심을 자극하는 영국에 대항해 20세기 초반부터 미얀마에는 ‘불교 민족주의’가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인도 유학에서 돌아온 우 옥다마는 “정부가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말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참고 가만있지 말라.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때 독립이 주어지는 것이다”라며 승려로는 처음으로 정치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1930년대 중반에 아웅 산 장군을 비롯한 신진 민족주의 정치세력이 등장하기 전까지, 탈식민지 독립운동은 우 옥다마를 비롯한 불교 민족주의자들의 몫이었다.

 

우 옥다마(왼쪽)·만해 한용운

 

“국민이 노예이면, 그들이 믿는 신도 노예가 된다”

 

영국이 기독교를 도입해 미얀마인들의 분열을 꾀한 반면, 일제는 일본 조동종(曹洞宗)을 앞세워 ‘불교계 한일합방’을 시도했다. 그때 만해는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며 통합 반대에 앞장섰다. 사찰을 조선총독부에 예속시키는 ‘사찰령’의 폐지도 요구했다. 또 교계의 무능을 규탄하고 개혁을 촉구하기도 했다. 1913년에 펴낸 《조선불교유신론》에서는 “훌륭하게 유신하는 자는 훌륭하게 때려 부수는 자이다”라며 기존 교계의 혁명적 변혁을 요구했다. 불교의 구세(救世)적 사명을 위해 산속에서 도시로 나와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우 옥다마는 “교단은 민중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라며, “우리나라가 노예상태가 되면 우리 국민도 노예가 되고, 우리가 믿는 부처님도 노예가 된다. 노예 종교에서 벗어나려면 승려들도 절에서 잠만 자지 말고 현실에 참여해야 한다”면서 ‘참여 불교론’을 설파한다. 이처럼 두 사람은 교단의 개혁과 사회참여를 촉구하며 제국주의 침탈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두 사람은 청년들에게 민족의 미래가 달려있음을 강조했다. 만해는 젊은이들이야말로 후대에 행복한 유산을 물려줘야 할 사명이 있는 ‘시대의 행운아’라며, 지식과 재능이 있는 젊은이들을 양성할 것을 주장했다. 1914년에는 포교의 보편화·대중화를 선언하고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한다. 불교 대중화의 첫걸음으로 청년운동이라는 신념을 실천한 것이다. 이후 1924년에 불교청년회 회장, 1930년에는 김법린 등의 청년 승려들이 결성한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만당’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우 옥다마는 1916년 영국인들이 불교사원에 신발을 신고 들어온 사건을 계기로 반식민지 투쟁을 전개한 ‘불교청년회(YMBA)’를 이끌었다. 1920년에 일어난 미얀마 최초의 학생운동과 1935년에 양곤 대학생들이 주도한 ‘주인의식을 가진’ 따킨당(黨)의 설립도 지원했다.

 

근대적인 세계관을 수용하려는 노력도 공통점으로 들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해외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외국 문물과 사상을 배우려 한 점이 눈에 띈다. 우 옥다마는 1907년 2월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2014년 미얀마에서 발간된 《큰 스님 옥다마》란 책에는 미얀마를 여행한 2명의 일본인 승려들이 초청한 것으로 적혀 있다. 교토 니시혼가지(西本願寺)의 불교학아카데미에서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친 우 옥다마는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쑨원(孫文)과 교제하며 국제정세를 논의했다. 1910년 한일병탄이 되던 해에 한국을 방문했고, 이어 만주·중국·베트남·인도 등을 여행했다. 1923년에는 영국·프랑스·스웨덴 등 유럽 각국을 방문했다.

 

만해도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러시아를 시작으로 일본·만주를 차례로 여행했다. 그러나 만주에서 일제의 첩자로 오해받아 총상을 입는 사고를 겪으면서 해외여행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해는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교토 등지를 둘러보았다. 방문 목적에 대해서는 ‘비단 불교문화만이 아니라 새 시대 기운이 융흥하고 있다는 일본의 자태를 보기 위함’으로 밝힌 바 있다. 새로운 문물에 대한 동경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도쿄에서는 조동종 대학림에서 4개월 정도 체류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비슷한 시기에 우 옥다마도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1910년경에는 똑같이 만주를 여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직까지 두 스님이 만났거나 교류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비슷한 사상과 배경을 가진 이방인 스님들이 같은 시기에 같은 하늘 아래 있었다는 사실은 우연이기보다는 만해의 시 제목처럼 ‘인연’이 아닐까 싶다.

 


1879년 같은 해에 태어난 두 스님의 ‘인연’

 

근대성 수용 측면에서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 주목되는 부분은 물산장려운동과 대학설립을 들 수 있다. 만해는 3·1운동으로 체포되어 출옥한 후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고, 민립대학 설립을 주장하는 강연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우 옥다마도 인도 간디의 불복종운동에 영향을 받아 외국물품 불매와 국산의복 애용운동을 주도한다. 또 식민 교육체계가 아닌 주인의식을 심어주는 학교 설립을 제안하고, 그 결과 영어가 아닌 자국어로 교육하는 민족대학들이 생기게 되었다.
 
끝으로, 1879년 같은 해에 출생했다는 사실이 두 스님의 ‘인연’의 깊이를 더욱 느끼게 한다. 우 옥다마는 1936년에, 한용운은 1944년에 각각 입적(入寂)함으로써 두 분 모두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했지만 마지막까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삶을 산 점도 같다.

 

암울한 식민지 시대의 승려이자 독립투사·사상가·선각자로서 닮은꼴의 삶. 로힝야족 난민 문제로 인한 국제사회의 비난 속에 미얀마 정부는 어떤 해법을 낼 것인가. 또 북핵(北核)으로 인한 한반도 최대의 위기 속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슬기롭게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100년 전 식민지배 아래에서 종교를 넘어 민족의 지도자로 활동한 두 스님은 이런 상황에서 과연 어떤 혜안(慧眼)을 보여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앞으로 두 분의 행적과 사상을 비교, 연구하는 뜻 깊은 논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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