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농담 또는 역설, 안티페미협회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2.19 14:54
  • 호수 1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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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서핑을 하다가 사진 한 장을 봤다. 점잖지 못한 표현을 좀 하자면, ‘빵’ 터졌다. 그 사진엔 ‘안티페미협회’라는 모임의 회원들이 마스크를 쓰고 시위를 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들이 든 플래카드엔 “통계조작, 혈세도둑, 페미·여성계는 해산하라/페미니즘은 인권평등이 아니라, ‘변종 맑시즘’입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반동 없는 역사가 어디 있겠냐마는, 메갈리안 운동의 눈부신 성과는 이렇게 코믹한 반동을 낳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이 장면은 명백히 여성계 시위에 대한 자기들 나름의 ‘미러링’이다. ‘미러링’은 메갈리안 운동의 매우 성공적 전략이었다. 공격당하는 자가 공격하는 자를 되비춰 보여줌으로써 그 우스꽝스러움이나 잔인함, 기타 문제적 모습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일종의 성찰 촉구 방법이다. 소위 ‘여혐’에 대한 미러링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여혐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고정관념이 혐오발화를 하는 특정 개인의 실질적 권력이 아니라는 점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뒤집는 것이 아니다. 나는 ‘미러링’이 고도의 지성을 요구하는 영리한 전략이어서 함부로 쓸 것이 못 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대표적 실패 사례가 바로 이 마스크와 플래카드가 아닌가 싶다. 웃게 만든다.

 

12월10일 안티페미협회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페미·여성계 해산 등을 촉구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저 시위가 뜻하는 바는 “우리(안티페미협회까지 결성하고 싶어지는 우리)는 졌다”라는 말이다. ‘맑시즘’에 대한 이미 한물가버린 공포를 일깨우고자 애쓰고, 통계조작이니 혈세도둑이니 하는 상투적 공격어를 차용함으로써 특정 정치적 입장을 지닌 것처럼 보이려 수고한다.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라는 키케로의 방식대로, 페미니즘을 이길 수 없으니 여성부와 여성단체의 정체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시위는 약자의 도덕적 무기다. 지는 싸움일 수밖에 없음에도 미래는 정의의 편임을 믿는 사람들의 무기. 단지 피켓 들고 외치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참 궁금한 것이 있다. 페미들을 욕하고 여성부를 해체하면 남성들에겐 뭐가 좋아지나?

 

페미니즘은 실존하는 고통을 줄여나가기 위한 정치운동이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미덕은 “세상 모든 근심을 민주주의가 다 감당할 순 없어도 차별받아 억울한 사람은 없게 하리라”가 아닐까. 세상을 지탱하는 이분법의 아랫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뿔뿔이 나뉘어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여성들이 차별과 억압에 맞서 승리하는 중이다. 저 플래카드 문구가 제시하고 있는 바로 그 ‘인간평등’이 실제로는 얼마나 어려운지, ‘인간’이라는 기표를 독점한 남성들이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폭로함으로써 잠들었던 양심을 일깨우는 데 성공했다.

 

페미니즘을 이념적으로 반박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개별적으로 특정 페미니스트의 주장을 반박할 수도 있고, 특정 여성의 잘못을 공격할 수도, 여성들의 모임을 방해하고자 난동을 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성차별이 야기하는 불행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그 방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나의 차별은 다른 차별을 반드시 불러온다. 차별이 인간 세상에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 차별의 윗단에 있음으로써 발생한 이득을 포기하고자 할 때 그가 만나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 부러운 일을 안 하고자 시위까지 하다니, 아, 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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