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삼성물산, 적법 절차 거치지 않았다” 첫 제동
  • 송응철 기자 (sec@sisajournal.com)
  • 승인 2018.01.24 14:02
  • 호수 147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삼성물산 재건축 수주 위법성 확인…현재 진행 중인 검찰수사에도 영향

 

#정년퇴직한 대학교수 A씨는 자신이 살던 서울 강남구 개포동 시영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면서 유서를 남겼다. 그는 삼성물산의 시영아파트 재건축사업 시공사 선정 과정의 의혹을 제기해 온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고소·고발을 당한 그는 경찰 조사를 앞둔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A씨의 가방에서는 8장 분량의 유서가 발견됐다. 삼성물산이 구청 공무원들과 결탁해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재건축사업을 수주했다는 내용이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청실아파트 재건축조합 조합원이던 B씨도 A씨와 비슷한 의혹을 제기하다 힘든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회유가 있었다. 향후 공사가 진행되면 이권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회유책이 통하지 않자, 하청업체 대표를 동원해 협박을 한 일도 있었다. 종국엔 삼성물산 임원이 직접 나섰다. B씨는 자신이 회유에 응하지 않자, 삼성물산 임원으로부터 입에 담기 어려운 폭언을 들었다고 했다. 결국 B씨는 삼성물산으로부터 명예훼손과 영업방해 혐의로 고소를 당하는 등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

 

#서울 송파구 신천동 진주아파트 조합원들은 삼성물산이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행사를 방해했다며 분개했다. 문제는 삼성물산이 서울의 한 호텔에서 진행한 사업설명회 당일 벌어졌다. 설명회가 끝나고 마련된 질의응답 시간에 조합원들은 연단에 올라 삼성물산의 시공사 선정 문제를 놓고 집단 반발했다. 그러나 곧 장내는 혼란에 빠졌다. 갑자기 조명과 마이크 전원이 모두 꺼졌기 때문이다. 이 틈을 타 삼성물산 직원들은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조합원들이 호텔에 불만을 제기하자 삼성물산 직원이 설비실에 와서 전원을 차단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에 위치한 삼성물산 건설부문 © 시사저널 임준선

 

계속 불거진 재건축사업 편법 수주 의혹

 

모두 삼성물산이 관여된 강남권 재건축사업장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과열 양상인 재건축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리수’로만 치부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관리의 삼성’이라는 그룹의 별칭과도 동떨어진 행보다. 앞서 시사저널은 삼성물산이 강남권 일대의 재건축사업을 수주하는 과정에서 위법과 편법을 동원한 의혹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시영아파트·대치동 청실아파트, 서초구 서초동 우성1차아파트와 송파구 신천동의 진주아파트 등 본지가 확인해 보도한 사례만 모두 4건이다(제1399호 [단독] ‘삼성물산, 강남 일대 1조7000억원대 재건축사업 부당 수주 의혹’ 참조).

 

논란의 중심에는 2003년 7월 시행된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이 있다. 경쟁입찰을 통해 재건축사업 시공사를 선정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률이다. 도정법은 법 시행 이전의 수의계약을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인정하는 예외규정을 뒀다. 2002년 8월9일까지 조합원 절반 이상의 동의를 얻은 뒤, 2003년 8월31일까지 규정 서류를 갖춰 관할 당국에 신고한 경우에 한해서다. 이를 이용해 삼성물산은 이미 2003년 8월 이전에 관할 당국에 복수의 강남권 재건축사업의 시공사 선정 신청을 마무리했다. 문제는 조합이 시공사 선정을 위한 서류를 내주지 않거나, 조합원 절반 이상의 동의라는 예외규정 요건을 만족하지 못했음에도 편법을 동원해 관할당국에 시공사 선정 신청을 마쳤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조합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수의계약으로 시공사를 선정할 경우 경쟁입찰에 비해 높은 추가분담금이 책정되는 등 조합원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갈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진주아파트를 제외한 모든 사업장은 삼성물산을 시공사로 해서 공사를 마무리한 상황이다. 다른 사업장 조합원들은 관할당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등 극렬히 반대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성물산의 시공사 선정을 취소할 경우 공기지연 등으로 인해 조합원 피해가 더욱 커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삼성물산의 재건축사업 수주 비리 의혹은 이렇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으로 보였다.

 

재건축사업이 진행 중인 서울 송파구 진주아파트 © 시사저널 고성준

 

법원 “삼성물산 수주 적법한 절차 안 거쳤다”

 

이런 가운데 최근 삼성물산의 편법 시공사 선정 이슈가 재부상했다. 삼성물산의 시공사 선정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취지의 법원 판결이 나오면서다. 시사저널은 지난해 12월 진주아파트에서 벌어진 불법 수주 의혹에 대해 보도한 바 있다([단독]‘삼성물산, 송파구 9000억원대 재건축사업 또 불법 수주 의혹’ 참조). 전체 조합원 1608명 가운데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610명의 동의만 얻었음에도 송파구청에 시공사 선정 신청을 해 놨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특히 조합은 정식 인가가 나기 전인 2013년부터 시공사를 공개 경쟁입찰을 통해 선정키로 한 상황이어서 조합원들의 반발은 상당했다.

 

이런 본지 보도 이후에도 조합은 삼성물산의 시공사 선정을 강행했다. 지난해 12월25일 관리처분인가를 위한 임시총회 때 시공사 도급계약을 체결하려 한 것이다. 일부 조합원들은 삼성물산과의 수의계약을 막기 위해 12월15일 서울동부지방법원에 총회개최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조합은 재판부에 삼성물산의 시공사 선정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2002년 6월 창립총회에 참석한 603명 외에도 서면결의서와 추가 시공사 선정 동의서를 받아 전체 조합원의 절반 이상인 822명의 동의를 얻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면서 172명분의 시공사 선정 동의서와 인감증명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조합원들의 손을 들어줬다. 삼성물산 시공사 선정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단 조합 시공사 선정 동의서를 제출한 시점을 명시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특히 조합이 2003년 7월 발행한 소식지를 통해 시공사 선정 동의서를 추가 모집한 점에 주목했다. 이때까지 ‘조합원 과반수 이상 동의’라는 예외규정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조합이 제출한 인감증명서 가운데 두 건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재건축 결의용’이나 ‘골프장 회원권 구매용’ 등 ‘시공사 선정 동의용’이 아니었다.

 

이번 판결로 삼성물산은 사실상 진주아파트 재건축사업 시공사 지위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사업비 9000억원대의 ‘대어’를 놓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법원의 판단이 현재 진행 중인 검찰수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조합원들은 앞서 대검찰청에 삼성물산의 부당한 시공사 선정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한 바 있다. 현재 사건은 서울동부지방검찰청에 배정된 상태다. 삼성물산과 조합은 또 재판 과정에서 불거진 사문서 위조 및 행사 등의 혐의와 관련해서도 추가 고소를 당했다. 조합원들은 재판부에 제출된 인감증명서의 기명자들로부터 ‘시공사 선정 동의용’으로 인감증명서를 내주지 않았다는 취지의 확인서 50여 장을 확보해 검찰에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돼 2017년 2월28일 구속기소됐고 같은 해 8월25일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 시사저널 임준선

 

관리의 삼성, 계속 논란 불거지는 이유는

 

눈여겨볼 대목은, 일련의 사태가 벌어지거나 외부로 알려진 시기가 2015년 무렵이라는 점이다. 제일모직과의 합병으로 삼성물산이 삼성가(家) 승계의 핵심으로 부상한 해이자, 건설부문의 계속된 축소가 이뤄진 때이기도 하다. 오랜 침체기를 거친 국내 분양시장은 2014년 하반기부터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삼성물산은 이때부터 신규 수주에 전혀 나서지 않고 있다. 사실상 수주잔고로만 버티고 있는 상태다. 대대적 구조조정을 통해 직원 수도 대폭 감원했다. 이로 인해 삼성물산의 수주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삼성물산이 주택건설사업에서 철수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조직의 지위도 당초 부회장이 총괄하는 ‘주택부문’에서 ‘주택사업본부’로, 지난해엔 ‘주택사업팀’으로 격하됐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의 축소가 ‘이재용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삼성물산이 그룹의 사실상 지주사 위치에 오른 상황에서 건설부문은 특유의 리스크가 많아 정리에 나섰다는 것이다. 삼성에 정통한 관계자는 “삼성 수뇌부에서는 삼성물산 주택사업이 그룹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함에도 불구, 입주자들의 시위나 각종 인·허가 비리 등으로 글로벌기업을 추구하는 삼성의 기업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이 부회장이 주택사업을 비주력 사업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향후 전자·금융·바이오 3대 축을 제외한 나머지 사업부문은 축소하거나 정리할 계획이라는 얘기가 그룹 내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렇다 보니 삼성물산으로서는 기존에 수주한 사업을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삼성물산의 무리수를 견제할 리더십이 부재했다는 점이 화를 키운 원인으로 지목된다. 삼성물산은 수년째 그룹 차원의 관리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와병 중이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돼 계속 수사를 받아오다 현재는 구속된 상태다. 이 과정에서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던 미래전략실마저 해체됐다. 이재용 부회장의 형제(이부진·이서현)들은 다른 계열사 경영에 주력하는 상황이다. 그만큼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그동안 ‘관리 밖’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