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삶을 마감할 마지막 권리
  • 노진섭 기자 (no@sisajournal.com)
  • 승인 2018.01.25 17:34
  • 호수 147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터뷰] 연명의료결정법 초안 만든 허대석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

 

43세의 한 남성이 위암 진단을 받았다. 암이 뼈와 폐로 번져 수술은 어려웠고, 1년 동안 항암치료를 받았다.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 듯했지만, 그 뒤 약에 내성이 생겨 암은 서서히 악화했다. 호흡곤란 상태까지 이른 환자는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시설에서 편안한 최후를 맞길 원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반대했다. 치료를 중단하면 한(恨)이 될 것 같다는 이유였다. 의료진은 회생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가족의 뜻에 따라 연명 치료를 계속했다. 결국, 그는 가족도 없는 중환자실에서 홀로 죽음을 맞았다.

 

이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기 싫은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지만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 환자는 병원 중환자실에서 외로운 사투를 벌인다. 심장박동이나 호흡수를 측정하기 위한 기계장치에서 나오는 삑삑거리는 소음, 가래를 뽑아내는 시끄러운 소리, 다른 환자들의 앓는 소리 등으로 중환자실의 환자는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수십 년을 동고동락해 온 가족과는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한다. 가족은 사망 연락을 받은 후 병원에 와서 시신을 수습한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환자는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퇴원할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는 달라진다. 2월4일 시행되는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환자는 자신의 요구에 따라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퇴원해 가족과 함께 임종을 맞을 수 있다. 이 법의 핵심은 편안한 임종을 맞을 권리를 환자 본인에게 부여한 것이다. 법에서 정한 연명의료는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시도하는 심폐소생술·인공호흡기·혈액투석·항암제투여 등 4가지 의료행위를 말한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연명의료결정법 초안을 만드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서울대병원 암센터 소장, 호스피스실장, 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수많은 말기 암 환자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허 교수는 “매장 문화가 화장이나 수목장 등 여러 형태로 진화했듯이 임종(臨終) 문화도 다시 생각해 볼 시점”이라며 “삶의 마무리를 가족과 함께하는 임종 문화를 미풍(美風)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 © 시사저널 고성준

 

연명의료결정법이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과거에는 객사(客死)를 금기시했다. 1980년대만 해도 입원해서 투병 중이라도 임종이 임박하면 집으로 와서 생을 마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을 손자와 손녀가 지켜봤다. 1990년대 이후 가족 구성의 변화, 의료기술의 발달 등으로 병원에서 ‘객사’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조사해 보니,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사람은 16%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집에서 삶을 마무리하길 원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질병으로 사망하는 사람 25만 명 가운데 74.9%는 병원에서 임종한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생을 마감하는 사람은 15.3%뿐이다. 자신이 죽고 싶은 곳에서 임종을 맞지 못하는 현실이다. 미국 등 외국에서는 집이나 호스피스 시설에서 최후를 맞는 일이 일반적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임종에 다다라서 연명의료를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존엄사에 관한 얘긴데, 병원이 아닌 집이나 호스피스 시설에서 사망하면 존엄사인가.

 

“모두 편안한 임종을 원한다. 흔히 생각하는 편안한 임종이란 육체적으로는 고통이 없고, 영적으로는 한이 없어야 한다.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연명의료란 중환자실에서 각종 기계장치에 의존한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또 우리 문화 특성상 한을 품고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말기 암 환자를 만나보면, 그들의 인간관계에 상처와 고통이 많다. 이를 치유하고 가야 한다. 그러려면 임종 2~3개월 전이라도 가족과 환자가 함께 보낼 시간을 가져야 한다. 손도 잡고, 울기도 하고,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야 한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집이든 호스피스 시설이든 가족이 함께할 시간이 필요하다.”

 

 

연명의료 결정을 어떻게 하나.

 

“건강할 때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중환자라면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하면 된다. 환자가 임종 단계에 접어들면 이 서류에 따라 의료진은 연명의료를 중단한다. 만일 이런 서류가 없다면 가족의 합의로 연명의료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환자는 연명의료를 원해서 관련 서류를 작성했지만, 가족이 반대하면 어떻게 하나.

 

“가족보다 환자 본인의 결정권을 존중한다는 게 이 법의 취지다. 그럼에도 가족이 연명의료 중단을 반대하면 의사·종교인·법률인 등으로 구성된 병원 윤리위원회에서 심의해 결정한다. 가족이 이 결정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법적 분쟁으로 해결해야 한다.”

 

서울대병원 중환자실.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사례가 질병으로 사망하는 환자의 74.9%에 달한다. © 사진=연합뉴스

 

 

이런 경우 외국에서는 어떻게 하나.

 

“유럽과 일본은 다르다. 환자가 작성한 서류가 없고 의식도 없어서 자기 뜻을 표현할 수 없을 때 고통 없는 죽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따른다. 즉 환자의 관점에서 무엇이 최선일지를 의료진과 가족이 상의해서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라는 말 자체가 어렵고 구분도 쉽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입법 관계자들이 법을 너무 촘촘하게 만들다 보니 서식 용어나 작성 과정이 까다로워졌다. 법과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모두 합하면 40페이지가 넘는다. 너무 복잡한 법이 나왔다. 미국이나 일본은 1~2페이지짜리 법이다. 그 나라는 ‘해서는 안 되는 것’만 법으로 정해 놓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알아서 하도록 했다. 우리는 반대로 ‘할 것’만 정해 뒀기 때문에 그 외의 것은 현장에서 할 수 없다.”

 

 

기존에 병원에서 사용하던 DNR(심폐소생술금지) 동의서가 있는데 굳이 다른 서류가 필요한가.

 

“DNR은 심정지라는 특수 상황에서 의료기관이 임의로 사용해 온 서식이어서 법적 효력이 없다. 2월4일부터 법적 효력을 갖는 서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다.”

 

 

연명의료 중단을 요구할 수 있는 환자는 누구인가.

 

“미국은 1970년대, 대만은 2000년, 일본은 2007년 관련법을 시행했다. 모두 회생 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를 대상으로 한다. 우리보다 앞서 이 법을 만든 나라의 사례를 볼 때 회생 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의 연명의료 중단 결정에 대한 논란은 거의 없다. 게다가 우리는 더 보수적으로 접근해서 말기 중에서도 임종 단계(임종기)의 환자만 법 적용 대상으로 삼아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하도록 했다. 미국과 유럽은 그 대상을 식물인간 상태까지 확대했다. 식물인간 상태에서 회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말기와 임종기는 구분되나.

 

“의학적으로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외국은 임종기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모두 말기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임종 직전의 환자에게만 이 법을 적용하므로 임종기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말기라면 암 환자만 법 적용 대상인가, 불치병 말기도 포함되나.

 

“매년 사망하는 사람 28만 명 가운데 사고나 자살을 제외한 25만 명은 질병으로 삶을 마감한다. 이 중 암 환자는 7만4000명이고 나머지는 만성질환 환자다. 불치병도 말기라면 법에 따라야 한다. 말기가 아닌 불치병인 경우까지 이 법을 확대 적용할지는 숙제다. 예컨대 선천성 기형아를 어디까지 교정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나라가 고민한다.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아이의 심장은 뛰는데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라매병원과 세브란스병원 사례(상자기사 참고)를 보면, 이 법이 의사의 책임회피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의사는 법적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방어적 의료행위를 하게 됐다. 이후 세브란스병원 사례가 나오면서 법 제정의 필요성이 부각됐다. 논쟁을 거치는 20년 동안 많은 국회의원이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존엄사를 인식했다. 그래서 2016년 국회 본의회 재석의원 203명 중 기권 1명을 제외한 전원이 법 제정에 찬성했다. 이것은 아무도 고통스러운 임종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합의라고 생각한다.”

 

 

연명의료 중단은 현대판 고려장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뇌졸중으로 의식을 잃고, 콧줄을 통해 영양분만 공급받으면서 10년씩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가 있다. 이른바 식물인간 상태다. 누가 봐도 회생 가능성이 없지만, 이 상태에 법을 적용하면 현대판 고려장 얘기가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이 법을 식물인간 상태에는 적용하지 않는다.”

 

 

법과 관련해서 국민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사회가 너무 의료 집착적이다. 항암제가 무의미하고 부작용만 생겨서 사용하지 말자고 하면 말기 암 환자나 가족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치료법이 어딘가에 있는데 의사가 찾아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 임상시험 등에 참여하다 고통과 부작용만 얻은 채 사망한다. 그 가족은 이럴 줄 알았으면 생전에 손이라도 잡고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때로는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내려놓지 않으면 잃는 게 많아진다. 임종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내려놓고 받아들이는 임종 문화를 미풍으로 삼아야 한다.” 

 

 

 

보라매병원과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 사례의 의미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기까지 분기점이 될 만한 사건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이다. 당시 한 환자가 뇌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로 연명하게 되자 그의 아내는 남편을 퇴원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의사는 ‘퇴원하면 환자가 사망할 수 있다’고 알렸지만 보호자는 퇴원을 강행했다. 이후 집에서 환자가 사망하자 보호자에게는 ‘살인죄’가, 보호자의 요구에 따라 환자를 퇴원시킨 담당 의사에게는 ‘살인방조죄’가 적용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두 번째는 2009년 연세대학교병원 ‘김 할머니’ 사건이다. 2008년 2월 폐렴 증세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사흘 뒤 폐 조직 검사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났다. 환자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자 인공호흡기를 적용했는데, 가족은 할머니의 연명의료를 중지해 달라며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냈다. 2009년 5월 대법원은 이를 인정해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도록 했다. 존엄사 권리가 법적으로 인정받은 국내 최초 사례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지할 수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이 2016년 만들어졌다.

 

세브란스병원 의료진이 2010년 김 할머니의 사망 경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