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주류로 진입하다!” 문재인 정부 新권력 ‘전대협’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8.02.05 09:19
  • 호수 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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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급진 과격 좌경세력’으로 평가받았던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 3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정치권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정치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전대협 세대는 주류가 됐다. 지금은 되레 한국 정치 시스템의 전면적 개혁을 외쳤던 전대협 세대에게 대한민국이 새로운 시대정신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전대협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전대협 세대를 만났다. 아울러 문재인 정부 핵심 권력으로 부상한 전대협 출신 정치인의 면면을 들여다봤다. 

 

영화 《1987》이 관객 수 700만 명을 돌파하면서 인기몰이 중이다.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민주화 열망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사회의 거대한 변화 물길을 만들었다. 87학번인 문대흥씨(전 강릉대 총학생회장·전대협 5기)는 최근 영화 《1987》을 보며 벅찬 감동에 휩싸였다. 마지막 부분에서 여자주인공 연희(김태리 분)가 서울시청 앞 광장 버스 위에 올라 거대한 군중을 목도하는 장면에서 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문씨는 “엔딩 곡으로 《그날이 오면》이 잔잔하게 흐르는 순간 ‘우리가 외쳤던 정의를 공감하고 진실과 가치를 공유하는 세상이 드디어 왔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며 당시 감정을 덤덤히 털어놨다.

 

1987년 6월 항쟁은 한국 사회는 물론 대학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만들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탄생이 바로 그것이다. 전대협이 우리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상당하다. 전대협 이전까지만 해도 학생운동은 학내 동아리가 주도하던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전대협이 결성되면서 대학 총학생회라는 합법적 기구를 통해 대중적으로 발전했다. 또 유신헌법 철폐, 노동생존권 보장 등에 국한됐던 의제를 민주정권 수립과 독재정권 타도와 같은 정치·사회 시스템의 전면 교체로 확대했다는 점에서도 전대협은 학생운동 대중화를 이끈 일등공신이다.

 

대학 총학생회 중심의 학생운동은 1983년 전두환 정권의 학원자율화 조치에서 출발한다. 1984년 고려대를 시작으로 어용조직인 학도호국단이 없어지고 난 뒤, 등장한 것이 총학생회다. 학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후 대학가는 1985년 4월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과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을 거치면서 조직화를 이뤘다. 이는 전대협을 만든 촉매제 역할을 했다. 1987년 7월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 장례를 치르기 위해 전국에서 올라온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전국 단위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해 8월 대전 충남대에서 전국 95개 대학 총학생회가 참여한 전대협이 결성됐다.

 

(왼쪽사진)1989년 6월10일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를 위한 가두 진출을 경찰이 원천봉쇄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 (오른쪽사진)2016년 11월2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5차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사진=사진공동취재단

 

학생운동 대중화 이끈 민주화 세대

 

‘구국의 강철대오’라는 기치 아래 전대협이 강조한 것은 자주, 민주, 통일이다. 이후 임수경 방북 사건과 같은 굵직한 시국사건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노선을 놓고 내부적으로 치열한 갈등을 벌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결과, 전대협은 출범 6년 만에 바통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넘겨주게 된다. 전대협의 퇴장은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해체로 급진적 통일운동 세력의 설 자리가 줄어든 게 가장 큰 이유다. 국내적으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군부’라는 타도 대상이 사라져 일반 시민과 학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한계를 보였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전대협이 다시 등장한 것은 2000년 16대 총선 때다. 당시 김대중 새천년민주당 총재의 추천으로 임종석 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전대협 출신들이 제도권으로 대거 입성한 것은 17대 총선 때다. 이인영·오영식·임종석 등 1·2·3기 의장을 비롯해 12명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전대협과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낸 전대협 세대에게 전대협 정치인은 양날의 칼이다. 보수언론이 정한 엄격한 도덕적 잣대는 전대협 정치인에게 늘 커다란 부담거리다.

 

전대협 정치인을 바라보는 전대협 세대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양대 부총학생회장을 역임한 최상명 우석대 공공인재학부 교수(전대협 1기)는 “전대협 정치인들이 국회에 입성할 때는 나름 선명성 때문에 ‘블루오션’과 같았는데 그 이후, 국가보안법 철폐와 같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도전하기보다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들의 도전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전대협 5기로 활동한 한 전대협 동우회 회원은 “전대협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대한민국 사회 개혁을 위한 자기희생인데 그건 사라지고 ‘선민의식’만 남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대협 정치인”이라고 비판했다.

 

과연 이 문제가 전대협 정치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전대협 세대 또한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부에선 현실이라는 높은 벽 속에 전대협 세대가 흡수됐다는 데 일정부분 공감한다.

 

그렇다면 30년이 지난 지금, 전대협 세대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지난해 7월 전대협 동우회 및 전국대학 민주동문회 소속 회원 42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는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민주화라는 결실을 만들어낸 집단답게 외교·안보나 경제, 복지 영역에서 전대협 세대는 진보적 색채가 강하다. 정치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 설문에 응답한 모든 이가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국가 단위 선거 투표에 100% 참여했다고 답했다.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킨 촛불시위에 참여했다는 응답도 94.1%에 달했다.

 

1988년 8월14일 연세대 교내에서 열린 8·15 남북학생회담 촉구 전대협 출정식 © 사진=연합뉴스

 

진보적 정치 색채 여전히 뚜렷

 

30년이 지난 지금 전대협 세대는 대한민국 주류로 성장했다. 정치권으로 흘러간 사람들은 지도부 일부다. 2004년 9월 시사저널이 전대협 동우회와 공동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전대협 동우회 회원 가운데 40%가 넥타이 부대가 됐다. 15%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학계(15%)로 진출한 이들도 상당하다. 2007년 월간 《말》이 전대협 1~3기 출신들의 직업을 분류한 결과, 정치권에 입문한 인사가 33.3%로 가장 많았지만 사업가(20.8%), 일반 직장인(14.6%), 전문직(22.9%)도 꽤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이들은 ‘애국적 사회진출’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회 각층으로 흩어져 나갔다. 사회 곳곳에서 시민사회운동이 빠른 시간 내 뿌리내리는 데 자양분 역할을 한 것도 전대협 세대다. 최근 들어선 지방 시민사회에서 활로를 모색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앞서 예로 든 문대흥씨가 바로 그런 경우다. 문씨는 서울에서의 광고기획사 PD 생활을 정리하고 강원도 동해로 내려가 묵호항 마을 만들기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그가 주도하는 마을 만들기 사업은 묵호항과 인근 묵호시장을 생태적 도시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일이다.

 

문화계도 마찬가지다. 단적인 예로 한국 포크음악과 대학 노래패의 정서를 조화시킨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만 해도 1984년 1집 음반을 냈지만, 1989년에 발매된 2집부터 대중성이 가미되면서 폭발력이 더해졌다.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사계》 《그날이 오면》 등은 모두 2집 앨범에 수록돼 있다. 아울러 한국 대중음악의 한 획을 그은 가수 김광석, 안치환의 음악적 뿌리도 전대협 세대와 연결돼 있다.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이전 세대보다 훨씬 강한 것도 전대협 세대의 특징이다. 지난해 촛불집회가 40~50대 중년들의 반란이라고 불렸던 것도 그 중심에 전대협의 시대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 전대협 동우회 회원은 “내가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민주주의가 더 이상 망가져서는 안 되며 더군다나 그것이 내 자식 세대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수많은 생각들이 모여 촛불을 들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송갑석 광주학교 교장(전대협 4기 의장)은 “전대협 세대가 1970년대, 80년대 초반 세대와 다른 점은 군부독재와 싸워 승리한 경험이 있다는 점이며 이 경험은 앞으로 한국 사회의 거대한 에너지로 분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숙제도 동시에 갖고 있다. 일각에선 사회 양극화에 있어 전대협 세대가 좀 더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더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치평론가 유창선 박사는 “화려했던 과거는 자신만의 훈장으로 삼고, 전대협의 대중운동 정신을 오늘날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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