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성가형’ 흙수저팀과 금수저 군단의 진검 승부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2.09 15:17
  • 호수 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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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전히 《하얀거탑》인가…병원 내부 권력투쟁 다룬 의료 드라마 교과서

MBC 《하얀거탑》이 무려 11년 만에 다시 방영되고 있다. 지난 2007년 방영됐던 것이 약간의 화질 보정 등을 거친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현시점에서 재방송되고 있는 것이다. 심야시간대도 아닌 주중 미니시리즈 시간대, 즉 방송사의 자존심이 걸렸으며 타 방송사와의 경쟁이 치열한 프라임 시간대에 이뤄진 일이다. 과거 사례를 봐도 매우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다시 있기 힘든 사건으로 보인다.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MBC 파업이다. 파업으로 분위기가 저조해진 조직을 정상화할 시간을 재방영으로 벌겠다는 것이다. 평창올림픽도 영향을 미쳤다. 올림픽 시즌에 돌입하면 어차피 화제가 올림픽 쪽에 집중되고, 특별중계에 따른 결방 등 파행 편성도 예측되기 때문에 재방영으로 올림픽 시즌을 피해 가겠다는 것이다.

 

MBC 드라마 《하얀거탑》 © MBC 제공

 

안판석 PD의 불멸의 명작

 

그러한 이유로 기존 드라마 재방영이 결정됐는데, 선택된 것이 《하얀거탑》이라는 점이 놀랍다. 최근 화제작들도 많은데 굳이 11년 전 작품을 소환해야 했을까? 11년이면 대중문화 트렌드가 여러 번 바뀔 시간이다. 극 중 인물들이 현재 익숙해진 얼굴과 다른 과거 모습이어서 이질감도 있다. 소품들도 지금 시점에서 보면 튄다. 무려 11년이나 지난 작품을 프라임 시간대에 다시 보는 시청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미지수였고 방송가의 관심을 모았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8회(과거 기준 4회)까지 방영된 지금, 시청률이 5%를 넘어 동시간대에 새로 시작된 KBS2 《라디오 로맨스》의 5.2%에 육박했다. 시청자 반응도 호평 일색이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현재적으로 느껴지며 웬만한 신작보다 낫다는 반응이다. 이러면서 《하얀거탑》이 재조명되고 있다.

 

《하얀거탑》은 1963년부터 일본에서 연재된 야마사키 도요코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2003년 드라마화된 것이 한국에 알려졌고, 한국에서 2007년 리메이크된 것이다. 일본 원작을 리메이크했지만 한국 작품의 완성도가 더 높다는 평이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드라마의 경쟁력을 확인시켜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안판석 사단의 힘을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안판석 PD는 2000년 MBC 《아줌마》를 통해 한국 지성계의 위선을 신랄하게 파헤쳤다. 번듯한 사회지도층이지만 평범한 아줌마보다 인격이 떨어지는 ‘장진구’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저게 바로 우리 지도층의 실상’이라고 공감했다. 그리고 2007년 《하얀거탑》이다. 2014년엔 재벌, 사학재단, 순수예술계, 교수 사회 등 상류사회를 현미경으로 보듯 들여다본 JTBC 《밀회》를 연출했다. 2015년엔 한국 사회의 새로운 권력으로 자리 잡은 대형 로펌 집안의 일상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그린 SBS 《풍문으로 들었소》를 연출했다. 모두 명작 반열에 오른 드라마들인데 《하얀거탑》이 이 중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최고의 대학병원인 명인대학병원이 배경이다. 장준혁(김명민)은 일반외과 부교수며 외과수술의 천재로 출세욕에 불타는 인물이다. 그는 의료권력인 명인대학병원 외과 과장 자리를 노린다. 현직 외과 과장인 이주완(이정길)은 자신을 따르던 장준혁을 배신하고 존스홉킨스의 노민국(차인표)을 후임 과장으로 만들려 한다. 장준혁과 이주완의 싸움은 집단전으로 비화해 장준혁은 의사협회 부회장인 장인과 의사협회 회장 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이주완은 병원 부원장과 외과학회장 등을 끌어들인다. 집단 대 집단의 권력투쟁이 된 것이다.

 

안판석 PD는 여기서도 상류층의 위선을 세밀하게 파고든다. 이주완 외과 과장은 대대로 의사를 하던 집안 출신으로, 처음부터 ‘하얀 거탑’ 안에서 태어난 일종의 귀족이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다. 속된 사람을 혐오하며, 그가 끌어들이는 그의 팀도 모두 매너가 몸에 밴 상류층이다. 하지만 그 상류층의 점잖음 속엔 노골적인 욕망이 숨어 있다.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비열한 짬짜미를 마다하지 않으며, 철저히 차별적이고 고압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장돼 있다.

 

《하얀거탑》은 또, 으레 사랑 타령으로 이어지던 의료 드라마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병원을 배경으로 의사 또는 간호사가 멜로를 펼치는 드라마가 그 전까지의 한국형 의료 드라마였는데 《하얀거탑》은 러브라인을 완전히 삭제했다. 빈자리를 채운 건 박진감 넘치는 수술 장면과 병원 내부의 권력투쟁이었다. 이것이 반복적인 설정의 한국 드라마에 식상했던 시청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하얀거탑》의 그림자는 너무나 커서 그 이후 방영된 대부분 의료 드라마에 이 작품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모두가 《하얀거탑》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MBC 드라마 《하얀거탑》을 연출한 안판석 PD © 사진=뉴시스

 

‘흙수저’ 장준혁의 욕망에 공감하다

 

《하얀거탑》에서 시청자의 가장 뜨거운 호응을 받았던 건 바로 주인공 장준혁이다. 그는 시골에서 태어나 힘들게 대학병원 부교수 자리까지 올라온 자수성가형이다. 흙수저의 성공신화인 것이다. 대대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품위가 몸에 밴 외과 과장과 달리 장준혁은 노골적이고 저돌적이다. 외과 과장은 장준혁의 그런 저속함에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장준혁이 같은 팀으로 끌어들이는 장인과 의사협회장도 모두 저속하고 노골적이다. 모두가 자수성가형인 흙수저팀인 것이다. 이들이 노골적으로 출세욕을 드러내며 외과 과장의 금수저 군단에 맞설 때 시청자가 감정이입했다. 흙수저의 출세욕은 정당하고 이들이 금수저 군단에 맞서 비겁한 수를 조금 쓰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시청자는 생각했다. 그래서 장준혁이 부정하게 외과 과장이 되려 하는데도 열렬한 응원이 나타났다.

 

그런 장준혁을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동료가 최도영(이선균) 내과 부교수였다. 최도영도 형제가 모두 의사인 잘나가는 집안 출신인데, 그런 사람이 내세우는 교과서적인 윤리관에 시청자의 비난이 폭주했다. 흙수저가 금수저 군단에 맞서 사다리를 오르는 판에 낭만적인 윤리 설교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얀거탑》은 젊은 흙수저들의 좌절, 분노와 욕망이 투영된, 그래서 출세욕으로 점철된 주인공이 환영받은 시발점 격인 작품이었다. 그때 이래 흙수저들의 좌절과 분노는 더 커졌다. 그렇기 때문에 《하얀거탑》이 여전히 현재적인 것이다. 11년이 지났어도 흙수저들은 ‘선택받은 자들의 하얀 거탑’행 사다리에 오르지 못했고, 욕망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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