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살 오스카, 가장 정치적인 무대가 되다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14 13:20
  • 호수 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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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에 울려퍼진 ‘미투’와 연대의식…‘타임즈 업(Time’s Up)’ 다짐하는 場

 

이변은 없었다. 3월4일(현지 시각) 미국 LA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승자는 예상대로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셰이프 오브 워터》)이었다. 이 영화는 작품상과 감독상, 미술상과 음악상까지 4개 부문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올해 시상식은 무대에 오른 스타들이 하비 와인스타인 성폭력 사건으로 촉발된 ‘미투(Me Too)’를 지지하고, 구체적인 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타임즈 업(Time’s Up)’ 운동을 지속할 것을 다짐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인 시상식이었다는 평가다.

 

1960년대 미국 실험실에서 일하는 언어장애 청소부 엘라이자(샐리 호킨스). 그녀와 괴생명체의 사랑을 그린 《셰이프 오브 워터》는 ‘괴물을 사랑한 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가 완성한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헬보이》 1편(2004)과 2편(2008),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2006) 등 지금까지 독창적인 어둠의 판타지를 보여줬던 감독의 연출작 중 가장 아름다운 영화로 꼽힌다. 종(種)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시대의 냉소를 무너뜨리는 러브 스토리로 평가된다. 사회 소수자들의 연대를 중요하게 그렸다는 점은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이민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시선으로 읽힌다.

 

멕시코에서 나고 자란 델 토로 감독은 “미국에 사는 동안 친구들이 내 꿈을 지켜줬다”며 “꿈을 꾸는 모든 이들은 이 문(할리우드)으로 들어오라”는 수상 소감을 남겼다. 그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품에 안은 건 올해가 처음이다. 이로써 델 토로는 《그래비티》(2013) 알폰소 쿠아론 감독, 《버드맨》(2014)과 《레버넌트》(2015)를 연출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에 이어 세 번째로 오스카 감독상을 받은 멕시코 출신 영화인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우측상단) © 사진=EPA 연합·이십세기폭스코리아㈜


 

차별과 혐오의 시대에 사랑을, 《셰이프 오브 워터》

 

지난해에는 작품상 시상 때 주최 측의 봉투 전달 실수로 먼저 호명된 《라라랜드》가 아닌 《문라이트》가 정정 발표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다행히 올해는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고 무사히 《셰이프 오브 워터》가 호명됐다. ‘봉투 사고’로 당혹스러움을 맛봐야 했던 지난해 시상자 워런 비티와 페이 더너웨이가 또다시 시상자로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올해는 주연상 단골 배우인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메릴 스트립이 각각 후보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 이들을 향한 주목도가 낮았던 이례적인 해다. 다른 후보들의 연기가 워낙 강력해서다. 남우주연상은 《다키스트 아워》에서 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로 완벽하게 분한 게리 올드먼에게 돌아갔다. 40여 년간 다양한 영화에서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연기 인생 최초로 받은 오스카 트로피다. 올드먼은 “(이 상은) 기다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앞서 열린 골든글로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등 주요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여러 차례 휩쓸며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다.

 

여우주연상은 《쓰리 빌보드》의 프랜시스 맥도먼드에게 돌아갔다. 《셰이프 오브 워터》 샐리 호킨스와 치열한 경합을 벌인 결과다. 그는 이 영화에서 딸을 강간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마을 외곽 광고판에 도발적인 메시지를 담으며 지역 경찰과 대립하는 여성 밀드레드를 연기했다. 맥도먼드의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은 《파고》(1997)에 이어 두 번째다. 폭력적 경찰관 딕슨 역을 맡은 샘 록웰이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쓰리 빌보드》는 연기상에서 두 개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여우조연상은 미국의 전 피겨 스케이팅 선수 토냐 하딩의 일대기를 그린 《아이, 토냐》에서 토냐(마고 로비)의 엄마 라보나를 연기한 앨리슨 제니에게 돌아갔다.

 

오스카 트로피를 처음으로 품에 안은 또 한 명의 인상적 수상자는 《블레이드 러너 2049》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다. 그는 《쇼생크 탈출》(1994),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 등을 통해 무려 열세 번이나 촬영상 후보에 올랐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신 주인공이다. 심지어 2008년 시상식에는 그가 촬영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이 동시에 촬영상 후보에 오른 적도 있다. 1949년생의 이 노장 촬영감독은 트로피를 손에 거머쥔 뒤 “카메라 앞과 뒤에서 함께 일했던 모든 좋은 사람들 덕분”이라는 소감을 남겼다.

 

시상식에 참석한 일부 배우들은 ‘타임즈 업’ 배지를 달고 등장했다(왼쪽 사진).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품에 안은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모든 여성에겐 이야기가 있다”는 뼈 있는 발언을 남겼다. © 사진=EPA·AP 연합


 

지미 카멜, 시상식 문 열며 미투 운동 언급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폭로로 시작된 할리우드 스타들의 ‘타임즈 업’. 이에 동참하는 의미로 스타들이 검은 의상으로 레드 카펫을 물들였던 골든글로브 시상식의 이벤트는 재연되지 않았다. 대신 사회를 맡은 지미 키멜이 시상식의 문을 열면서, 할리우드 여배우들을 성추행 및 성폭행한 혐의로 퇴출된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과 미투(Me Too) 운동을 언급했다. 그는 “하비 와인스타인을 내쫓으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더 쫓아내야 할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해 봤다”며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왔다. 용감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주고 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 정말 긍정적인 변화”라고 강조했다.

 

시상식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여성 영화인의 발언에서 탄생했다.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품에 안은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모든 여성에겐 이야기가 있다”는 뼈 있는 발언을 남겼다. 그는 모든 부문 여성 후보들에게 자리에서 일어서기를 독려했고, 그들이 일어나자 장내엔 큰 박수가 울려퍼졌다. 맥도먼드의 마지막 멘트는 “오늘 밤 남기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포함 조항(Inclusion Rider)!’”이었다. 이는 출연 계약 시 배우가 작품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인종·성별·성정체성 등에서 다양성을 유지하도록 계약서에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시상식이니만큼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여우주연상 시상은 전년도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하는 것이 관례지만, 2017년 수상자 케이시 애플렉이 성추문 사건 가해자로 지목되면서 올해 시상은 배우 조디 포스터와 제니퍼 로렌스의 몫이 됐다.

 

한편 올해 시상식의 미국 내 시청자 수는 2650만 명으로 역대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시상식이 최근 10년간 가장 낮은 시청자 수(3290만 명)를 기록했던 것보다 더 떨어졌다. AP통신을 포함한 외신은 예상 외 수상작이 없어 예년보다 긴장감이 덜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무대에서 정치적 이슈가 두드러지면서 엔터테이닝 요소가 줄었다는 점과 TV 시청자 감소도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시상식 이후에는 트로피를 둘러싼 웃지 못할 해프닝도 일어났다. 시상식 직후 열린 축하 만찬 자리에서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여우주연상 오스카 트로피를 도난당한 것이다. 트로피는 맥도먼드에게 무사히 돌아갔고, 트로피를 훔친 범인 브라이언트는 LA 경찰국에 체포된 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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