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모서 연매출 100억대 기업 CEO로 거듭나다
  • 박소정 객원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28 13:24
  • 호수 1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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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임희성 굿모닝대양 대표 “내 이야기는 성공담 아닌 실패담”

 

계단 청소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닦아 내려오는 것이 순서다. 굳이 인생의 굴곡을 층계에 빗댄다면 행복한 순간과 불행의 순간을 각각 위층과 아래층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연매출 100억원 이상을 기록하는 중소기업의 여성 CEO가 있다. 청소용역업체 ‘굿모닝대양’의 임희성 대표(58)다. 그가, 구태여 밝히지 않아도 되는 인생의 밑바닥 순간을 세상에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지난해 12월, 에세이 《계단을 닦는 CEO》를 출간했다. 방송에도 여러 차례 출연했다. 그는 책을 쓰고 방송에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을 ‘계단 닦기’라고 표현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밑바닥 삶들을 차근차근 회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임 대표는 불우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했고, 아버지는 지적장애가 있었다. 20대 초반에는 돌연 ‘미혼모·미망인’이란 딱지까지 붙었다. 15년째 뇌종양을 앓고 있기도 하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는 과거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불행한 삶을 비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악착같이 살았다. 남대문에서 옷 장사를 해서 네 명의 동생을 키웠다. 25년째 청소용역회사를 운영해 왔고, 현재 직원 2000여 명을 거느리고 있는 여성 CEO가 됐다.

 

시사저널은 3월23일 서울 금천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임 대표를 만났다. 검소한 사무실만큼이나 민낯에 수수한 모습을 한 그녀였다. 한 시간 반 동안 그의 굴곡진 인생사를 들었다. 힘든 과거 이야기를 끄집어낼 때면 울컥한 듯 눈시울이 자주 붉어지기도 했다. 그는 불행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찬찬히 풀어놓았다.

 

임희성 대표 © 시사저널 박은숙


 

어린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아버지가 어린 나에게 너무 많은 아픔을 줬다. 아버지는 지적장애와 언어장애가 있었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걸 보고 자라며 원망을 많이 했다. 나는 맏딸이었다. 가난과 무능이라는 아버지 어깨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고3 때부터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다.”

 

 

20대 초반에 ‘미혼모·미망인’ 딱지를 달았다고 들었다.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다정다감했다. 아버지에게서 못 느꼈던 사랑을 이 남자에게 느꼈다. 결혼하기도 전에 아이가 덜컥 생겼다. 나는 그게 사랑인 줄 알았는데, 그 남자는 결혼할 마음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았다. 남편은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돼 입대했다. 그리고 열 달 만에 남편이 부대 안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도 군복 입은 사람만 봐도 가슴이 떨리고 눈물이 왈칵 나려고 그런다.”

 

 

젊은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 같다.

 

“그래도 나에게는 딸이 있었다. 시댁에서는 우리한테 눈길도 안 줬다. 분유 찌꺼기를 탈탈 털고 물을 많이 타서 딸에게 먹이곤 했다. 분유 값만큼은 내가 벌어야겠다 싶었다. 친정에 딸을 맡기고 달랑 토큰 하나만 들고 무작정 남대문으로 갔다. 가장 손님이 많은 ‘옥동자’란 가게에 가서 무작정 점원을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엔 사장이 내 체격이 너무 왜소해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시켜만 주면 나는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취직을 했다.”

 

 

그렇게 시작한 남대문 옷 장사를 13년이나 했다고.

 

“옷 장사로만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렸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나 하나 고생해서 동생들이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내 경쟁력을 살렸다. 몸은 깡말랐어도 옷을 입었을 때 핏(Fit·옷맵시)이 좋았다. 마네킹도 없던 시절, 예쁜 옷을 직접 입고 팔았다. 손님들이 입고 있는 옷을 벗어달라고 그랬다. 손이 야무져서 내용물이 많은 포장도 꼼꼼하게 잘했다.”

 

 

옷 장사를 하다가 돌연 청소용역업체를 세웠다. 이유가 뭐였나.

 

“밤에 자고 싶어서였다. 야간에 옷 장사를 하고 낮에 잠을 잤다. 딸애가 유치원에서 엄마 얼굴을 그려 왔는데 이불 뒤집어쓰고 자는 모습이더라. 충격이었다. 셋째 제부의 제안으로 1993년 청소용역업체를 시작했다. 그게 대양기업(現 굿모닝대양)이다. 경비·소독 용역도 같이 한다.”

 

 

‘청소업’이란 직업은 어떤 의미인가.

 

“남이 하기 싫어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나는 더 좋다. 남이 못하는 일을 하는 셈이니까. 그래서 나는 청소업이 전문직이라고 생각한다. CEO는 현장감이 있어야 한다. 내가 밑바닥을 알아야 다스릴 수 있다. 창업 초기에는 직접 건물 청소를 하러 다녔다. 요즘도 아파트를 직접 돌아다니면서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한다.”

 

 

소문난 장사꾼에 업체 대표까지, 그야말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43세에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다섯 번 수술했는데 종양이 크고 신경을 많이 품고 있어 완전 제거가 불가능했다. 지금까지 15년째 종양이랑 동거하고 있다. 지금은 (종양을) 그냥 같이 사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식당업 실패로 20억 빚을 안아 힘든 적도 있었다.”

 

 

13학번으로 입학해 지난 2월 대학 졸업장을 땄다고.

 

“몸이 아프고 나서 내가 죽기 전에 꼭 해 보고 싶은 게 뭔지 생각해 봤다. 고등학교 공부를 채 못하고 나온 게 허전하게 남아 있더라. 2년제 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 뒤, 4년제 신학대학으로 편입했다. 상담학과 수업 시간에 남들 앞에서 처음으로 내 인생 이야기를 했다. 평생 아무한테도 내 치부와 불행을 얘기한 적 없었다. 사람들이 나한테 손가락질할 줄 알았는데 안아주더라. 눈물이 났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그 용기로 책을 썼다.”

 

 

이 정도면 성공한 삶 아닌가.

 

“성공했다는 말 하지 마라. 뭘 기준으로 성공이라고 하는 건가. 내 이야기는 성공담이 아니라 실패담으로 가득 차 있다. (CEO로서) 성공한 현재를 봐 달라고 책을 쓴 게 아니다. 스무 살 때 내가 아팠던 과정을 봐 달라는 거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실패를 디디고 일어서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앞으로의 계획은.

 

“앓고 있는 뇌종양으로 인해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른다. 내 경험이 어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누는 것을 기피하지 않는 시간이 허락됐으면 한다. 나누는 게 좋다. 능력은 되지 않았어도 늘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애썼던 아버지 성향을 닮은 것 같다. 아버지처럼 안 살려고 했는데 결국 나는 아버지의 인생을 배워서 그처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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