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며 살아남은 임시정부와 ‘정글의 법칙’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前 KBS PD)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4.1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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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99주년 맞은 지금, 한반도 상황은 당시와 비슷

 

4월13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 앞 야외광장에서 열린 제99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기념식에서 임시의정원 회의가 재연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동물의 왕국》이란 TV 프로그램이 있다. 오랫동안 방영되고 있는 최장수 프로그램 중 하나다. 화면에서는 포식자와 먹잇감이 서로 먹고 먹히는 장면이 나온다. 때로는 먹잇감을 놓고 포식자끼리 싸우기도 한다. 철저히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다. 반면에 ‘인간계’는 약자도 강자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점에서 동물 세계와 다르다. 물론 대가가 따르겠지만 흥정과 거래가 이뤄지기도 한다. 우리는 이를 ‘외교’라 부른다. 

 

필자는 몇 년 전 임시정부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프랑스 문서보관소를 찾은 적이 있다. 그곳에서 일본과 프랑스 사이에 오간 외교문서를 살펴보았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일본이 프랑스 외무성에 보낸 한 문건이 눈에 띄었다. 이 문서에서 일본은 “귀국의 상하이 조계당국이 우리 경찰의 급습을 한인들에게 미리 알려주었다”라고 항의하며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중국주재 전권공사인 앙리 윌든(Henri A. wilden)은 일본이 자국영토인 조계 안에서 안창호를 체포한 사실을 거론하며 “한인들을 일본에 넘겨주느니 차라리 프랑스로 망명 시키겠다”라며 강력하게 대응했다.

 

상하이의 조계 지도와 프랑스의 주중 공사 앙리 윌든. 임시정부와 일본영사관은 불과 6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 사진=이원혁 제공


 

당시 상하이에는 프랑스 조계와 영국이 주도하고 미국·일본이 참여한 공공조계가 있었다. 조계(租界)는 열강들이 자체 행정기구와 경찰력을 갖추고 치외법권을 행사하는 ‘나라 속의 나라’였다. 일본은 공공조계에 총영사관과 경찰국을 두고 이웃한 프랑스 조계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를 감시했다. 그런데 프랑스 조계에서도 외국인 망명자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했기 때문에 임정 망명객들은 두 나라 경찰에게 감시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 얼핏 임정요인들이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 해외에서 자유롭게 활동한 것으로 알기 쉽지만 실상은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먹잇감’ 신세였던 것이다. 

 

1919년 상하이 총영사로 부임한 앙리 윌든은 안창호를 비롯한 임정요인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좋은 집안 출신에 진실 되고 열정적인 애국심을 갖고 있다”면서 호감을 나타냈다. 또 임정의 활동을 막지 않겠다는 뜻도 비쳤다. 실제로 그가 재임한 1926년까지 임정요인들은 조계당국의 ‘묵인’ 아래 그런대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외교에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는 법. 윌든이 상하이를 떠나자 곧 ‘음모’가 시작됐다. 먼저 프랑스 조계경찰이 일본의 체포요청이 없는데도 스스로 한인들을 붙잡아 일본에 넘기는 사건이 벌어졌다. 더구나 신임 상하이 총영사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전임자가 조계경찰에 개인적인 지침을 내려 한인들을 도왔다”라며 은근히 불만을 드러냈다. 윌든이 ‘조계지에서 망명객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한다’는 원칙을 어기고 임정의 활동을 비호했다는 것이다. 또 한국과 베트남 독립 운동가들을 교환하자는 일본의 제안을 보고하고 이를 수락하자는 의견도 덧붙였다.

 

 

“일본이 한국과 베트남 독립 운동가들의 교환을 프랑스에 제안했다”

 

그 무렵 일본 도쿄에는 프랑스 식민지인 베트남의 끄엉데 왕자가 망명해 항불(抗佛)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반면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는 일본 식민지인 한국의 임시정부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처럼 눈엣가시 같은 반식민 세력들이 각각 상대국의 영토에 있었으니 이들을 맞바꾸는 ‘거래’가 이루어질 조건은 충분했다.

 

일본과 프랑스는 전에도 이와 비슷한 거래를 한 적이 있다. 1906년 도쿄에서 베트남 독립운동가인 판보이쩌우가 청년인재 200여 명을 일본에 유학시켜 근대문물을 익히게 하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동유운동(東遊運動)을 펼쳤다. 그러자 프랑스는 일본에 3억 프랑의 차관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유학생들의 명단과 주소를 건네받았다. 이듬해 판보이쩌우와 유학생들은 태국으로 추방되었고, 베트남에 남은 가족들은 고문을 당하거나 투옥되는 고통을 겪었다.

 

베트남 항불 지도자들과 도쿄에 망명한 끄엉데 왕자. 오른쪽은 필자가 입수한 임시정부 관련 프랑스 외교문서들이며 윤봉길 사건 때 프랑스 인권연맹이 일본정부에 항의한 내용이 보인다. © 사진=이원혁 제공


 

이러한 두 나라의 외교적 공조는 1932년 4월 윤봉길 사건이 터지면서 위기를 맞았다. 일본 경찰은 체포 승인도 받지 않고 프랑스 조계지로 넘어와 한인들을 마구 잡아갔다. 워낙 엄청난 사건인지라 프랑스 조계당국도 이를 눈감아 주었다. 이때 주중 전권공사를 맡고 있던 앙리 윌든은 상하이 총영사에게 ‘1921년에 프랑스 상·하원 의원 9명 등 저명인사들이 임시정부 파리 위원부를 돕기 위해 ‘한국 친우회’를 결성했다’는 오래된 문건을 보냈다. 그는 임정을 지원하는 ‘힘 있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총영사에게 다시금 주지시킨 것이다.

 

윌든은 또 “윤봉길 사건 뒤 벌어진 일본의 불법적인 한인 체포 때문에 본국 의원들과 정계가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요. 귀하와 나를 위해서도 이 점을 각별히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거의 협박에 가까운 전문을 총영사에게 보냈다. 친한파 세력이 ‘벼르고’ 있으니 더 이상 일본의 불법 행위를 방치하면 ‘자리’가 위험하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프랑스 외교문서에는 공화국연합당 총재인 루이 마랭 의원을 비롯해 총리를 지낸 소르본대 교수,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권연맹회장 등이 두 나라 외무성에 무분별한 한인 체포를 중지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한 기록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한국 친우회’ 회원들이었다.

 

마침내 한인을 붙잡던 프랑스 경찰은 거꾸로 일본 경찰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조계지에서 한인을 납치하려던 일본 사복형사들을 붙잡아 감옥에 집어넣었다. 이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두 나라 외교당국 간에 치열한 공방이 오간 끝에, 체포된 한인들은 모두 석방되고 그 중 5명만이 재판에 넘겨지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됐다. 이렇게 한인들의 피해가 최소화된 데는 임시정부가 파리에 구축한 친한파 인맥의 도움이 무엇보다 컸던 것이다.

 

 

‘싸우면서 살아남는’ 생존외교 펼쳐 26년 동안 살아남은 임시정부

 

이와 같이 때로는 보호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려는 프랑스의 이중적인 외교 속에서 상하이 임정은 무려 13년 동안 살아남았다. 이기면서 싸우는 게 손자병법이라지만, 제국주의 정글에서 살아남은 임정요인들도 이에 못지않은 생존 법칙을 터득했다. 그 법칙의 실체는 훙커우 공원에서 나타났다.

 

1932년 1월 상하이를 침략한 일본군은 불과 한 달 만에 도시 전체를 점령했다. 프랑스 조계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벼랑 끝에 몰린 임정은 일본군이 승리를 자축하는 ‘잔칫집’에 폭탄을 던졌다. 전 세계는 경악했다. 가장 놀란 사람 중에 장개석이 있었다. 윤봉길 의거에 감동한 그는 그때부터 임정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그 덕분에 임정은 항저우·창사·충칭 등을 전전하며 다시 13년을 더 살아남았다. 요컨대 먹잇감 신세였던 우리 망명객들은 포식자 일본에 맞서 ‘싸우면서 살아남는’ 생존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전 세계에 유례없는, 26년 동안 지속된 망명정부라는 역사를 남겼다. 

 

일본과 프랑스의 또 다른 먹잇감인 끄엉데 왕자는 어땠을까? 그는 두 나라의 이익에 따라 추방과 피신을 거듭했다. 1941년 일본군이 베트남에 진주하자 끄엉데는 만주국 괴뢰인 푸이(溥儀)처럼 왕위에 오를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바오다이 황제 체제를 유지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일본을 향한 그의 '짝사랑'도 끝을 맺었다. 또 다시 버림받은 그는 끝내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1951년 도쿄에서 숨을 거뒀다.

 

4월13일은 우리 임시정부의 99번째 생일이다. 반쪽이나마 독립을 이루었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포식자들의 틈바구니에 놓여있다. 게다가 북한이라는 ‘핵보유국’이 덤으로 끼어들었으니 그네들의 셈법은 훨씬 복잡해질 터이다. 

 

남과 북, 북한과 미국 정상의 만남이 예고된 지금 이 순간, 한반도가 또다시 포식자들의 먹잇감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우리 위정자나 외교전문가들은 임정요인들이 ‘정글의 법칙’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했는지 제대로 알고 있을까? 이 점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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