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공감 드라마로 ‘미생’을 부활시키다
  •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4.18 14:41
  • 호수 1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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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누나》부터 《라이브》까지, 달라진 드라마의 정경들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드라마 방영 전부터 논란이 컸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40대 아저씨와 20대 청춘의 ‘멜로’ 같은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미투 운동이 확산되면서 주로 등장하는 아저씨들의 ‘부끄러운 민낯’을 목격한 대중들로서는, 이런 구도의 드라마가 자칫 아저씨들의 비뚤어진 ‘성 관념’을 고착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시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반대였다. 우리 시대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는 아저씨와 청춘 세대가 겪는 ‘현실 공감’과 ‘소통’을 의도한 드라마라는 게 조금씩 드러났다. 건축구조기술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박동훈(이선균)은 회사 내에서 라인을 타지 않고 곧이곧대로 건물의 부실을 검사하는 일을 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일을 주는 건물주나 그 일을 받는 회사의 경영진 측에서 탐탁하게 여길 리가 없다. 여기에 새로운 젊은 대표와 창업 공신 격의 전무 사이의 정치싸움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기댈 곳 없는 박동훈은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린다. 이런 상황은 이제 회사에서 중견 관리자가 돼 있는 중년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라고 볼 수 있다.

 

© tvN 제공


 

멜로인 줄 알았는데 ‘미생’인 《나의 아저씨》

 

이 회사의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이지안 역시 사채업자에게 빚 독촉을 당하면서 운신도 하지 못하는 할머니 봉애(손숙)를 봉양해야 하는 처지다. 이지안은 자신이 살기 위해 박동훈을 어떻게든 내보내겠다고 뒤를 캔다. 결국 생존을 위해 아저씨 세대와 청춘 세대가 부딪치는 우리 시대의 풍경을 이 드라마는 회사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디테일한 사건들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멜로라기보다는 《미생》에 더 가까워진다. 《미생》에서 오상식과 장그래라는 인물이 아저씨 세대와 청춘 세대의 교감을 그려냈듯, 《나의 아저씨》는 박동훈과 이지안이 서로의 비슷한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tvN 토일드라마 《라이브》에서도 이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물론 노희경 작가가 본래 철저한 취재를 통해 작품을 쓰기 때문에 나타나는 경향일 수 있지만, 《라이브》는 기존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막연히 굳어져 있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경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장르물들이 그려내는 경찰이란 범죄자들을 초인적인 능력으로 잡아내는 슈퍼히어로거나 혹은 범죄자들과 결탁한 비리경찰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노희경 작가는 경찰 또한 우리와 비슷한 감정과 아픔을 경험하는 사람이라는 걸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려 한다.

 

© tvN 제공


이를테면 학교 폭력 문제나 비관자살 같은 사건들이 그렇다. 그리고 그 사건들을 접하는 경찰들도 우리가 생각해 온 그런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르다. 살인 사건을 처음 접하는 신입경찰이 느끼는 트라우마부터 나이 든 경찰이 청소년들에게 두들겨 맞고 하소연도 제대로 못하는 아픔까지 드라마는 실로 경찰의 진면목을 담아내려 한다.

 

흥미로운 건 《라이브》에도 《미생》의 후예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취업에 연거푸 좌절하고는 경찰공무원이라도 되겠다며 뛰어든 한정오(정유미)와 염상수(이광수)가 그들이다. 이들은 홍일지구대에 들어와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경찰생활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조금씩 진짜 경찰이 되어 간다. 현재 청춘들이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경찰 사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는 걸 드라마는 촘촘한 디테일로 보여준다.

 

이처럼 드라마가 현실의 풍경들을 디테일한 사건들로 묘사해 내는 경향은 멜로드라마에서도 일어난다. 이른바 ‘예쁜 누나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JTBC 금토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대표적이다. 이 드라마는 언뜻 보면 한 누나와 나이 차가 나는 동생 간의 연상연하 커플 멜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평범해 보이는 연상연하 커플 멜로가 특별하게 보인 건 윤진아(손예진)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들이 디테일한 이야기들로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커피 프랜차이즈 회사에서 일하는 윤진아는 회사 측에서 요구하는 사항과 점주들의 요구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회사생활을 한다. 회사는 좀 더 이익을 내려고 점주들을 압박하지만, 점주들은 그것이 일종의 갑질이라고 여기며 반발하기도 한다. 결국 중간에 끼여 있는 윤진아 같은 ‘미생’들이 그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 회사의 상사들은 윤진아는 물론이고 여직원들을 회식자리로 불러내 당연한 일인 듯 성희롱을 일삼는다. 윤진아는 그걸 하도 많이 겪어서 이제는 그러려니 할 정도로 둔감해졌고, 다른 동료들조차 윤진아는 그걸 거부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기게 됐다. 현실은 윤진아를 ‘예쁜 누나’로 보지 않는다. 그저 나이 많은 누나로 치부할 뿐이다. 그래서 이런 현실 배경은 그를 ‘예쁜 누나’로 바라봐주는 서준희(정해인)와의 멜로를 더 강렬하게 만든다. 소박한 멜로조차 강렬한 판타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혹독한 현실이라는 걸 드라마는 부지불식간에 보여준다.

 

© JTBC 제공


 

《라이브》, 지금까지의 경찰 이미지는 잊어라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과 이지안도, 《라이브》의 한정오와 염상수도 그리고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윤진아도 모두 《미생》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더 이상 드라마의 황당한 판타지가 대중들에게 공감이 가지 않는 현실을 우리가 살고 있어서다. 신데렐라 같은 이야기나 누군가 노력해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성장드라마가 현실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고 더 이상 대중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이 최고의 위치에 올라선 스타 야구선수를 가장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감방 생활로 떨어뜨림으로써 시청자들을 공감하게 만들었듯이, 이제 드라마들은 훨씬 낮은 곳에 있는 인물들의 생생한 현실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드라마가 추구하는 판타지들도 소박해졌다.

 

미국의 벤처투자가 로저 맥나미는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생긴 경제침체 기간에 생겨난 새로운 경제적 기준들을 ‘뉴 노멀(New Normal)’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그는 저성장, 저금리, 저물가가 지속되던 이 시기를 예로 들어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지금의 드라마들은 성장주의 시대의 막연한 판타지를 더 이상 ‘노멀’로 그리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훨씬 더 바닥으로 내려온 디테일한 현실 속에서 그나마 ‘실현 가능한 판타지’를 ‘뉴 노멀’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미생은 어디서나 등장하고, 현실 공감은 이제 하나의 장르처럼 드라마의 밑그림이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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