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국민’ 개헌, 현실은 ‘국민 소외’ 개헌
  • 이준영 시사저널e. 기자 (lovehope@sisajournal-e.com)
  • 승인 2018.04.20 17:00
  • 호수 1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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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핵심 ‘국민개헌발의권’ 정부안서 빠져… “국민 의견 사실상 껍데기 만들어”

 

2016년 가을부터 2017년 초까지 매주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국민들은 궁극적으로 주권자의 삶을 살 수 있길 바랐다. 불합리한 사회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외쳤다. ‘촛불혁명’을 등에 업고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국민들의 열망을 반영하기 위해 30여 년 만에 전면 개헌을 진행하고 있다. ‘국민이 중심인 국민개헌’을 정부와 정치권은 표방해 왔다. 그러나 정부와 정치권이 개헌 내용과 절차를 논의하면서 주권자인 국민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개헌의 핵심인 국민개헌발의권이 빠졌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려는 노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당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계산하며 정쟁으로 개헌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현행 헌법상 국민에게는 개헌발의권이 없다. 국민은 대통령 또는 국회가 발의한 개헌안이 국회 의결을 통과한 후에야 국민투표를 할 수 있다. 주권자인 국민이 필요한 개헌안을 직접 발의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국민개헌발의권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헌법 이전까지는 선거권자 50만 명 이상이 제안하는 국민개헌발의권이 있었다.

 

우원식 원내대표를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4월18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국회 정상화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예산 받고도 숙의형 시민토론회 ‘0’

 

그러나 현재 정부와 정치권이 내놓은 개헌안에는 국민개헌발의권이 없다. 정부 개헌 발의안을 마련하기 위해 2월 출범한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의 개헌 자문안에는 국민개헌발의권이 포함됐었다. 유권자 3% 이상이 제안할 경우 개헌발의가 가능하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정부가 최종적으로 내놓은 정부안에는 국민개헌발의권이 빠졌다. 정치권도 국민개헌발의권 논의를 본격화하지 않고 있다. 국민개헌의 핵심이 국민개헌발의권인데도 이를 포함하지 않으면서 ‘알맹이 없는 개헌’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던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헌법자문특위 자문안에 포함된 국민개헌발의권이 정부안에서 빠진 게 가장 아쉽다”며 “촛불혁명 정신을 고려하면 국회는 국민개헌발의권을 개헌안에 당연히 포함해야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재근 참여연대 정책기획실장은 “대통령도 국민개헌발의권을 포함 안 했는데 국회가 자기 권한을 국민에게 나눠줄지 의문”이라며 “국민들이 요구하는 수준의 크기에 따라 국회가 국민개헌발의권을 포함할지 여부가 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홍명근 ‘세상을 바꾸는 꿈’ 사무국장은 “국민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에 대해 정부와 국회가 부정적인 상황이다. 국민이 준비가 덜 됐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러나 촛불혁명에서 봤듯이 시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은 충분히 성숙하다”고 말했다.

정부로부터 개헌의 공을 넘겨받은 국회도 마찬가지다. 개헌에 국민들의 실질적 목소리를 담는 숙의형 시민토론회를 아직까지 열지 않고 있다.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는 자문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숙의형 시민토론회를 전국적으로 수차례 가졌다. 정부 개헌안은 개헌 저지선을 가진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원안 통과가 사실상 어려운 실정이니만큼, 국회 개헌 논의 과정에서 국민의 참여 여부가 중요하다.

 

 

“주권자 소외 막기 위해 국회 의결 기준 완화”

 

그러나 국회는 숙의형 시민토론회 관련 예산을 배정받고도 집행하지 않았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숙의형 시민토론회와 국민토론회는 국민 주체성 측면에서 전혀 다르다”며 “숙의형 시민토론회는 국민들이 토론자로 참여해 자신의 의견을 주체적으로 개진하고 논의한다. 반면 국민토론회는 전문가가 발제하고 국민들은 듣거나 질문하는 일반적 토론회다”고 말했다. 비례민주주의연대가 정보 공개 청구를 통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운영된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는 숙의형 시민토론회인 원탁토론을 위한 예산으로 7억200만원을 배정받았다. 전국적으로 4차례에 걸쳐 5000명의 시민과 원탁토론을 할 계획이었지만 무산됐다.

 

지난 1월 구성된 헌법개정 및 정치개혁 특별위원회(헌정특위)도 숙의형 시민토론회를 열지 않았다. 헌정특위 관계자는 “개헌특위에서 대국민토론회 등 국민 의견 수렴 절차를 가졌기 때문에 헌정특위는 숙의형 시민토론회를 하지 않았다”며 “앞으로도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홍명근 사무국장은 “국회는 민의의 수렴기관이니만큼 당연히 시민 대상 숙의형 토론회를 해야 한다”며 “시민들이 개헌에 관심 없어 보이지만 이전에 진행한 청년 대상 개헌 공론장에서 열의와 수준 있는 토론을 했다. 과거의 개헌처럼 전문가들이 알아서 해 버리는 개헌은 국민들과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국민들은 국회 의결에서 의원 3분의 1이 반대하면 자신들을 위한 개헌안에 투표조차 할 수 없다. 지금의 개헌 절차는 변화한 시대와 국민 요구에 따른 개헌 자체를 어렵게 한다. 현재 국회는 정쟁으로 개헌 논의도 사실상 멈췄다. 전문가들은 주권자의 개헌 소외를 막기 위해 국회 의결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황도수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재 개헌의 국회 의결 조건은 국민이 주권자로서 헌법을 결정하는 구조가 아니다”며 “개헌 취지에 따르면 ‘국민투표’가 중심이 돼야 한다. 국회 의결 3분의 2 이상 조건을 5분의 3 이상 또는 과반수로 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민이 발의한 개헌안과 국회의원 이해와 관련된 개헌안은 국민이 직접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곽노현 징검다리교육공동체 이사장은 “국민에게 개헌발의권이 주어져 국민이 직접 발의한 개헌안에 대해서는 국회가 부결시켜도 그 이유와 함께 국민투표 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특히 국회의원 임기와 권한 등 의원 이해관계가 달린 개헌안은 국회에 맡기는 것이 맞지 않다. 이러한 개헌안은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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