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신뢰도 감소…“재점검 절실한 시점”
  • 이민우 기자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18.04.23 20:18
  • 호수 1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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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영향력 늘었지만 신뢰도는 떨어져…갈림길에 선 시민운동

 

바야흐로 참여연대 전성시대다. 참여연대로 표상되는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의 정치 참여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그간 진보 성향의 시민단체가 내세웠던 어젠다들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로 자리매김했다. 때문에 보수 성향의 정당은 물론 시민단체, 언론마저 반격에 나서는 형국이다. 그만큼 시민단체의 영향력이 크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복수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전성기라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내부에선 정작 시민운동의 위기라고 말한다. 앞으로 갈 길이 만만치 않다는 의미다. 그간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진보·개혁 성향의 정부와는 ‘비판적 협력자’로, 보수 성향의 정부와는 ‘저항적 대결세력’으로 관계를 설정해 왔다.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 가장 활발하게 제도권에 진출했다. 때문에 보수진영으로부터 ‘정치적 순수성’에 대해 공격을 받게 됐다. 편향성의 진실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정쟁(政爭)의 대상이 되면서 시민들의 신뢰는 갈수록 옅어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인용된 다음 날인 2017년 3월11일 광화문 일대에 모인 시민들 © 시사저널 박정훈


 

‘참여연대 전성시대’의 역설

 

“80년대까지는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행동은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길거리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릅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참된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행동은 사회와 정치 무대의 한복판에서, 그리고 국민의 일상생활의 과정에서 일어나야 합니다.”(1994년 참여연대 창립선언문 中)

 

과거 역사 교과서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를 완성했다고 가르쳤다. 공공의 적(敵)이었던 군부 정권이 물러나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선 고민이 부족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던 시민사회는 뿔뿔이 흩어졌다. 누군가는 노동단체로, 다른 누군가는 정치권으로 진출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이어진 노동자 대투쟁은 정부와 극한 대립을 이어갔고, 이는 ‘넥타이 부대’를 둘로 나누게 됐다. 노동단체의 급진성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확산되며 온건한 개혁을 표방한 시민사회 세력들이 생겨나게 된다. 민주화라는 공통분모로 융합돼 있던 시민사회는 87년 체제 이후 자연스럽게 정치적·이념적 분화가 이뤄지면서 시민단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온건한 개혁 추진을 표방하며 가장 먼저 출범한 단체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다. 1989년 출범한 경실련은 사회적 공공선의 실현과 성숙한 민주시민의식 형성을 내세우며 스스로 ‘시민운동’을 표방했다. 이들은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운동 △비폭력·평화·합법적인 시민운동 △비정치적 순수 시민운동을 언급하며 국민적 지지를 넓혀갔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김영삼 정부는 하나회 척결, 5공화국 청산, 반부패 개혁 등을 추진했다. 한편으론 세계화 정책을 추진하며 금융시장 문호를 열었고, 노동운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기존 시민운동은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에 한계를 느낀 박원순·조희연·김기식 등의 인사들은 1994년 의기투합해 새로운 시민운동을 모색한다. 이렇게 출범한 단체가 참여연대(당시 명칭은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다.

 

참여연대는 국가 권력에 대항해 권력 감시와 인권 옹호, 사회복지 확대를 추구하는 ‘진보적 시민운동’의 성격을 띠게 됐다. 기존의 시민단체들이 온건한 순수 시민운동을 표방한 것과 대비된다. 참여연대는 감사청구와 고소·고발, 공익소송, 입법청원 등 기존의 시민단체가 활용하지 않던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며 제도적 개혁을 이끌었다. 이때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2000~04년은 시민운동 황금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보여준 시민단체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참여연대 주도로 1000여 개 시민단체를 결합해 총선시민연대를 발족시켰다. 이들은 낙천·낙선 대상 명단을 발표해 선거운동 현장에서 낙선활동을 펼쳤다. 지역주의 정서로 인해 일부 지역에선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낙천·낙선 대상 가운데 68.8%나 떨어뜨림으로써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곧바로 위기가 닥쳤다. 시민운동을 이끌던 인물들이 점차 제도권에 진출하면서 시민운동의 순수성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이 대거 진출하자 보수진영의 표적이 됐다. 민주노동당(현 정의당)으로 대표되는 진보 정당이 출현하면서 시민운동의 입지는 줄었다. 이후 노무현 정부의 국정 지지율이 추락하면서 시민단체 또한 동시에 위기를 겪게 됐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는 역설적으로 시민단체의 위기를 촉진했다. 시민들의 열망을 시민단체가 끌어안지 못했다는 불안감과 실망감이었다. 2002년 여중생 사망 사건으로 광장에 모였던 시민들은 2008년 또다시 시청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소수의 사람이 집회를 주도하고, 다수의 시민들이 따라가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도 촛불집회의 주도자가 아니라 공감자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또다시 시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평화적인 권력 교체를 이뤄냈다. 세상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감지하지 못한 시민단체는 기득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총선시민연대 회원들이 2000년 4월7일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낙선자 명단을 나눠주고 있다. © 시사저널 포토


 

“촛불 이후의 시민운동 고민할 때”

 

시민단체 내부에선 자기성찰의 목소리도 나온다. 물론 보수진영의 ‘정부에 참여한 인사가 많다’거나 ‘권력화됐다’는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가장 먼저 나오는 비판은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 됐다는 점이다. 2000~04년 절정기 때와 달리 시민들의 신뢰는 크게 약화됐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또한 줄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보수진영에서 시민단체의 과잉대표 문제를 공격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권력을 비판하면서 권력을 닮아간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주요 시민단체들의 활동은 기존 정치적 시민운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직의 비대화 문제나 전문가나 상근자 중심의 운영 방식, 백화점식 어젠다 설정 등의 문제다. 개인의 열의나 헌신에 기댄 운영 방식, 엄청난 업무량 속에서 순수한 시민운동 활동가를 재생산하기란 쉽지 않다.

 

정한울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는 “1987년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한국의 시민사회, 시민단체는 새로운 변곡점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시민들의 신뢰를 받으며 급성장했던 시민단체가 어느새 시민들의 불신을 받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정 교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한국 시민운동, 시민단체들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의 변화에 대한 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재점검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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