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화면 논란’ 이영자, 먹방 끝판왕으로 굴기하다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8.05.11 18:01
  • 호수 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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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물간’ 방송인에게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이유

 

이영자가 5월 발표된 예능방송인 브랜드 평판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 4월4일부터 5월5일까지 주요 예능인 40명을 대상으로 한국기업평판연구소가 분석한 결과다. 이영자로선 감개무량한 결과다. 이영자는 1990년대 스타였다. 1987년에 연극배우로 데뷔한 후 1991년 MBC 개그콘테스트를 통해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입성하면서 이유미라는 본명 대신 이영자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MBC 《웃으면 복이 와요》 《오늘은 좋은날》 등에 출연하며 ‘살아 살아 내 살들아’ 등의 유행어로 인기를 끌었다. 이후 SBS 《기쁜 우리 토요일》에서 ‘영자의 전성시대’ 코너를 통해 “안 계시면 오라이~”를 유행시키고, KBS 《슈퍼선데이》에서 ‘금촌댁네 사람들’로 당대에 가장 사랑받는 개그우먼 자리에 올랐다.

 

1990년대를 그렇게 정상의 자리에서 보낸 이영자에게 위기가 찾아온 건 2001년이었다. 이른바 이영자 다이어트 비디오 파문으로 그녀는 대중의 사랑을 잃었다. 한번 떠나간 대중의 사랑은 돌아올 줄 몰랐다. 꽤 오랜 기간 그녀와 관련된 기사엔 악플이 쏟아졌다. 설상가상으로 방송 트렌드도 변했다. 리얼버라이어티 전성기가 도래하더니 리얼리티 관찰 예능 시대로 넘어갔다. 이 리얼 열풍은 여성 진행자에겐 북풍한설이었다.

 

© 시사저널 박정훈


 

17년간 두문불출하다 먹방으로 폭주한 이영자

 

물론 그렇다고 방송을 아주 쉰 건 아니다. 2007년 tvN 《현장토크쇼 택시》에 이어 2010년 KBS 《안녕하세요》 진행을 맡으면서 어느 정도 위상은 이어갔다. 하지만 더 이상 ‘핫’하지가 않았다. 화제에 오르지 못하는, 트렌드의 중심에서 벗어난, 그런 전문 방송인 같은 느낌으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다 갑자기 최근 들어 ‘핫’한 스타로 급부상하더니, 예능인 브랜드 평판 1위에까지 오른 것이다. 실로 17년 만에 이영자의 전성기가 돌아왔다.

 

계기는 올 3월부터 정규 편성된 MBC 《전지적 참견 시점》이다. 이 프로그램이 이영자를 띄우고, 역으로 이영자는 이 프로그램을 띄웠다. 비결은 리얼리티 관찰 예능이다. 《전지적 참견 시점》은 관찰 카메라 앞으로 이영자를 불러냈다. 그동안의 리얼 열풍에서 소외됐던 이영자에게 카메라 렌즈가 맞춰진 것이다. 이영자는 관찰 대상이 되자마자 폭주하기 시작했다. 매니저와 연예인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설정이다. 이영자는 여러 출연자들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폭주한 이영자의 존재감이 프로그램을 순식간에 장악해 버렸다. 여기에서 이영자가 한 일은 바로, 먹는 것이었다.

 

먹방의 인기는 꽤 오래됐다. 그동안 여러 스타가 먹방으로 떴고, 요즘엔 쿡방에 이어 해외여행 먹방까지 나타날 정도로 음식이 방송가 핵심 주제가 됐다. 연예인이 아닌 요리사, 심지어 백종원 같은 외식사업가까지 음식 방송으로 각광받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뜨거운 음식 열풍에서 이영자는 철저히 배제됐었다. 음식이라면 누구보다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이영자의 전성기가 오래전에 끝나 관심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누구도 그녀를 소환할 생각을 못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지적 참견 시점》의 한 장면 © MBC 제공


 

“눈으로 먹고, 코로 먹고, 입으로 먹는다”

 

그러던 차에 《전지적 참견 시점》이 그녀를 관찰 카메라 앞에 세웠다. 먹방으로 세운 건 아니다. 그저 매니저와의 일상을 관찰하려 했을 뿐이다. 바로 거기에서 이영자가 어마어마한 음식의 내공을 선보였고 대중은 환호했다. 이영자는 수년간 계속된 먹방 열풍의 끝자리에 우뚝 선 ‘먹방 끝판왕’으로 굴기했다.

 

시청자는 일단 이영자가 내뱉는 말의 향연에 빠져들었다. 이영자가 매니저에게 음식을 사 오라고 시키거나, 먹을 메뉴를 권유하면서 해당 음식을 소개하는 장면이다. ‘감기에 안 걸리는 맛, ‘첫 입은 설레고 마지막 먹을 때는 그립고’ ‘우리의 말초신경을 다 깨우는 황태’ ‘우리는 한 번 본 사람은 잊어도 한 번 먹은 음식은 못 잊지’ ‘물고기들이 입에서 막 돌아다녀’ ‘자유를 주는 맛’ ‘시집 잘 간 송혜교가 부럽지 않은 맛’ 등의 표현들과 더불어 ‘푸우욱’ ‘쏴아악’ 등 의성어가 음식에 대한 판타지를 한껏 고양시켰다.

 

더불어 진정성이다. 음식 프로그램이 범람하면서 TV에서 소개하는 음식이나 맛집 정보에 불신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영자는 음식 방송 아이템으로 음식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27년간 연예인으로 전국 곳곳을 누비며 직접 맛보고 쌓아온 맛집 정보가 기왕에 있었는데, 일상 관찰 프로그램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됐을 뿐이다. 이것이 이영자가 일러주는 맛집은 진짜라는 신뢰를 만들어냈다.

 

접근성도 뛰어나다. 최근에 미식 열풍이 고도화되면서 셰프들이 고급 요리를 소개해 주거나 연예인들이 해외로 나가 외국 음식들을 선보였다. 이것이 진기한 정보로 인기를 끌었지만 문제는 서민이 직접 먹을 일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반면에 이영자가 소개해 주는 맛집은 누구라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종류들이다. 국밥·호두과자·우동·오징어·전통통닭·김치만두 등 친숙한 음식들이기 때문에 시청자에게 더 유용한 정보가 된다.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하게 몰입하게 된다.

 

“난 세 번 먹거든. 눈으로 먹고, 코로 먹고, 입으로 먹고.” 이렇게 음식을 너무나 사랑하며 음미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이 전해져 시청자 마음까지 흐뭇하게 해 준다. 가식이 아니라 진짜라는 게 확실히 느껴져서 더 그렇다. 진정한 생활 미식가다. 이영자의 대식(大食)도 재미 포인트다. 지방 가는 길에 휴게소마다 들르며 국밥·소떡소떡·호두과자·오징어·우동·도리뱅뱅 등을 먹어치우더니 두부두루치기집에서 밥과 국수를 먹으며 “이제야 제대로 한 끼 먹었다”고 흡족해하는 모습이 시청자에게 대식의 쾌감을 대리만족시켜 준다. 매니저와의 동행도 신의 한 수였다. 이영자와 매니저의 은근한 신경전, 이영자의 대식과 음식의 맛에 놀라는 매니저의 모습, 이런 요소들이 ‘이영자 먹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고수에겐 두 번의 기회가 필요 없었다. 한 번 주어진 관찰 카메라 앞에서 단숨에 먹방 끝판왕으로 우뚝 섰다.  그렇게 잘나가던 이영자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5월5일 방송에서 이영자가 어묵을 먹는 장면에, MBC 뉴스 특보 화면과 “‘속보’ 이영자 어묵 먹다 말고 충격 고백”이라는 자막을 합성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 화면은 세월호 사건 당시 뉴스 화면이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일간베스트 사이트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어묵’이라며 조롱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부적절한 일이었다. 비난이 폭주했고 MBC 사장까지 나서서 사과했다. 이제 막 재기한 이영자에게 또다시 악재가 찾아온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지만, 위상엔 변화가 없다. 대중의 공분 속에서도 이영자에게만은 동정과 응원이 쏟아졌다. MBC 진상조사 결과에 따라 프로그램에 어떤 조치가 내려지더라도, 당분간 ‘영자 전성시대’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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