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등기이사 15년 만에 후계구도 밑그림 그렸다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18.05.14 11:05
  • 호수 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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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구조 개편으로 공정위 공격 이슈 사라져…“오너에게만 유리한 지배구조 개편” 시각도

 

올해는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부회장이 등기이사가 된 지 정확히 15년째 되는 해다. 현대차그룹은 최근 지배구조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숙원이었던 2세 체제의 밑그림을 그렸다. 정몽구 회장과 장남인 정의선 부회장이 지배하는 현대글로비스 주식과 기아차 등 계열사들이 나눠 갖고 있는 현대모비스 주식을 맞바꿔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를 끊는 게 골자다. 이를 위해 현대차그룹은 최근 현대모비스의 AS부품과 모듈사업부를 분리한 뒤,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시나리오대로 진행되면 정 부회장은 현대차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설 수 있을 것으로 재계에서는 보고 있다. 

하지만 저항도 만만치 않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엘리엇)를 필두로, 시민단체와 노동계, 일부 소액주주들이 현대차그룹의 발표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너 일가만 이익을 얻게 되는 편법적인 구조조정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악의 경우 5월말로 예정된 현대모비스 주주총회에서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안이 무산될 수 있어 향후 추이가 주목된다.

 

정 부회장은 2003년 기아차 기획실장에 오르며 처음 등기이사에 이름을 올렸다. 기아차가 1999년 현대차에 인수된 후 잠깐 흑자를 보이다 적자로 돌아선 시기였다. 재계에서는 정 부회장이 조만간 현대차로 옮겨갈 것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기아차에 계속 남아 있을 경우 후계자의 이력에 오점이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 뉴스1


 

2003년 기아차 기획실장 맡아 처음 등기이사

 

실제로 삼성그룹은 2000년 초 닷컴 열풍 당시 e-삼성을 설립했다. 이건희 회장의 장남이자 승계 1순위였던 이재용 부회장이 이 사업을 주도했다. 하지만 사업은 8개월 만에 실패로 끝났고, 제일기획 등 8개 삼성 계열사가 이 부회장이 보유한 e-삼성 지분을 인수해 뒷말이 나왔다. 이 부회장의 경영 능력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꼬리표처럼 e-삼성 문제가 따라다녔다. ‘마이더스의 손’을 빗댄 ‘마이너스의 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정 부회장은 재계의 예상을 뒤엎고 잔류를 선택했다. 세계 3대 디자이너로 알려진 피터 슈라이어를 CDO(디자인 총괄담당 부사장)로 영입했고, 현재 기아차의 상징이 된 ‘호랑이 코’ 패밀리룩을 완성했다. 브랜드 역시 ‘K시리즈’로 일원화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2006년 27만 대에 불과했던 국내 판매량은 2010년 49만 대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디자인 경영’으로 기아차의 체질 개선에 성공한 정 부회장은 ‘글로벌 경영’에도 나섰다. 슬로바키아와 미국 조지아 공장을 잇달아 건립했다. 2006년 99만 대에 불과했던 기아차의 해외 판매대수는 덕분에 2010년 200만 대 언저리까지 치솟았다.

 

재무구조도 크게 개선됐다. 2006년까지 기아차는 17조4400억원의 매출과 1253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2010년 기아차의 매출은 23조2614억원으로 4년 만에 6조원 가까이 불어났다.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도 각각 1조6902억원과 2조2543억원을 기록했다. 그동안 기아차의 발목을 잡았던 고질적인 경영적자의 ‘늪’에서 탈출한 것이다. 이 시기 기아차의 주가는 불과 5년 만에 5배나 증가했다.

 

정 부회장은 2010년 연말 인사에서 기아차의 ‘형님 격’인 현대차 부회장에 취임했다. 현대차로 옮겨와서도 비슷한 전략을 이어갔다. 육각형 모양의 헥사고날 그릴을 도입했고, i시리즈를 통해 현대차에 패밀리룩을 입혔다. 특히 정 부회장은 유럽 시장 확대에 많은 공을 들였다. 2008년까지 현대차의 유럽시장 점유율은 1.8%대에 불과했다. ‘마의 3%’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점유율이 미미했다.

 

결과적으로 정 부회장의 유럽 진출 프로젝트 역시 일정 부분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럽자동차제조협회(ACEA)에 따르면, 현대차는 지난해 50만9109대를 유럽에서 판매했다. 전년 대비 3.4% 증가한 수치다. 기아차까지 포함하면 99만5383대로, 역대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순수 경영능력 면에서 보면 정 부회장은 정몽구 회장에게 바통을 넘겨받아 현대차그룹을 이끄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재벌 2·3세라면 한 번쯤 있음 직한 스캔들 한 번 없어 외부 평가도 나쁘지 않다.

 

그룹의 고민도 여기서 시작된다. 후계자인 정 부회장이 그룹의 핵심 계열사 지분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 부회장은 현대글로비스와 현대엔지니어링 지분 23.29%와 11.72%를 보유하고 있다. 둘 다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 성장한 기업이다. 하지만 지주회사 격인 현대모비스의 지분은 전무하다. 현대차나 기아차의 지분은 각각 2.28%와 1.74%로 경영권을 승계받기에는 크게 모자랐다.

 

때문에 시장에서는 그동안 정 부회장의 승계를 두고 다양한 시나리오가 나왔다. 현대차그룹은 3월28일 새로운 지배구조 개편 방안을 발표했다. 현대모비스의 AS부품과 모듈사업부를 분할해 별도 법인을 만든 후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게 골자다. 합병 비율은 0.61 대 1이었다. 현대모비스 주주는 1주당 현대글로비스 신주 0.61주를 배정받는다는 얘기다. 현대글로비스의 대주주인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은 기아차 등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과 맞바꿔 그동안 논란이 됐던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다는 시나리오다. 이 과정에서 정 회장 일가가 낼 세금만 1조원에 이를 것으로 현대차그룹 측은 전망했다.

 

서울 양재동에 위치한 현대자동차 본사 © 시사저널 박은숙


 

현대차 측 “지배구조 개편 승계와 무관”

 

그룹의 한 관계자는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 비율은 순자산 가치에 따라 결정됐고, 회계법인의 검토 또한 거쳤다”며 “분할·합병이 마무리되면 현대모비스는 핵심부품 사업을 보유한 미래 기술 주도 기업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증권가의 시각 또한 대체로 긍정적이다. 글로벌 자동차 부품업체의 분사 트렌드에 맞는 시의적절한 정책이라는 게 주요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전언이다.

 

하지만 재계 일각의 시각은 다르다. 2세 승계를 염두에 둔 ‘꼼수 구조조정’이 아니냐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그동안 공정위로부터 순환출자 고리를 끊을 것을 여러 차례 주문받았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자발적 개혁 데드라인으로 ‘3월말 주총 시즌’을 콕 집어 언급하기도 했다. 이번 지배구조 개편으로 그동안 부담이 됐던 순환출자 고리를 끊으면서 일정 부분 부담을 덜게 됐다. 김상조 위원장도 관련 발표 이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현대글로비스 역시 일감 몰아주기 이슈에서 그동안 자유롭지 못했다. 현대글로비스는 2001년 정몽구 회장이 10억원, 정의선 부회장이 15억원을 출자해 설립됐다. 이후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고성장을 거듭했다. 한때 내부거래 비중이 90%에 육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 기업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다. 자체적으로 내부거래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현대차그룹은 정 회장 일가의 지분율을 29.9%로 낮춰 소나기는 피했다. 하지만 공정위가 규제 지분율을 현행 30%에서 20%로 낮추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현대글로비스가 언제든 일감 몰아주기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는 얘기다. 지배구조 개편으로 정 회장 일가가 지분을 계열사에 넘기면 ‘일감 몰아주기 이슈’ 역시 사라지게 된다. 현대차그룹 안팎에서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빅딜’이 지배구조 개편보다 2세 승계에 초점을 맞춘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참여연대는 최근 현대차그룹을 상대로 맹공을 퍼붓고 있다. 합병비율을 오너 일가의 지분율이 높은 현대글로비스에 지나치게 유리하게 산정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여기에 가세했다. 엘리엇은 최근 50쪽이 넘는 제안서에서 현대모비스와 현대차를 합병해 지주회사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2015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안 발표 당시 엘리엇이 파상공세를 펼친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됐다. 주총 표 대결에서 승리하며 사건이 마무리됐지만, 삼성물산에 적지 않은 생채기를 남겼다.

 

 

AS부품, 현대·기아차→모비스→글로비스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 과정에서도 당시 상황이 똑같이 재연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현대차 계열 노동조합이나 일부 민간 의결권 자문사, 소액주주들이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최근 주가 흐름에서도 이런 기류가 엿보인다. 개편안 발표 당일 급등했던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주가는 5월9일 현재는 고점 대비 10% 이상 하락했다. 현대모비스 주가는 고점(26만1500원) 대비 10.13%나 하락한 23만5000원을 기록했고, 현대글로비스 주가도 고점(17만3500원) 대비 10.08% 떨어진 15만6000원을 나타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주가가 계속 하락할 경우 외국계 주주들의 이탈이 가속화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어렵게 마련된 지배구조 개편안이 백지화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현대모비스의 AS부품 사업과 모듈사업부를 현대글로비스에 넘기는 것 또한 논란이 예상된다. 두 사업부가 그동안 현대·기아차 성장과 가격 경쟁력 확보에 공헌한 숨은 공신이기 때문이다. 2017년 기준으로 두 사업부의 영업이익은 1조4300억원으로 현대모비스 전체 영업이익(2조200억원)의 70.8%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알짜 사업부문을 오너 일가가 지배하고 있는 현대글로비스에 넘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AS부품 사업은 과거 정몽구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넘겨받을 당시 현대모비스(당시 현대정공)로 넘어온 사업부다. 정 회장은 외환위기 직후 현대차그룹의 경영권을 맡았다. 지배회사는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이었다. 정 부회장은 2000년 인천제철로부터 현대정공의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이후 정 회장은 현대·기아차의 AS부품과 모듈사업부를 차례로 넘겨받거나 인수했다. 이런 알짜 회사를 지배구조 개편 명분하에 현대모비스에서 떼어내 오너가 지배하는 현대글로비스에 붙였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다. 참여연대의 한 관계자는 “AS부품 사업의 영업이익률은 20%로 현대모비스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모듈사업부 역시 현대·기아차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동반성장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이런 알짜 사업을 왜 물류회사에 넘겼는지 이해할 수 없다. 사실상 경영 승계를 위한 꼼수가 아니냐는 시각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순환출자 구조 해소의 구체적인 날짜까지 공정위가 언급할 정도로 압박이 심했다. 그에 대한 후속조치 차원에서 지배구조를 개편한 것으로 오너 일가의 승계와는 무관하다”며 “분할·합병 비율의 적정성을 지적한 참여연대의 분석 역시 국내 사업의 손익만을 기준으로 했다. 해외 자회사의 실적을 포함한 연결재무제표 기준으로 판단하면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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