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美 정상회담의 변수 된 ‘태영호의 입’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5.17 22:27
  • 호수 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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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Insight] 北 매체, 태영호 전 공사를 ‘인간쓰레기’로 맹비난

 

순항하던 남북관계와 북·미 정상회담 일정에 돌출변수가 등장했다. 북한이 비핵화와 관련한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로드맵에 반발하고, 문재인 정부의 대북 관련 움직임에도 불만을 표시하고 나선 것이다. 북한은 5월16일 “트럼프 행정부가 일방적인 핵 포기만을 강요하려 든다면 다가오는 조·미 수뇌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대미통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의 개인 담화 형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북한 외무성이나 ‘정부’ 입장표명보다는 ‘비공식’적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미국과의 정상회담 약속을 파기하겠다는 점까지 시사하며 반발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문재인 정부로선 4·27 남북 정상회담과 판문점 합의의 정신 위배 운운하며 불만을 표시하고 나온 북한을 달래야 하는 고민에 빠졌다. 당초 5월16일 열기로 합의했던 남북 고위급 회담을 개최일 새벽에 “무기 연기한다”고 알려오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점에서다. 북한은 그 이유로 “남조선에서 무분별하게 벌어지는 북침 소동과 대결 난동이 벌어지는 험악한 정세”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미 5월11일부터 진행 중이던 ‘2018 맥스선더(Max Thunder)’ 한·미 연합 공중훈련을 ‘대북 선제타격 음모’라고 주장하며 회담판까지 깬 건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게 정부 당국의 분석이다.

 

© 시사저널 박은숙


 

北, 맥스선더 훈련 이유로 고위급 회담 거부

 

대북부처와 전문가들은 오히려 북한이 ‘대결 난동’이라고 주장한 대목을 유심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북한은 조선중앙통신 보도에서 “특히 남조선 당국은 우리와 함께 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해 노력하자고 약속하고서도 그에 배치되는 온당치 못한 행위에 매달리고 있으며 천하의 ‘인간쓰레기들’까지 국회 마당에 내세워 우리의 최고 존엄과 체제를 헐뜯고 판문점 선언을 비방 중상하는 놀음도 버젓이 감행하게 방치해 놓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인간쓰레기’ 운운하는 격앙된 반응을 보인 건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가 국회에서 자신의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 출간 기념식과 기자간담회를 개최한 걸 지목한 것이다. 태 전 공사는 북한의 비난 반응이 나오기 이틀 전인 5월14일 열린 간담회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4월20일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핵무기가 ‘강력한 보검’이자 ‘확고한 담보’라고 말했다”면서 “이것을 내려놓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완전한 북핵 폐기는 ‘환상’ 또는 ‘허상’이라면서 “북핵을 완전히 폐기하려면 군사적 옵션이나 국가적 경제제재를 밀어붙이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강조했다.

 

김정은 정권에 있어 태영호 전 공사의 존재는 눈엣가시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집권 5년 차를 맞아 한창 권력기반을 다져가던 2016년 여름 불거진 태 전 공사의 망명은 지구촌을 떠들썩하게 했다. 북한 엘리트 계층들의 체제 이반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관련 소식이 해외 사정에 밝은 북한 특권층들의 입소문을 타고 평양까지 전해졌고 파장이 만만치 않았다는 증언도 나왔다.

 

김정은 체제의 파수꾼 역할을 하던 태영호의 탈북과 망명이 북한 권력 핵심부에 던지는 메시지는 간단치 않았다. 그가 다른 외교관들과 달리 주재국 외교부 관계자나 제3국 외교관, 서방 언론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는 점에서다. 태영호는 런던 지역을 중심으로 북한체제를 옹호하는 강의를 활발히 했고 이 장면은 유튜브에도 올랐다. 2013년 런던에서 열린 한 강연에선 “핵실험과 위성 발사 이후 우리에 대한 제재의 강도가 세졌다. 제재를 통해서 우리나라의 발전을 막고 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정책과 노선을 바꾸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제재로는 우리를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정은 체제를 대변하는 데 최전선에 섰던 고위급 외교관이 망명길에 올랐다는 건 충격이었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오랜 해외생활로 다져진 국제 감각을 바탕으로 태영호는 평양의 논리를 전파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를 런던에 파견한 것도 이곳이 인권 실태를 비롯한 대북 비판여론의 중심축을 이뤄왔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입장을 바꿔 평양을 등진 것이다.

 

태영호 망명 당시 한국과 서방의 정보기관들은 그가 갖고 있을 고급 정보에도 관심을 보였다.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과 그 패밀리의 정보에 접근이 가능한 인물이란 점에서였다. 태 전 공사는 2015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형 김정철이 영국에 팝스타 에릭 클랩튼의 공연을 보러 왔을 때 그를 바로 옆에서 안내하고 보좌했던 인물이다. 김정은이 형을 믿고 맡길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는 의미다. 평양과의 조율 과정에서 김정철의 동향은 물론 김정은의 지시나 전달 사항 등을 직접 다뤘을 공산도 크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평양 핵심의 고급 정보를 상당부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이를 조사 과정에서 진술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동안 태영호 전 공사는 이 대목에 대해서는 인터뷰나 공개강연 등에서 말을 아껴왔다.

 

태영호 전 공사가 5월14일 펴낸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 © 연합뉴스


 

에릭 클랩튼 영국 공연 때 김정철 밀착 보좌

 

태 전 공사가 펴낸 책에서 김정철의 런던 체류를 비롯해 김정은 일가의 내부 스토리를 공개하자 북한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이란 관측도 있다. 태 전 공사는 김정철의 런던 방문 61시간 동안 줄곧 함께 있었다. 김정철이 음반매장을 둘러보거나 즉흥 기타연주를 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저서에 담았다. 또 셀프리지 백화점에서 아동복 매장에 들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북한으로선 태영호 전 공사의 책 발간이나 대북 비판 발언을 막지 않고 있는 문재인 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다. 또 앞으로 남북관계나 북·미 정상회담, 북한 핵 폐기와 관련해 김정은 체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번지는 걸 차단하려 합의된 일정에 제동을 건 것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태 전 공사는 자신의 책에서 북한의 핵 개발과 관련한 은밀한 내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망명 직전 열린 북한 재외공관장 회의에서 “2017년까지 핵 무력을 완성하고 2018년 초부터는 조선(북한)도 핵보유국의 지위를 공고화하는 평화적 환경조성에 들어가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인도·파키스탄 모델을 창조적으로 적용해 핵보유국으로 남는다”는 내용도 다뤄졌다고 주장했다. 이 말대로라면 김정은에게 있어 태영호 전 공사는 서울과 워싱턴을 상대로 막 공개된 ‘평화적 환경조성’이란 드라마 줄거리를 미리 알려버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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