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北 “유럽산 자동차 디젤기관 설계도면 수집·보고하라”
  • 김지영 기자 (young@sisajournal.com)
  • 승인 2018.05.18 10:52
  • 호수 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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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노동당 작성 《륭성사업관련 조국 지시 포치안》 입수 사실상 ‘해외 산업 스파이 활동 지시’…北 경제 엿볼 수 있어

 

4·27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 물꼬가 하나씩 트이고 있다. 철옹성처럼 걸렸던 남북 간 빗장도 조심스럽게 열리고 있다. 한반도 정세가 불과 6개월 전과는 180도 달라졌다. 오는 6월12일엔 북·미 정상회담도 열릴 예정이다. 이 회담까지 무탈하게 매듭지어지면 남북관계는 또 한 차례 질(質)적 전환을 맞게 될 것이다.

 

남북, 북·미 간 화해와 교류 무드로 각종 청사진이 쏟아지고 있다.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무엇을 받아낼 것이냐가 우선 관심이다.

 

북한이 체제 안정 보루로 여겼던 핵무기를 포기하면서 얻으려 하는 건 명확하다. 바로 경제 발전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유엔 등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제재 해제가 선행돼야 할 것이다. 여기에 북한에 대한 대대적인 경제 지원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럴 조짐이 엿보인다. 최근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온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대북 투자 허용 가능성을 언급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만약 북한이 조속한 비핵화를 위해 과감한 조치를 취할 경우 미국은 한국만큼 번영을 이룰 수 있도록 북한과 협력할 것이다. (미국의) 민간 부문이 (북한의) 대규모 에너지망 건설을 돕고 식량난 해소를 위한 농업 투자와 인프라 투자가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4월30일 평양에서 당의 새로운 전략적 노선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한 당, 국가, 경제, 무력기관 일군연석회의가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5월1일 보도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남북, 북·미 간 대화와 교류가 이뤄지면서 북한 경제 실상에 대한 관심도 부쩍 커졌다. 북한 내 자본주의 형태인 장마당 문화도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하지만 북한 경제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북한은 국가계획경제 체제다. 모든 정보가 통제된다. 따라서 북한이 대외적으로 공개하는 각종 경제지표에 대한 신뢰도도 의문이다.

 

그런데 최근 시사저널은 북한 내부 경제 현주소를 엿볼 수 있는 자료를 입수했다. 북한 조선노동당이 작성한 《륭성사업관련 조국지시 포치안》이란 문건이다. 이 문건은 북한이 해외의 자국 대사관과 영사관 등에 내려보낸 기밀서류다. 이 문건에 적시된 농업과 산업 기술자료와 서비스, 물품 등을 해당 국가에서 수집해 ‘조국(북한)’으로 보내라는 지시사항이 담겨 있다. 정통한 북한 소식통은 “북한은 해마다 상반기와 하반기 두 차례에 걸쳐 포치안을 전 세계 해외공관에 내려보낸다”며 “해외공관들은 포치안에 나오는 지시사항에 따라 해당 국가의 기술과 물품을 수집해 조국(북한)으로 보낸다”고 말했다.

 

본지가 입수한 《륭성사업관련 조국지시 포치안》은 A4용지 7장 분량이다. ‘륭성’은 융성, ‘조국’은 북한을 뜻한다. ‘포치’는 포섭한다는 의미로 추정된다. 조선노동당이 지난해 말 작성·하달한 이 포치안에는 올해 6월말까지 비밀리에 수집해야 하는 해외 기술과 물품 목록이 자세히 적시돼 있다. 한마디로 ‘2018년 상반기 산업 스파이 활동 지침’으로 볼 수 있다.

 

 

北, 해외공관에 석탄·농업 기술 수집 지시

 

이 포치안을 들여다보면, 북한의 농업과 산업 기술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조선노동당은 이 문건 도입부에서 포치안이 왜 작성됐으며 그 목적이 무엇인지 밝혔다. 문건에 따르면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과학자들을 다른 나라에 보내 배울 것은 배우도록 하며 다른 나라에 가보고 좋은 것은 우리 실정에 맞게 받아들이도록 함”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자국 해외공관에 “대표부들은 앞으로 당의 방침에 따라 주재국 및 담당나라에 나가게 되는 대표단들의 참관 교섭을 비롯해 제기되는 사업을 적극 방조하며, 우리 실정에 맞는 선진 과학기술 자료와 현품들을 수집할 것”을 지시했다. 북한은 주체사상 국가다. 문건에 ‘우리 실정’ ‘주체화’란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를 반영한다. 문건은 또 “지난 시기 위대한 수령님께서 좋다고 평가하신 대상”에 대해 “경제외교 활동의 항구적인 지침으로 삼고 애국사업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설 것”을 독려했다.

 

북한 조선노동당이 지난해 말 작성한 《륭성사업관련 조국 지시 포치안》


 

“메기 종자 들여오고, 양식 자료 적극 수집”

 

노동당은 북한 경제 기반인 석탄 부문과 농업 기술에 대한 수집을 강조했다. 석탄 부문에서는 석탄 액화 기술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석탄 액화 기술이 앞서 있는 독일, 영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중국, 미국 등의 기술개발 수준이 어느 정도이며, 직접 액화인지 간접 액화인지, 생산량은 얼마인지 등에 대한 자료를 ‘료해(요해·사정이나 형편이 어떤지 알아봄)’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석탄 채굴에 이용되는 선진 채굴공법 기술자료’를 수집할 것을 지시했다. 특히 소형운반적재기 설계도면과 공기압축기 자료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북한의 중국 선양(瀋陽) 총영사관을 통해선 ‘중국 길림성 훈춘지구 탄광들에서 이용되고 있는 갱내 석탄층 가스 추출기술, 가스 흐름양 측정기와 관련한 기술자료’를 입수할 것을 지시했다. 훈춘 지역엔 중국 지린성(吉林省)에서 가장 큰 탄광과 두 번째로 큰 금광이 있다. 그만큼 탄광 기술이 발달해 있고 북한도 이를 주목한 것 같다. 특정지역(훈춘)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면서까지 수집 활동을 독려한 것이다.

 

식량 사정이 안 좋은 것으로 알려진 북한의 농업에 대한 관심도 상당하다. 문건을 보면, 재배 농법뿐 아니라 설계도면, 물 절약 농법, 종자 및 과일나무 품종, 식료품 견본 수집 등 다방면에서 농업 정보를 비밀리에 취합하고 있다. 북한이 수집하고 있는 농업 관련 정보도 다양하다. △강냉이 1대 잡종 육성 △밭벼 육성 △내염성(耐鹽性) 알곡작물 육성 △감자 가공 설비와 가공제품 생산관련 기술 △송이버섯 인공재배관련 자료 △벼 종합수확기 자료 △온실 채소 재배 △물 절약 농법 등을 두루두루 수집하고 있다.

 

씨앗(종자)을 중시하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특히 △다수확 품종의 알곡종자 △병충해에 강한 종자 △냉해(冷害)·내염성 종자 △비료를 적게 쓰는 종자 △러시아산 대량 수확 감자 원종 △우량 온실 채소 종자 △우량 뽕나무 묘목과 누에 종자 등을 지시했다. ‘감자 가루 견본과 감자 가루를 가공해 만든 식료품 견본’도 수집 대상에 포함됐다. 흥미로운 종자도 있다. 바로 물고기 ‘메기’다. 문건에 따르면, 북한은 해외공관에 ‘다른 나라에서 종자 메기를 들여올 수 있도록 실무적 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하면서 ‘종자 메기 구입과 관련해 대외교섭에서 제기되는 실무적 문제를 적극 도와주며 메기 양어 기술자료 수집사업을 적극 벌일 것’을 강조했다. 북한이 메기 양식(養殖)에 큰 관심을 갖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결핵·성병 예방 치료 기술 자료’도 수집

 

눈길을 끄는 대목은 또 있다. 식초음료도 주목하고 있다. ‘식초로 만든 초음료가 사람들 건강에 좋음. 무더운 여름철에 사이다나 단물 마시는 것보다 초음료 마시는 것이 좋음’이라 전제하면서 ‘지금 다른 나라들에서 과일식초로 만든 초음료를 비롯해 여러 가지 초음료 생산하고 있음. 초음료 생산 기술 자료와 견본 수집활동 적극 벌이고 결과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농법과 종자뿐 아니라 농업 기계 관련 정보도 관심사다. 특히 유럽에서 생산되고 있는 80-120HP급 트랙터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 트랙터의 설계도면과 생산 공정 자료를 수집하라는 것이다.

 

자동차 기술도 수집 목록에 올라 있다. ‘유럽 나라들의 115HP급 자동차 디젤기관 설계도면과 생산 공정 자료’와 ‘화물자동차 동력 전달 장치인 크라치(클러치) 마찰재료 조성과 주조 방법’ ‘자동차 도장 공정 자료’ 등을 북한으로 보내라는 지시도 내렸다.

보건과 관련된 정보도 수집 대상이다. ‘결핵과 성병 예방 치료 기술 자료’에도 주목한다. 문건에는 ‘(해외공관) 주재국 실정에 맞게 수집활동을 벌이고 결과를 (당에) 보고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나와 있다.

 

오는 8월18일부터 9월2일까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팔렘방에서 열리는 제18회 아시안게임과 관련된 정보 수집도 노동당 관심 대상이다. ‘제18차 아시아경기대회 참가 준비를 하고 있는 종목들의 체육정보자료들을 정상적으로 수집해 (북한) 체육성과 축구연맹에 보내주기 위한 대책’을 세울 것으로 지시했다. ‘종목별 체육 정보자료 수집활동을 적극 벌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지가 입수한 문건은 북한 노동당이 지난해 말 작성해 북한 해외공관에 하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1월1일 김정은 북한 위원장의 신년사를 계기로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노동당이 작성해 하달한 문건에 나와 있는 지시사항은 지금도 유효한 것일까. 이에 대해 정통한 북한 소식통은 “북한 노동당 포치안은 일회성 지시사항이 아니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시행돼 왔고 실제 성과도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남북과 북·미 관계가 호전됐다 해도 북한은 지금도 비밀리에 기술 자료 수집활동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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