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무장한 新인류 등장에 무너진 ‘리스크 공화국’
  • 김종일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18.05.23 10:58
  • 호수 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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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제와 2018년 체제의 충돌이 원인…투명하게 정보 공개·공유해야 신뢰 회복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뉴욕 양키스 전설의 포수 요기 베라가 남긴 이 명언은 2018년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대기업들의 오너 리스크는 성난 여론과 상승효과를 내면서 증폭되고 있다. 어떤 리스크는 한 기업이 수십 년간 노력해 끌어올린 주가를 반 토막 냈다. 반면 모든 걸 집어삼킬 것 같던 어떤 리스크는 가벼운 생채기만을 남기고 소멸되기도 한다. 위기의 순간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천양지차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기업 이미지·주가·실적 무너뜨리는 리스크

 

리스크의 충격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가리지 않는다. 집권 2년 차에 80%를 넘나드는 ‘사상 초유의 지지율’을 자랑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연초만 해도 수렁 속에 있었다. 가상통화 시장에 대한 규제와 평창동계올림픽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이 논란의 도마에 오르자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핵심 지지 기반인 2030세대가 등을 돌릴 조짐에 당시 문재인 정부에서는 ‘진짜 위기’라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불과 100일 전의 일이다. 문 대통령은 특유의 리더십으로 위기를 반전시켰다. “언제든지 마지막 반전의 기회는 있다”는 요기 베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 시사저널 임준선·연합뉴스


경제권력에 ‘리스크 충격’은 매우 낯설게 그리고 그만큼 더욱 가혹하게 다가온다. 일부 재벌 3·4세들의 일탈행위는 ‘갑질’이라는 새로운 명명을 통해 그 기업의 뿌리를 뒤흔드는 가장 큰 리스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던 이들의 갑질은 ‘막장 드라마’처럼 국민적 공분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부정적 여론은 그동안 공들여 쌓은 기업 이미지를 한 방에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 주가와 실적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최근 성난 여론은 과거와 달리 승계 구도 같은 이슈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해당 기업은 물론 관련 정부부처가 ‘압박’을 느낄 만한 수준으로까지 여론이 형성된다. 과거와는 양과 질 모두에서 차원이 다른 ‘분노’다. 

 

분명히 과거와는 다른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최근 리스크가 시작·상승·증폭·수습되는 과정은 ‘고위험 고수익(high risk-high return)’이라는 단순한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정치·경제 권력이 동원 가능한 모든 자원을 쏟아도 어떤 리스크는 왜 더 증폭되는 것일까. 정치·경제 권력의 꼭짓점에 있다고 인식되는 청와대와 삼성조차 리스크를 왜 사전에 감지해 막지 못할까. 대체 무엇이 달라진 걸까. 쉬운 질문 같지만 답하기는 대단히 복잡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보면 새로운 현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서로 다른 문화·기술 등이 한 시대에 같이 존재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말이다.

 

달라진 현실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개인의 등장을 꼽는다. 바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과 디지털 혁명의 세례를 받은 ‘디지털 개인’이다. 최근 대한민국의 상당수 직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을 예로 들어보자. 회사의 토요일 산행 일정은 어느 날 젊은 직원에 의해 ‘노예 짓’으로 명명됐다. 선배 사수는 단합으로 생각했는데, 후배 부사수는 동원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산행 후 술자리에서 후배가 선배를 챙기지 않았다는 지적은 그 회사의 블라인드 앱에서 도마에 오른다. 선배는 후배가 야속하기만 하다. 완전히 다른 문화와 기술 간의 충돌이다. 위기관리 전문 컨설팅회사 에이케이스의 유민영 대표는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개인의 등장으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기술로 무장한 새로운 개인은 더 이상 부조리하고 불공정한 일을 참지 않는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부조리를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이전 세대보다 강하다. 그런데 과거에는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날 일이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다. 바로 스마트폰과 SNS 등으로 한국 사회가 ‘초연결 사회’가 됐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개인을 ‘1인 미디어’로서 활동할 수 있게 했다. 이젠 꼭 언론을 통하지 않고서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과거에는 몇몇 주요 언론사를 회유·설득하면 ‘갑질 리스크’는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권력기관들과의 결탁 속에 모종의 거래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문제가 덮어지지 않는다.

 

5월10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10대 그룹 정책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던 도중 금속노조 관계자가 손현수막을 펼치며 시위하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초연결 사회’ 되면서 재벌 갑질 생중계

 

유 대표는 ‘재벌 3·4세 리스크’가 반복해서 발생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했다. 일부 재벌 3·4세들의 일탈행위는 사실 재벌 1·2세들의 추태와 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과거에는 이런 문제들이 ‘사회문제’로까지 커지지 않았다. 갑질의 피해자에게 많은 보상금을 쥐여주고 권력기관을 움직여 처벌을 최소화했다. 그런데 세상이 변했다. 2018년 한국 사회에서는 재벌 3·4세가 설사 피해자와 합의를 한다고 해도 문제가 덮어지지 않는다. 갑질을 지켜본 새로운 개인들은 끊임없이 ‘고백’과 ‘고발’을 이어간다. 갑질의 디테일한 내용은 온라인을 통해 생중계되다시피 한다.

 

사실 기업들이라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11년 ‘CEO가 주목해야 할 4대 리스크’라는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가 지목한 4대 리스크는 기업생태계 리스크, 사회적 책임 리스크, 원자재 리스크, 그리고 소통 리스크다. 보고서는 특히 기업이 ‘소통의 주도권’을 잃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보고서는 “소셜미디어의 부상으로 전통적 대중매체가 주도하던 언론 지형에 변화가 생긴 것은 물론 기업의 정보 주도권도 위축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기업의 소통 부재나 오류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되면 기업의 신뢰와 명성이 한순간에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기업들의 리스크에 대한 대응 방식은 아직 구태의연하다. 리스크 매니지먼트(위기 대응)의 기본은 투명성과 제대로 책임지는 자세다. 그런데도 재벌 총수들은 갑질을 저지르고 거짓말과 책임 회피라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반복한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참사 수준이다. 그럼에도 비슷한 일이 기업명만 바꿔서 계속 일어나는 이유는 뭘까. 바로 ‘시차’다. 재벌 3·4세들이 ‘그들만의 세상’에 살다보니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유 대표는 “한국의 재벌 총수는 물론 3·4세들조차 정신과 가치, 습관의 소프트웨어는 아직도 권위주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며 “우리 기업들은 사내 문화가 강력한 경쟁력임을 간과하고 자신들이 이 회사의 유일한 주인이고, 직원들에게 시혜를 베푼다고 생각해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하는 일을 반복해서 저지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위기를 기회’로 살린 사례도 많다. 반전의 기회를 살린 조직들은 투명성과 연결성이라는 공통된 가치를 중시했다. 즉 잘못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공유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리더에게 직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반드시 구축한다는 것이다.

 

먼저 투명성이 위기 극복에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2011년 영국 공영방송 BBC는 엄청난 스캔들에 휘말렸다. BBC 간판 코미디언이자 DJ였던 지미 새빌의 사망 1년 후 그가 다수의 미성년자를 포함해 수많은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의 성도착증 관련 의혹을 보도하려 했던 BBC 뉴스의 시도를 데스크에서 무산시켰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사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1월24일 오전 경북 포항 북구 흥해읍 대성아파트 지진 피해 현장을 살펴보고 복구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 청와대 제공


 

BBC의 위기 대처 과정 반면교사 삼아야

 

위기의 순간 BBC는 과감히 두 명의 외부인을 조사 책임자로 선임한다. 전직 판사인 데임 재닛 스미스를 발탁해 BBC 내부의 관행과 조직문화에 대한 진단과 조사를 맡긴다. 또 한 명의 외부인인 닉 폴러드에게는 새빌의 성도착증 관련 불방 사건을 맡긴다. 닉 폴러드는 BBC의 경쟁사인 스카이뉴스의 대표를 지냈던 사람이다. 데임 재닛 스미스는 광범위한 조사를 통해 새빌의 피해자들로부터 증거를 수집했고, 스캔들에 관련된 사람이 290명 이상이라고 밝혀냈다. 닉 폴러드는 새빌 의혹 보도를 저지했던 데스크의 결정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이 새빌을 비호하기 위함은 아니었다고 결론지었다. 다만 BBC의 사장이 새빌의 추문에 대한 제보를 무시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는 결론을 냈다.

 

결국 당시 에디터였던 임원들이 해임됐다. 얼마 후 사장까지 대표직을 사임한다. BBC는 이 모든 과정과 결과를 여러 채널을 통해 대중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했다. 현재도 이 사건에 대한 웹사이트(JIMMY SAVILE SCANDAL)를 유지하고 있다. BBC는 조사에 500만 파운드(약 73억원) 이상을 지출했다. BBC는 위기에 대처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핵심은 BBC와 시청자의 신뢰관계에 있고 그 관계가 붕괴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던 것이다.

 

연결성의 가치가 리스크 관리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다. 그는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청와대 참모들과 같은 건물에서 함께 일한다. 홀로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게 아니라 비서동으로 출근하면서 참모들과 다양한 안건에 대해 수시로 상의한다. 동시대 평범한 사람처럼 출근하고 퇴근하는 게 왜 리스크 관리에 중요할까. 전략 전문가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의 설명은 의미심장하다. “누구나 실수는 한다. 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같은 실수를 거의 반복하지 않는다. 바로 참모들과 상의하면서 문제를 즉각 시정하기 때문이다. 사소한 차이지만 중요한 차이를 낳는다. 문재인 정부가 큰 위기에 빠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리더가 참모들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전임 정권과 비교해 보면 분명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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