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의 전당 ‘칸’에서 평등을 외치다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5.25 11:19
  • 호수 1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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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분 불평등 판치는 칸 영화제 70년의 오욕사

 

제71회 칸 영화제가 5월19일 막을 내렸다.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만비키 가족》이 영예의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세 번째 일본 감독이다.

 

올해 칸 영화제는 시작 전부터 영화가 아닌 ‘사회적 이슈’로 주목을 끌었다. 바로 지난해 10월 터져 나온 하비 와인스타인 파문 때문이다.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한 프랑스 언론이 내놓은 타이틀은 ‘와인스타인 없는 칸’이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올해 칸에선 유난히 여성 영화인들의 목소리가 높았고 사회적인 이슈가 전면에 나왔다. 대상 수상작인 《만비키 가족》에서도 영화를 이끄는 주요 인물 등이 여성이었으며,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레바논의 여성 감독인 나딘 라바키는 수상 소감에서 자신의 작품 주제이기도 했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거리의 아이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5월14일 칸 영화제 레드카펫 위에서 하이힐을 벗고 있다. © EPA 연합


 

성 평등 주장하기엔 너무 불평등한 영화제

 

올해의 칸 영화제는 심사위원장도 여성이었다. 바로 호주 출신 여배우 케이트 블란쳇이다. 총 71회 치러진 칸 영화제에서 그간 여성 심사위원장은 케이트 블란쳇을 포함해 12명에 불과했다. 영화제는 매년 성 평등 요구의 장이 돼 왔지만 정작 심사위원장 자리에서부터 남녀평등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칸 영화제 70년 역사 속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여성 감독은 단 2명뿐이었다. 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여성 감독은 1993년 《피아노》를 연출한 제인 캠피온이 유일했으며, 그마저도 《패왕별희》 감독 첸카이거와의 공동수상이었다.

 

매년 칸 영화제에선 마치 연례행사처럼 영화계 성 평등 문제를 다뤄왔다. 대표적인 해가 2013년이었다. 당시 여성인권부 장관이었던 나자트 발로 벨카셈은 프랑스의 극작가 및 작곡가 협회가 주관한 ‘영화계의 여성’ 주제의 세미나에 참석해 “문화부와 함께 (영화계 성 불평등) 상황에 대해 엄밀히 파악하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듬해에도 다시 칸 영화제를 찾아 같은 문제를 거론했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발표되는 영화에서 여성 감독 비중은 2008년 18%였고, 2012년에도 23%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매년 영화제가 열리는 칸 해변에선 여성 문제에 대한 행사가 끊임없이 마련됐다. 아이러니한 건 이런 행사들이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함에도 언론의 뜨거운 플래시 세례를 받는 반면, 정작 40년째 파리 주변 도시 크레테이에서 열린 국제여성영화제는 거의 세간의 관심을 받지 못해 왔다는 사실이다.

 

칸 영화제가 안고 있는 불평등은 비단 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프랑스 시사주간지 ‘르 주르날 드 디망쉬’는 “칸은 불평등의 상징”이라고 단언했다. 칸 영화제는 철저히 계급적이며, 영화제를 찾는 모든 이들이 각각 부여받은 ‘배지’에 따라 철저하게 통행자격이 제한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칸에 입성하는 순간 ‘신분’이 나뉘는 것이다.

 

칸 영화제 동안 방문객과 관계자에게 지급되는 배지는 여러 종류로 나뉜다. ‘백색 배지’는 가장 중요한 인사들에게만 지급된다. 언론도 인지도에 따라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나뉜다. 기술자는 ‘녹색’, 사진가는 ‘오렌지색’ 배지를 지급받는다. 현지 기자가 칸 영화제를 두고 “카스트의 세계”라고 정의한 건 바로 이런 모습 때문이다.

 

이러한 철저한 신분제와 함께 칸의 권위를 세우는 건 ‘엄격한 의전’이다. 그 백미는 바로 레드카펫 행사에서 발휘된다. 다른 영화제에서 레드카펫이 그저 사진 촬영을 위한 시간이라면, 칸의 레드카펫은 영화 제작자·감독·배우가 최고의 의전 속에 극장에 입장하는 과정이다. 감독과 배우들이 자리에 앉기 전까지 영화는 시작되지 않는다.

 

올해는 셀카마저 금지됐다. 최근 들어 배우나 참석자들이 셀카를 찍느라 이동이 지체되자 행사 진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를 들어 셀카 촬영을 금지한 것이다. 이러한 독재적인 시스템에 반발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칸에 대한 반항은 주로 집행부가 함부로 할 수 없는 또 다른 권력자, 할리우드 출신 배우들의 몫이다.

 

제71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은 배우 케이트 블란쳇 © AP 연합


 

“남자배우에게도 하이힐 권하라”

 

올해 칸의 레드카펫 행사에서 할리우드 스타인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하이힐을 벗고 맨발로 계단을 뛰어올랐다. 칸 영화제의 의전상 여배우들은 하이힐을 신도록 돼 있다. 스튜어트는 이러한 규칙에 반기를 들었다. 하이힐을 벗어던진 것은 그녀가 처음이 아니다. 2015년 줄리아 로버츠도 맨발로 레드카펫 계단을 올랐다. 2014년 하이힐을 신지 않았다는 이유로 입장이 금지됐던, 일명 ‘힐게이트’에 대한 반발이었다. 당시  크리스틴 스튜어트도 인터뷰 중 하이힐 규정에 대한 질문에 “남자배우들에게도 똑같이 하이힐을 권하라”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반발은 그나마 할리우드 배우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화제 집행부에 대한 비판은 언론에조차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르 주르날 드 디망쉬의 카를로스 고메즈 기자는 칸의 전 집행위원장이었던 질 자콥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가 곧장 배지 발급이 정지되기도 했다. 프랑스 배우나 영화계 인사 중 칸 집행부에 대놓고 반기를 든 건 1979년 심사위원장을 맡은 프랑수아 사강이 유일하다. 《슬픔이여 안녕》으로 대표되는 여성작가 사강은 영화제 직후 대상작 선정을 두고 주최 측의 압력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이후 칸 집행부는 사강에게 돌아갈 각본료를 지불하지 않았으며 끈질기게 뒤끝을 보이며 그녀를 괴롭히기도 했다. 심지어 프랑스 누벨바그의 거장으로 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마저도 기자 시절 칸에 비판적인 기사를 썼다가 철저히 입장을 거부당한 바 있다. 그가 칸에 다시 입성한 건 수년 후 기자가 아닌 감독 자격으로였다.

 

이렇게 보수적인 칸 영화제에서 성 평등이 실현될 수 있을까. 5월12일 여성 영화인 82명이 선보인 레드카펫 행사에서 심사위원장인 케이트 블란쳇은 “누구나 영화제 계단을 올라갈 수 있어야 한다”고 일갈하며 “우리 함께 오르자”고 선언했다. 그러나 칸 영화제는 배지 없이 계단은커녕 영화제 근처 접근조차 어렵다. “모두에게 평등한 칸 영화제”는 아직까지 공허한 외침이자 바람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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