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든 공모자들, 그들은 알았다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5.25 12:07
  • 호수 1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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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디지털 성범죄 수사에 분노한 여성들

 

한·미 정상회담과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북·미 정상회담 같은 굵직굵직한 뉴스들이 언론매체 대부분의 지면과 시간을 점유하고 있음에도, 청와대 국민청원과 SNS가 놓지 못하고 있는 주제가 있다. 홍대 누드모델 ‘불법촬영’ 사건이 이례적인 속도로 수사가 진행되자, ‘몰카’ 범죄 또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입은 수많은 여성에 대해서는 수사가 그렇게까지 친절하고 신속하지 않았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이런 와중에 지금까지 소위 ‘몰카범죄’ 또는 ‘리벤지 포르노’와도 결이 다른 범죄가 고발되었다. 피팅모델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간 여러 명의 모델들이 소위 ‘비공개 촬영회’라는 행사에서 성폭력을 당하고도 이제야 겨우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홍대 누드모델 불법촬영이나 다양한 몰카범죄도 무서운 일이지만, 비밀장소에서 젊은 여성을 카메라로 집단 성폭력을 가하는 현장에 너도나도 가담했을 바로 그 남자들이 너무나 무섭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있을까봐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이 와중에 영화배우 배수지가 피해자를 응원하고 가해자를 처벌해 달라는 청원에 참여했다가 괴상한 이지메를 당하기도 하는 등, 이리저리 옆으로 새는 뉴스들이 논점을 흐리고 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범죄자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5월1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집회에서 여성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뉴시스


해당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촬영회 참가자를 모집하는 등의 ‘짓거리’를 저지른 남성은 “계약이었다” “자발적이었다” 등등의 말로 범죄행위를 적극 부인하고 있지만, 촬영한 사진을 외부로 유출하는 것을 금한다는 참가조건만 놓고 보아도 촬영한 내용이 범죄임을 이미 알았다. 두 피팅모델 피해자의 폭로 직후 남성들이 이용하는 동영상 사이트들에서 게시물이 대량으로 삭제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 또한 이 사태의 본질을 그들 모두가 다 알고 있음을 말해 준다. 성범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성범죄지만, 들키지 않는 동안엔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저질렀고 들킬 조짐이 보이자 재빠르게 숨어 들어가는 성범죄.

 

경찰은 홍대 불법촬영 범인을 구속한 것이 증거를 말살하고 도주의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옳은 이야기고, 잘한 일이다. 하지만, 수도 없이 많은 동영상들이 삭제되고 있는 현실은 명백한 증거 말살이 아닌가? 그 동영상들을 보존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삭제로써 범죄를 만천하에 고백하는 중인 이 범죄자들에 대해서도 구속수사를 하라는 것이다. 요즘처럼 사이버수사 기법이 발달한 시대라면, 가해자들의 범위가 조금 넓은 것이 큰 장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드라마 《라이브》를 보면서 나는, 내가 익히 아는 제대로 공무수행을 하는 경찰들을 자주 떠올렸다. 2층에 사시는 치매 앓는 할머니가 길을 잃을 때마다 찾아내고 보호하는 우리 동네 지구대 경찰들을 생각했다. 소위 말하는 민생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일을 맡은 바로 그 경찰이 ‘무O유죄 유O무죄’라는 비난을 듣는 것은 다소 억울한 일이라고 나도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디지털 성범죄는 조직화되고 신종 산업이 되었다. 수사관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인지 역량 제고나 선량함이나 열정, 개인기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경찰 조직 전체에서 성범죄 특히 디지털 성범죄와의 대대적인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 조폭을 단속하고 마약을 단속하듯이 그렇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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