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여 스크린을 점령하라”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6.01 15:50
  • 호수 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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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스무 살 맞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핵심은 ‘미투’와 ‘여성’

서울국제여성영화제(Seoul International Women’s Film Festival·SIWFF)가 스무 살을 맞이했다. 1997년 ‘여성이여, 영화 앞에 연대하라!’라는 힘찬 캐치프레이즈 아래 10개국 38편 규모로 출발했던 영화제는 어느덧 36개국 147편을 상영하는 영화제로 성장했다. 올해는 5월31일부터 6월7일까지 서울 메가박스 신촌에서 총 8일간 관객과 만난다. 

 

이 영화제는 매년 세계의 다양한 여성 영화를 선보였을 뿐 아니라 10회에서 도입한 박남옥 영화상을 통해 진취적 활동으로 한국영화계에 좋은 선례를 남긴 여성 감독을 지원했다. 12회에서 처음 도입한 피칭 프로그램 ‘피치 & 캐치’ 등을 통해 여성 영화인과 신작을 발굴하는 등 적극적으로 선순환 구조를 모색해 오기도 했다. 올해는 경쟁부문 신설로 그 고민의 층위를 한층 넓혀간다. 17회부터 이어지며 화제를 모았던 영화제의 홍보대사 ‘페미니스타’는 1대 김아중, 2대 한예리를 거쳐 올해 배우 이영진이 바통을 이어받아 영화제 기간 중 활약한다.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한층 알찬 성장을 모색하는 20회 SIWFF의 면면을 들여다본다. 

 

베이징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에 사는 싱글맘의 이야기를 그린 《행복하길 바라》 중 한 장면


 

 

가장 굵직한 변화, 경쟁부문 신설

 

축제를 여는 개막작은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 아녜스 바르다의 신작 다큐멘터리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다. 칸 국제영화제 기간 여성 영화인들의 영화계 성 평등 요구 시위 당시 함께 참여한 82명 가운데 대표로 성명을 발표하는 등 89세의 나이에도 아직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그다. 이번 다큐는 바르다가 사진작가 JR과 함께 프랑스의 쇠락한 마을들을 돌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진을 즉흥적으로 찍는 내용을 담았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인화된 사진은 거대한 벽화가 돼 마을을 하나의 살아 있는 전시장으로 바꿔놓는다. 삶과 예술에 대한 통찰력이 빛나는 유쾌한 작품이다.

 

올해 신설한 국제·한국장편경쟁부문은 괄목할 만한 변화다. 역량 있는 미래 여성 영화인을 보다 폭넓게 발굴하고 지원하겠다는 취지다. 이는 영화제가 안고 있는 오랜 꿈이기도 했다. 관객에게는 긍정적 자극을, 여성 감독들에게는 생산성을 독려하는 의미를 담았다. 여성 감독의 영화가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크게 향상됐다는 믿음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로써 기존 아시아 단편경선, 아이틴즈까지 SIWFF의 공모전 규모는 총 4개 부문으로 확대됐다. 영화제 기간 중 국제장편경쟁 섹션에서는 8편, 한국장편경쟁 섹션에서는 5편이 자웅을 겨룬다. 

 

국제장편경쟁에서는 성매매 여성과 이민자 여성의 외로운 여정을 따라가는 《나는 태양의 한 방울》, 결혼 35년 차에 남편으로부터 감염돼 HIV 양성 판정을 받은 여인의 선택을 조명하는 《텅 빈 여자》, 베이징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에 사는 싱글맘의 이야기를 그린 《행복하길 바라》 등을 주목할 만하다. 중증 발달장애가 있는 동생이 시설에서 나온 뒤, 감독이 직접 동생과 함께 살게 된 첫 6개월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든 다큐 《어른이 되면》 등 한국 장편 경쟁작들의 면면도 뛰어나다.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 아녜스 바르다의 신작 다큐멘터리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중 한 장면


 

2002년부터 시작된 다큐멘터리 제작지원 프로그램 옥랑문화상의 열여섯 번째 작품은 이선희 감독의 《얼굴, 그 맞은편》이다. 지난해 수상작으로 선정, 제작지원을 받아 완성한 뒤 올해 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하는 작품이다. 당국이 불법 음란 동영상 사이트 ‘소라넷’ 폐쇄를 선언한 이후에도 영상 유출 피해자들이 여전히 ‘콘텐츠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고발한다. 이 다큐는 피해자의 맞은편에서 성폭력 영상을 소비하고 유통하는 사람은 누구인지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SIWFF의 인기 섹션인 퀴어 레인보우에서는 장편과 단편을 모두 포함해 총 16편의 작품을 선보인다. 성적 소수자들의 삶과 사랑을 다룬 영화를 조명하는 섹션으로 미국·영국·부탄·일본·한국 등 다양한 국가 퀴어들의 삶을 다룬 영화들이 준비돼 있다. 영국 BFI국립아카이브에서 소장 중인 20세기 퀴어의 역사 자료를 모아 재구성한 《퀴어라마》, 2004년 문을 닫은 LA의 흑인 레즈비언 스트립 클럽을 탐색한 다큐 《쉐이크다운》 등이 관객과 만난다.

 

20주년을 돌아보는 기획으로 ‘20주년 기념 앵콜전’도 마련돼 있다. 그간 영화제에서 관객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음은 물론, 국가와 장르를 넘어 여성 영화 역사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긴 작품들을 재조명하는 취지다. 《내가 여자가 된 날》(2008), 《더 파티》(2017) 등 외화 8편과 《미쓰 홍당무》(2008), 《화차》(2012) 등 2000년대 들어 한국 여성 영화의 더욱 다양해진 대중적 흐름과 미학적 성취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한국영화 19편을 상영한다. 20주년 기념사업으로 ‘20, 그녀들의 단편’이라는 한국 여성 감독 단편 DVD 컬렉션 출시를 준비하는 것 역시 그 일환이다. 

 

 

20년을 돌아보고 또 다른 20년을 준비하다

 

상영작 외적으로도 페미니즘을 둘러싼 사회적 분위기를 영화제 전반에 예민하게 반영했다. 대표적인 것은 ‘쟁점토크’다. 낙태죄 폐지 이슈, 디지털 성폭력, 미투 운동 등 다양한 여성 이슈들을 토론하는 장을 마련했다. 특히 6월6일 열리는 페미니스트 미디어 미평가이자 대중 강연자인 아니타 사키시안의 토크 프로그램인 《이제 신물 나: 온라인 괴롭힘의 대가》를 주목할 만하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태도들이 어떻게 여성의 침묵을 강요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자리다. 두 번의 국제 컨퍼런스를 통해서는 세계적 관점에서 영화산업 성 평등, 페미니즘 비평 등을 논의하며 새로운 관점을 모색한다. 1대부터 3대까지 역대 페미니스타들이 총출동해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한층 편안한 분위기의 토크 프로그램들 역시 마련돼 있다.

 

20년을 돌아보기만 하는 자리는 아니다. “20회 SIWFF는 앞으로의 20년을 준비하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번 영화제를 준비한 이들의 마음가짐이다. 김선아 집행위원장(수석 프로그래머 겸임)은 지금까지의 SIWFF를 크게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한다.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 ‘여성은 좋은 영화를 만든다’ ‘여성들이여 스크린을 점령하라’. 이번 영화제는 이런 SIWFF의 캐치프레이즈를 더욱 널리 알리며 한층 단단히 다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향후 영화제의 발전적 그림을 그려 나가기 위해서도 올해는 중요하다. 영화제 측은 앞으로 SIWFF를 통해 비평 언어가 점차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과, 전용 상영관에서 안정적으로 영화제를 꾸려 나갔으면 한다는 등의 바람을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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