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키운 전명규, 빙상계를 장악하다
  • 유지만 기자 (redpill@sisajournal.com)
  • 승인 2018.06.04 17:12
  • 호수 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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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부 빙상연맹 감사 결과에서 드러난 ‘전명규 천하’의 암(暗)

대한빙상경기연맹(빙상연맹)의 비정상적인 운영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5월23일 빙상연맹 특정감사 결과를 발표하고, 국가대표 선발부터 경기복 선정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절차와 규정이 무시된 점을 확인했다. 

 

빙상연맹의 운영에 대한 문제는 오랜 시간 제기돼 왔다. ‘빙상 대부(代父)’로 불리는 전명규 전 빙상연맹 부회장의 전횡이 심각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문체부 감사에서도 전 전 부회장이 과도한 영향력을 곳곳에서 행사한 정황이 포착됐다.  

 

전 전 부회장은 빙상계에서 입지전적 인물이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 빙상계를 세계적 레벨로 끌어올린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오랜 시간 공고화된 ‘전명규 체제’가 빙상계 전체를 장악하고 오히려 빙상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전명규 전 대한빙상연맹 부회장(왼쪽)과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스포츠마케팅연구담당 사장 ⓒ연합뉴스·사진공동취재단


 

전 전 부회장이 삼성과 끈끈한 인연을 이어온 점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현재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집행위원을 맡고 있는 김재열 전 빙상연맹 회장은 전 전 부회장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인물이다. 김 전 회장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둘째 사위이기도 하며, 제일기획 스포츠사업총괄 사장을 거쳐 현재 삼성경제연구소 스포츠마케팅연구담당 사장을 맡고 있다. 현재 빙상연맹이 파행적인 운영을 하고 있는 저변에는 삼성의 성과주의가 크게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빙상계 일각에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되려는 김재열의 야망과 전명규의 욕심이 맞아떨어졌고, 이는 결국 전명규 체제를 공고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성토했다. 

 

 

“전명규, 부당한 영향력 행사”

 

문체부가 발표한 빙상연맹 감사 결과에는 전명규 전 빙상연맹 부회장이 빙상계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정황이 드러나 있다. 문체부는 “특정인물이 빙상계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권한도 없이 빙상연맹 업무에 개입한 의혹이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문체부의 감사 결과에 따르면, 전 전 부회장은 부회장 재임 당시 사적 관계망을 활용해 이탈리아 트렌티노 동계유니버시아드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 감독이 중징계를 받는 데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해당 감독에 대한 민원서와 징계 요청 진정서를 옛 조교와 지인에게 작성토록 해 연맹에 제출토록 한 것이다. 문체부는 “전 전 부회장은 2014년 3월 연맹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네덜란드 출신 외국인 지도자의 계약 해지, 캐나다 출신 외국인 지도자의 영입 시도 등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밝혔다.

 

문체부는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 일부 선수들이 한국체대에서 이른바 ‘특혜훈련’을 받은 것에도 전 전 부회장이 관여했다고 판단했다. 문체부는 “별도 훈련의 필요성은 인정되나 사실상 특정 선수에게만 허가되는 등 차별적으로 이뤄졌다. 외부 훈련 선수들에 대한 관리도 전반적으로 부실했다”며 전 전 부회장이 “이 같은 외부 훈련과 부적정한 지도에 관여했다”고 밝혔다.

 

전 전 부회장은 지난해 2월 연맹 부회장으로 복귀했다가 문체부 감사가 시작된 후 지난 4월 다시 사임했다. 그러나 문체부는 당사자가 사임한 후에도 징계할 수 있도록 한 연맹 규정을 근거로 전 전 부회장에 대한 징계를 권고했다.

 

전 전 부회장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그의 업적을 이야기한다. 한 빙상계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전 전 부회장은 1998년부터 대표팀 감독을 맡아 한국 쇼트트랙을 세계적으로 키워낸 인물이다. 현재 나오는 음해들은 모두 시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반면 전 전 부회장이 사실상 ‘선수 영입’에만 열을 올렸고, 극단적인 성과주의로 인해 많은 선수들을 등한시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를 오랜 시간 봐온 한 빙상계 인사의 증언이다. 

 

“전 전 부회장은 소위 선수 스카우트에만 열을 올렸다. 중고등부에서 잘하는 선수를 한체대에 영입해야지만 자신의 입지가 공고해지기 때문이다. 전 전 부회장의 수제자라 불렸던 안현수 선수 역시 전 전 부회장이 직접 가르친 제자가 아니다. 안현수를 키운 건 그를 어린 시절부터 가르쳤던 코치들이다. 전 전 부회장은 그저 과실만 따먹었을 뿐이다.” 

연이은 성과에 전 전 부회장의 입지는 점점 높아져갔다. 영향력을 넓힌 그는 국가대표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대표팀의 여러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2014~15 시즌 쇼트트랙 국가대표팀의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전 전 부회장은 대표팀 감독조차 무시하고 의사결정에 개입했다”고 밝혔다. 

 

“전 전 부회장은 계주 순서, 선수 선발 등을 모두 자신이 직접 정했다. 심지어 대표팀 코치 구성도 자신이 직접 챙겼다. 특정 선수들을 한체대로 불러 특훈을 시키는 것은 예전부터 유명했다. 주말 동안 대표팀에서 빼내 한체대에서 훈련을 시키니 정작 평일에 대표팀에 와서는 운동을 못할 지경이었다. 대표팀 감독조차 그 선수들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한 빙상연맹 산하단체 관계자는 쇼트트랙 대표팀 심석희 선수 폭행 사건에도 전 전 부회장의 ‘욕심’이 작용했다고 밝혔다. 한체대 선수를 최고로 만들어야 한다는 욕심이 과도한 압박으로 이어졌고, 이는 코치의 폭행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심석희 선수를 폭행한 코치는 국가대표팀 코치가 아니라, 심석희 선수를 오랜 시간 가르친 코치였다. 전 전 부회장은 한체대 소속인 심 선수의 페이스를 끌어올리기를 원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압박이 고스란히 코치에게 이어져서 결국은 폭행으로 나타난 것이다.”

 

전 전 부회장의 독단에 가까운 개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성과는 나왔지만, 이는 곧 ‘한체대 파벌’이라는 거대한 카르텔로 이어졌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전 전 부회장의 눈에 들어야만 대표선수로 클 수 있고, 이를 의식한 나머지 전횡이 발생한다 해도 불만을 표출할 수 없는 악순환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권금중 성남시 빙상연맹 부회장은 “전 전 부회장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판이 됐다. 그 때문에 선수 부모들도 대놓고 얘기를 할 수 없다. 몇몇 소신 있는 인사들은 쓴소리를 하고 철저히 배제당했다”고 지적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코치에게 폭행당한 것으로 알려진 심석희 선수 ⓒAP 연합


 

 

“삼성의 비호 아래 전권 휘둘러”

 

전 전 부회장이 이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삼성이 지목된다. 이번 문체부 감사 결과에서 회장사인 삼성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나오지 않지만, 많은 관계자들은 전 전 부회장의 배후로 삼성을 꼽았다. 삼성의 성과주의가 ‘전명규 체제’를 공고화했다는 것이다. 

 

삼성은 현재까지 빙상연맹 회장사로 있다.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스포츠마케팅연구담당 사장은 2011년부터 2016년까지 빙상연맹 회장을 지냈다. 전 전 부회장은 2009년부터 빙상연맹 부회장 자리에 올라 실권을 장악했고, 김재열 사장이 빙상연맹 회장으로 취임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날개를 펼쳤다. 

 

김 사장은 2016년 ISU 집행위원에 당선됐다. 당시 그는 빙상연맹의 추천으로 ‘ISU 집행위원 선거’에 출마했다. 이때 빙상연맹이 전방위적으로 김 사장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빙상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2016년 ISU 집행위원 선출 과정에서 모종의 비리가 의심되는 정황도 발견됐다. 엠스플뉴스 보도에 따르면, 2016년 3월29일 당시 ISU 쇼트트랙 기술위원장이던 스토이초 스토이체브(현 ISU 집행위원)가 전 전 부회장에게 보낸 이메일에는 ‘삼성 측에서 나온 분으로부터 감동을 받았다. 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이야기했고, 그 이후에는 삼성 핸드폰을 줬다’고 적혀 있다. 여기에 적시된 삼성 측 인사는 당시 빙상연맹의 고위 임원이었다.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진 데에는 삼성과 전 전 부회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이다. 전직 빙상연맹 관계자는 “삼성과 김재열 전 회장은 결과만 필요했다. 중요한 것은 김 전 회장의 커리어지 빙상계의 발전이 아니다. 그 때문에 성과를 잘 내는 전 전 부회장에게 실권을 주고, ISU 집행위원이라는 커리어를 얻어갔다. 서로 윈윈 한 셈”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현재도 빙상연맹 회장사를 맡고 있다. 일각에서는 삼성이 회장사에서 밀려날 경우 빙상계 전반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우려한다. 2018년 빙상연맹 예산안에 따르면, 올해 빙상연맹 전체 예산은 120억6742만원가량이다. 이 중 회장사인 삼성이 지급하는 돈은 17억원이다. 대한체육회가 45억3000만원으로 가장 많이 지급하고, 나머지 후원사들이 약 17억원을 담당하는 구조다. 권금중 부회장은 “빙상연맹 돈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결국 국민 세금이다. 삼성이 물러난다고 해서 빙상계가 무너질 것이란 논리는 지나친 비약”이라고 지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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