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산포수’로 되살아난 호랑이 사냥꾼들의 항쟁사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前 KBS PD)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6.07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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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8화 - 98주년 맞은 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는 호랑이 사냥꾼

세상이 하루가 멀다 하고 변화하는 요즘이지만, 여전히 제국주의나 식민지배 같은 케케묵은 용어들이 부쩍 눈에 많이 띈다. 그것도 첨단기술에 관한 글에서다. 예컨대 거대 IT기업들이 데이터를 독식하는 ‘데이터 제국주의’, 총칼 대신 기술의 노예가 되는 ‘디지털 식민주의’ 같은 말이다. 여기에다 구글이 여러 나라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는 것을 ‘디지털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 싸우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있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 얘기다. 반크의 활동을 보노라면, 과거 제국주의 침략 시기에 펼쳐진 우리네 어느 항쟁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일제시대 호랑이 사냥꾼들의 얘기를 다룬 영화 《대호》의 한장면

 

‘디지털 제국주의’ 시대에 데자뷰처럼 떠오르는 ‘타이커헌터’

 

서구열강이 처음으로 조선을 침략한 병인양요부터 봉오동전투·청산리 전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 역사에서 외세에 승리를 거둔 현장에는 언제나 산포수들이 있었다. 이들은 1871년 신미양요 때 ‘타이거헌터’, 즉 호랑이 사냥꾼으로 해외에도 알려졌다. 그때 개항을 요구하며 강화도로 쳐들어온 미 해군은 산포수 중심의 조선군 300여명을 죽이고 광성보를 점령했다. 당시 미군 사망자는 3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은 더 이상 항복이나 개항을 강요하지 않고 바로 다음날 철수했다. 왜 미군은 승리하고도 이처럼 도망치듯 물러갔을까?

 

2년 전 필자는 《조선 정예부대, 타이거헌터》라는 방송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이 있다. 당시 미 해군사관학교의 크리스트슨 박사는 “미군 지휘관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하게 저항한 타이거헌터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면서 미군이 서둘러 떠난 건 이들의 결사항전 의지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남북전쟁이 끝난 지 불과 6년, 당시 최강의 전투력과 최신식 라이플총을 갖춘 미군은 ‘독종’ 사냥꾼들의 저항에 혼쭐이 나서 물러간 것이다. 

 

 

신미양요 당시의 격전지 광성보. 오른쪽은 미 해사 박물관에 전시된 산포수 깃발 등 유품과 이를 설명하는 크리스트슨 박사 (사진 제공 = 이원혁)

 

그즈음 호랑이 사냥꾼들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쓰던 조총을 개조한 화승총을 사용했다. 사정거리가 불과 50m 남짓한 이 총은 기껏해야 1분에 두세 발 밖에 쏠 수 없어서 단 한 발로 호랑이 급소를 맞혀야 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호랑이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담력과 정확하게 쏘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와 같이 한순간에 '잡느냐, 잡아먹히느냐'가 갈리는 벼랑 끝 승부에 익숙한 산포수 앞에 1866년 최초로 서양 함대가 강화 앞바다에 나타난 것이다.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산포수부대는 정족산성에 잠입했다. 이들은 성벽 뒤에 숨어 적이 가까이 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코앞까지 바짝 다가오자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화승총 방아쇠를 당겼다. 당황한 프랑스군은 사상자들을 내며 도주했고 그 길로 철수하게 되었다. 16세기 화승총으로 근대무기를 물리친 이런 놀라운 전과는 호랑이 사냥에서 단련된 산포수들의 담력과 사격 솜씨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서양의 침략을 잇달아 물리친 산포수들은 의병항쟁에서도 활약을 이어갔다. 의병을 주도한 유생들은 책 읽고 글은 쓸 줄 알지만 무기를 다룰 줄 몰랐다. 유생 의병장 민용호는 “맹수를 잡는 포수들을 마을마다 찾을 수 있는데 속히 이들을 소집하지 않으면 장차 어찌 적을 죽일 수 있겠소”라며 산포수들을 적극 포섭했다. 무장 출신 이강년 의병장 역시 신분의 구별 없이 힘을 모으자는 ‘합력(合力)’을 역설하며 산포수들을 모아 많은 전과를 거뒀다.

 

반면 신분의 한계를 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1894년에 신분제가 폐지됐지만 여전히 산포수는 하층민으로 여겨졌다. 산포수들을 이끈 평민 의병장 김백선은 양반 의병장에게 ‘대든’ 일로 처형을 당했다. 또 신돌석과 홍범도는 ‘미천한’ 신분 탓에 1907년 결성된 13도 창의군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의병의 결속력과 대중적 지지를 약화시키는 원인이 됐다. 더구나 같은 해 일제가 의병의 씨를 말리기 위해 ‘총포급화약류단속법’을 만들어 조선인들의 총과 탄약을 빼앗으면서 의병항쟁은 급격히 위축됐다.

 

흥미로운 것은 총과 사냥꾼이 사라진 조선에서 느닷없이 ‘늑대 대란’이 일어난 사실이다. 총독부의 통계연보를 들춰보면, 병탄 후 12년 동안 호랑이에 의한 사상자는 30명인데 늑대 피해자는 400명을 넘을 정도였다. 1915년 한해에만 무려 113명이 늑대의 공격으로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상위 포식자인 호랑이가 사라져 늑대 수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총도, 사냥꾼도 없는 마당에  호랑이가 사라졌다니 대체 어찌된 일일까? 

 

당시 일제의 총기 허가 실태를 살펴보면, 조선인 허가자는 수십 명에 그쳤고 일본인은 무려 1만 명을 넘을 정도였다. 결국 조선 산포수들의 총은 빼앗고 대신 일본인들 손에 총을 쥐어줘 호랑이를 ‘소탕’한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인 사업가 야마모토의 ‘정호군(征虎軍)’을 비롯해 미국 씨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아들 등 일본·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사람들이 원정대를 꾸려 호랑이를 마구 잡아들였다. 이로써 한때 2000마리 정도로 추산되던 국내 호랑이는 1920년대에 한반도에서 종적을 감추게 되었다.

 

 

왼쪽부터 조선 말기의 산포수, 구식 화승총, 일본제 5연발 신식 소총. 오른쪽은 사람들을 해치는 조선 호랑이를 표지로 한 프랑스 주간지 ‘르 프티 주르날’ (1909년12월12일자) (사진 제공 = 이원혁)

 

 

조선시대에 호랑이는 ‘공공의 적’이었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호환(虎患)’이 흔했다. 이에 지방마다 호랑이를 잡는 산포수인 착호인(捉虎人)을 두었는데 그 수가 1만 명에 이른 적도 있었다. 영조 때는 호랑이를 다섯 마리 이상 잡은 산포수가 11명이나 나온 기록이 있다. 이들은 평소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유사시에는 군사로 동원됐다. 또 임진왜란 때는 의병으로, 병자호란 때는 호위무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외국의 산포수들도 전쟁에 나선 기록이 있다. 독일은 일찍부터 사냥꾼을 뜻하는 ‘예거’라는 병과를 두어 이들을 민병대로 양성했다. 사격술이 정교한 사냥꾼들은 주로 저격수로 나서거나 참호를 파는 공병들을 엄호하는데 공을 세웠다. 사냥꾼을 정규군으로 편입시킨 나라는 영국이었다. 1차 세계대전 때 영국 보병부대가 독일군 저격수들에게 계속 희생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맞불작전에 나선 영국은 로뱃 정찰대라는 스코틀랜드 사냥꾼들을 저격수로 입대시켰고, 이들은 독일 저격수들을 ‘저격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짐승 잡는 것이나 일본군 잡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이와 비슷한 시기, 일제의 총기 압수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산포수들은 만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호랑이를 겨냥하던 총구를 일제를 향해 겨누었다. 이들 가운데 함경도 북청 출신의 사냥꾼 홍범도가 있었다. ‘날으는 홍대장’으로 불릴 정도로 당대 최고의 명사수였던 그에게 동료 포수들이 모여들었다. 홍범도 부대의 근거지였던 중국 지린성(吉林省) 수남촌의 라철룡 촌장은 그가 “호랑이 잡을 때는 어디에 몸을 숨기고 어떻게 끌어들이고, 언제 몰아야할지 잘 생각해야 한다. 일본군 잡는 것도 짐승 잡는 우리 방식대로 하면 된다”라는 말을 즐겨했다고 전했다. 

 

홍범도는 만주에서 국내로 넘어와 일본군을 공격하고, 추격하는 이들을 봉오동의 깊은 산속으로 ‘끌어들이는’ 작전을 폈다. 또 일단 들어오면 다시 나갈 수 없는 오묘한 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기다렸다. 1920년 6월 그와 산포수들이 호랑이 사냥에서 터득한 유인술과 매복술, 사격술에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봉오동 승전을 이룬 이들은 넉 달 뒤 벌어진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해 우리 항쟁사에 큰 자긍심을 남겼다. 

 

6월7일은 봉오동 승전 98주년이다. 신분의 한계로 고단한 삶을 산 산포수들은 글을 배우지 못해 항쟁의 기록을 남기진 못했다. 하지만 서양의 침략과 함께 ‘우연히’ 역사의 전면에 나서 의병·독립군으로 끈질긴 항쟁을 펼쳤다. 그리고 지금 이 땅에는 일본의 독도 침탈에 맞서 20년 동안 쉼 없이 싸우고 있는 ‘반크’란 단체가 있다.

 

구식 화승총 대신 마우스와 앱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일본의 만행에 이처럼 ‘야무지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면, 이들이야말로 현대판 ‘디지털 산포수’가 아닐까 싶다. 이런 젊은이들이 있어 아직은 희망이 있는 세상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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